209화
“진호 씨, 혹시 요즘 운동해요?”
뜬금없는 질문에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대리님이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회의 세팅을 위해 미리 커피를 사러 가려는데, 대리님이 본인 커피도 살 겸 도와주겠다며 함께 외출한 참이었다.
심 과장님이라면 모를까 개인적인 질문은 거의 하지 않던 대리님이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보지. 나, 운동하는 사람처럼 보이나? 대충 내 몸을 훑었으나 딱히 뭐가 달라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더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네? 아니요, 딱히 뭐 하는 건 없는데요. 갑자기 왜요?”
“아니, 뭔가 되게 혈색이 좋아져서. 건강해 보인달까?”
혈색? 그 말에 더듬더듬 얼굴을 만져 봐도 딱히 전과 달라진 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러고 보니 피부가 좀 더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얘기가 좀 실례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요즘 어딘가 되게 건강해진 것 같아서 한번 물어봤어요. 혹시 무슨 운동 하거나 영양제 같은 거 먹는 거면 나도 추천 좀 받으려고. 1년 전만 해도 몰랐는데, 요즘엔 막 이러다 어디든 뭐 하나 문제 생길 거 같아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대리님이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코를 찡긋거리셨다. 문득 매일 아침 챙겨 먹는 영양제가 생각났다. 그리고 뒤를 이어 매끼 먹고 있는 영양소 잡힌 식사와 충분한 수면 시간도 떠올랐다.
그래, 달라진 점이 없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이불을 차게 만든 그날 밤 이후 민선우가 제시한 계획표를 정말 철저하게 지키며 살았다.
사람을 바꾸는 건 역시 충격 요법만 한 게 없었다. 옛날부터 뭔가를 마음먹어도 짧으면 하루, 길어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던 내가 벌써 한 달을 넘기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나는 마침 며칠 전에 검사한다고 올라갔던 체중계의 숫자를 떠올리며 답했다.
“운동을 따로 하진 않는데 영양제는 먹고 있어요. 사실 영양제보다는 그냥 밥을 잘 챙겨 먹어서 그런 것 같지만…. 좀 급격히 빠졌던 살이 다시 올라서 혈색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러자 본인 몸이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지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던 대리님이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영양제 뭐 먹는데? 혹시 그거,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거야?”
응? 그때 그 의사 선생님?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대리님이 이렇게 지칭할 만한 인물은 내 주변에 딱 두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왜, 친한 형 동생 사이라고 했던 의사 선생님 말이야.”
누굴 말하는지 몰라 인상 쓴 줄 알았는지 대리님이 기억나지 않냐면서 부연 설명을 붙였다. 나는 괜히 심통 나는 마음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 형이랑 저 별로-”
그러나 내 말은 갑자기 어깨를 감싸며 끼어드는 사람 때문에 도중에 끊겼다.
“친하죠. 엄청 친한 사이죠, 우리.”
한숨이 나왔다. 안 봐도 뻔하지, 뭐. 나는 힐긋 곁눈질해 의사 가운 위 이름을 확인했다. 오늘은 남궁후구나.
“어? 너 방금 또 이름 봤지! 너 그거 안 봐도 우리 구분할 수 있는 거 아는데 왜 자꾸 그래.”
뭐래, 눈치는 쓸데없이 빨라서.
“아닌데요. 저 구분 못 하는데.”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말하니 녀석이 크게 상처받았다는 듯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대리님을 향해 입 모양으로 가시죠, 라고 말하고 몸을 돌렸다.
“매정해…. 하지만 우리 진호는 그래도 되지. 응, 평생 그래도 돼. 그래도 좋아. 최고야.”
무시. 이상한 말을 하는 놈은 무시가 답이다. 나는 꾸며 냈을 게 분명한 훌쩍 소리를 내는 녀석을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커피숍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몇 번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나보다 반보 정도 늦게 걸어오던 대리님께 오랜만에 뵙는다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리님도 얼떨떨하지만 반가운 듯한 목소리로 마주 인사하고 서로 안부를 묻는 것을 듣고 있자니 불뚝 심통이 올라왔다.
대리님이랑은 언제 또 저렇게 친해졌대. 입을 비죽이고 있자니 어깨에 익숙한 무게가 실렸다.
“근데 무슨 얘기하고 있었길래 내가 나왔어, 응?”
녀석은 친근한 형으로 어깨동무를 하는 척,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힐끔, 곁눈질했다가 얼른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밖에서 저렇게 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나는 모를 수 없을 정도로 꿀이 뚝뚝 떨어지던 눈빛을 못 본 셈 치고 어느새 옆에서 걷고 있는 대리님의 눈치를 봤다.
다행히 대리님에겐 그게 느껴지지 않는지 영양제 얘기를 하고 있었다면서 나 대신 남궁후의 질문에 답해 주고 계셨다.
녀석들이 이런 식으로 날 찾아오게 된 것은 2주 전부터였다. 민선우가 내게 마주칠 수도 있다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녀석들은, 언젠가부터 내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보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 내가 보고 싶고, 어느 날은 눈 오는 날이라 내가 보고 싶고. 흐린 날, 추운 날, 하늘이 예쁜 날, 맛있는 걸 먹은 날, 일이 바쁜 날, 일이 없는 날. 각자가 보내는 하루하루 모든 순간을 핑계 삼아 내게 보고 싶다고 고백하듯 문자 했다.
내가 그 문자를 무시하면 다른 화제의 문자를 보냈다가, 날이 바뀌면 또 다른 이유를 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라 심술부린다고 나는 보고 싶지 않다고 답장하면 순순히 알겠다고, 미안하다고 말한 후, 그다음 날은 그 말을 건너뛰었다.
그게 처음엔 너무 같잖고 귀찮았는데 어느 날 문득 서럽고 화가 났다. 내가 어디 있는 줄 아니까 마음만 먹으면 보러 올 수도 있는 놈들이,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정작 보러오진 않는다는 게 너무 가식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세 명에게 나는 분노를 담아 한 자 한 자 꾹꾹 누른 문자를 보냈었다.
[미안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할 시간 있으면 발 닦고 잠이나 자요.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손가락 놀릴 시간에 한 번이라도 보러 왔겠지.]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다음 날 쌍둥이는 점심시간에 맞춰 사무실 앞에, 최태혁은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 앞에 있었다.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녀석들에게 왜 여기 있냐고 물었고, 녀석들은 하나같이 활짝 웃으며 똑같은 말을 했다.
‘보고 싶었어, 진호야.’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 고마워. 그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후회가 잔뜩 스며 있어서, 활짝 웃으며 안도하는 모습이 어딘가 짠한 마음에 뭐 하러 왔냐 타박하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이루어진 어색하고 짧았던 대면 이후 녀석들은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기 시작했다.
“잘 자고 잘 먹고, 술 담배 안 하고. 그걸 누가 몰라요, 선생님.”
“하하하. 안타깝지만 건강엔 요령이라는 게 없어요, 진짜. 있으면 저도 좀 알았으면 좋겠네요.”
녀석들은 하나같이 욕심내지 않겠다며, 내가 꺼지라면 꺼지고 건들지 말라면 건들지 않았다. 그에 대해 화를 내지도, 변명하지도 않고, 그저 알겠다고 오늘 봐서 좋았다고 말하면서 나를 보내 줬다.
너무 얄밉고 미운, 꼴도 보기 싫은 놈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점점 녀석들에게 가라고 말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심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민선우가 내게 ‘치워 줄까?’하고 물어봤을 때 나는 무심코 ‘괜찮다.’라고 답해 버렸다.
지금도. 나는 정말 의사 선생님 같은 얼굴로 대리님과 이야기하는 남궁후를 한 번 보고,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녀석의 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이제는 안다. 아까 한 번 쳐 냈으니 이번에도 쳐 낸다면 녀석은 오늘만큼은 다시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리님과 하던 얘기를 능숙하게 마무리하고 퇴장하겠지.
그걸 알면서도 나는 녀석을 구분하지 못하는 척하고 흘겨보거나 친하지 않다고 말하는 등의 심통만 부릴 뿐, 가라고 말하거나 비슷한 분위기조차 풍기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히 세 명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주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최태혁과 남궁후, 남궁호, 민선우까지 언급하면 자동으로 생각나는 한 사람, 정새빈은 놀랍게도.
삐비빅.
며칠 전부터 민선우네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쫑쫑!”
물론 민선우는 정새빈을 절대 집에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적인 지위를 지키고 싶어 하는 또라이와 사회적인 지위 따위 좆도 신경 쓰지 않는 또라이가 만나면 당연히 전자가 불리할 수밖에 없는 법.
불법 침입, 방화, 자해, 회사 로비에서 진상 부리기 등 온갖 종류의 개지랄을 떨어 댄 정새빈은 당당하게 이 집 안에 발을 들였다.
조건은 내 스케줄을 방해하지 않는 것. 그걸 지키지 못한다면 제 발로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새빈은 이제껏 내 스케줄을 방해하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정말 스케줄을 방해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또라이 짓을 멈추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형…?”
“응?”
“더러우니까 당장 갈아입어 정새빈.”
“닥쳐, 소시오패스.”
나는 알몸에 앞치마만 두르고 있는 정새빈의 흉한 몰골과 웃는 얼굴로 독설하는 민선우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회사를 다녀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벼운 샤워 후 실내복으로 갈아입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