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몸이 또 들렸다. 힘없이 축 늘어져 적잖이 무거울 터인데, 들어 올리는 민선우에게서는 힘든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들리는 내 쪽에서 끙끙거리는 신음이 나왔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그냥 몸이 들썩인다는 것 자체만으로 힘들었다.
피곤해. 나는 안 그래도 반쯤 감겨 있던 눈을 아예 감아 버렸다. 눈꺼풀이 닫히면서 맺혀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진호야, 왜 울고 그래. 이제 그만하겠다고 했잖아.”
거짓말. 민선우가 내 볼을 제 어깨에 기대게 한 후 등을 토닥이면서 하는 소리에 이젠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저 녀석은 정말 그만해 줄 듯하면서 내게 온갖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시킨 장본인이었으므로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 나비 정말 지쳤나 보네. 아니면 삐져서 말이 없는 건가?”
둘 다였다. 아니, 이건 정확히 해야지. 삐진 게 아니라 포기한 거다. 포기한 데다 지치기까지 한 마당에 괜히 입을 열어 저놈을 자극하고 싶지도 않았고, 더 이상 농락당하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이런, 정말 한마디도 안 할 생각인가 봐? 형 말 무시하는 건 정말 안 좋은 버릇인데. 지금 혼을 낼 수도 없고, 이거 어쩌지.”
혼. 그 단어 하나에 늘어져 있던 몸이 일순 흠칫 떨렸다.
민선우가 혼을 낸다며 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무섭고 아팠던 순간들. 거기다 인정하기 싫지만, 둔통 뒤에 찾아와 그나마 남은 이성을 당황하게 했던 감각이 수치심을 자극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녀석의 목을 향해 놓여 있던 고개를 돌려 바깥을 보도록 기댔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 표시였다.
나 좀 그만 괴롭히란 말이야, 이 변태 자식아.
“하하, 알았어.”
다행히 민선우도 그렇게까지 양심 없는 놈은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나를 추슬러 안았을 뿐, 또 뒤로 손가락을 집어넣거나 손바닥으로 어딘가를 내려치지는 않았다.
나는 녀석이 내 뒤통수에 입을 맞추는 것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체액으로 뒤덮인 몸이 찝찝하긴 했지만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이는 손길도 졸음을 불러왔다.
처음 녀석이 등을 건드릴 때만 해도 이번엔 또 뭘 하려고 그러나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야릇하고 끈적했던 손길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담백했다. 그렇다 보니 피로가 경계심을 잡아먹고 몸을 불렸다.
“진호야, 내일 아침은 조금 늦게 일어나도 괜찮아. 대신 일어나서 꼭 아침 먹는 거야. 나머지 계획도 시간 조정해 놓을 테니까 지키고. 알겠지?”
와. 절로 눈이 떠졌다. 황당한 나머지 수마로 빠지려던 정신이 반쯤 돌아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일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면 계획 페티시 있는 거 아니야, 이 자식?
그렇게 생각하는데 뒤통수로 녀석의 목이 울리는 게 전해졌다. 소리 없이 웃는 모양이었다.
“계획 페티시가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진호가 내 품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좋은 거야.”
어떻게 알았지? 혹시 독심술도 하나? 움찔 어깨를 떨자, 녀석은 잠시 멈췄던 손을 움직여 다시 등을 토닥이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진호를 위해 만들어 놓은 안전하고 푹신한 세계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로지 나로만 가득 채우고, 시작부터 끝까지 내가 안배해 준 길만 걸으며 행복했으면 좋겠어. 진호는 그 정도로 사랑스럽고 귀엽거든.”
적당히 아픈 걸 좋아하는 야한 몸마저도.
둘만 있는 방에서 굳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오는 마지막 말에 순간 몸이 굳었다. 그리고 이내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기대고 있던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 건데 부끄러워하네. 걱정하지 마, 진호야. 이걸 아는 사람은 앞으로도 나밖에 없을 테니까. 내 나비의 가장 사랑스러운 점을 나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 알릴 리가 없잖아.”
남들한테 말하지 않는 건 당연한 거고, 네가 아는 거랑 내가 깨달았다는 거 자체가 그냥 문제거든.
“우선은 오늘 너무 늦었으니 얼른 자자, 진호야. 진호가 잠들어야 내가 또 이성을 잃는 일 없이 씻겨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
“……?”
“아니면 진호도 힘들긴 하지만 사실은 내심 더 하고 싶은 건가? 그럼 아까처럼 가만히만 있으면 형이 다 해 줄 수 있는데.”
얼른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고 숨까지 참았다. 민선우는 재빠른 내 반응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바깥을 향했던 고개를 제가 있는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침대 등받이에 거의 눕듯이 기대 누웠다.
마주 보고 안겨 있던 내 몸도 비스듬히 기울어진 녀석의 상체를 따라 더 아래로 내려갔다. 민선우는 자기 몸 위에 엎드려 있는 나를 옆으로 밀지 않고 그대로 조금 세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조금씩 봐줬지만, 내일 오후부터는 그러지 않을 거야. 지금까진 네가 벌을 견딜 수 있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어서 그런 거였는데, 오늘 보니까 걱정할 필요 없었던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았는지 녀석의 손이 게슴츠레 뜨고 있던 눈 위로 덮였다. 어두워진 시야와 눈가를 감싸는 따뜻한 온기. 그 두 가지가 무거웠던 눈꺼풀을 천근으로 만들었다. 나는 결국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생각보다 벌을 좋아해서 이게 정말 벌이 될까 싶긴 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진호는 워낙 엄살이 심하고 겁이 많으니 설마 벌 받고 싶어서 일부러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굴진 않으리라 믿어.”
내 눈을 감긴 녀석의 손이 이번엔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 닦아 주고, 머리 한 올 한 올 골라 넘겨 주었다. 두피를 스치는 손가락의 느낌이 퍽 좋아 나도 모르게 점점 거기로 신경이 쏠렸다.
“아, 그렇다고 무조건 내 말을 듣기만 하는 것도 곤란해. 진호가 솔직한 만큼 내가 더 진호를 잘 파악할 수 있거든. 나는 그렇게 융통성 없는 주인은 아니니까 너무 겁먹지 말고, 말해야 할 건 말해 줘.”
진호의 어리광은 귀여워서 자주 보고 싶기도 하고.
녀석이 이마에 입을 맞춘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뗐다.
방금 이상한 단어가 들린 것 같은데. 반밖에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힘겹게 올려 녀석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자세를 바꾼 녀석은 자기 팔을 베고 누운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의 눈은 바로 마주쳤다.
녀석이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손을 뻗어 내 눈을 덮었다. 다시 어두워진 시야. 그 상태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나비는 복잡하게 이것저것 신경 쓸 필요 없어. 고민은 내가 해. 힘든 것도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루게 해 줄 거고,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갖게 해 줄 거야. 뭐든 복잡하고 힘든 건 다 내가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저 편하게, 쉽게 살면 돼”
그게 좋은 건가. 고민도 굴곡도 없는 삶. 단어로 늘어놓고 보니 썩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가볍게 알았다고 하기엔 뭔가 더 깊게 생각해야 할 만한 주제 같은데 머리가 굴러가지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은 이제 아무리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았고, 두피를 마사지하는 녀석의 손길은 너무도 기분 좋았다. 녀석의 피부와 맞닿은 곳에서 올라오는 온기와 내 몸을 안아 오는 적당한 압박에 단단한 안정감까지 느껴졌다.
“어려운 건 없어. 간단해. 진호는 이제 내 말만 들으면 된다는 거. 이거 하나만 기억하면 되는 거야.”
조곤조곤한 어조로 은근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점점 멀리 들렸다. 가까스로 잡고 있던 정신이 빠른 속도로 몽롱해졌다. 아, 진짜 졸리다. 그 생각만이 까만 세상에서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아, 정말 오늘 많은 일이 있었어.
“잘 자, 진호야. 내 소중한 나비.”
귓가를 간지럽히는 다정한 인사를 들으며 나는 아무래도 내일 일어나면 이불을 엄청 찰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잠에 들었다.
* * *
그리고 그건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아주 정확한 예언이었다.
“아아아아악!”
잠에서 깨자마자 뽀송한 시트에 얼굴을 비비던 나는 스쳐 지나가는 간밤의 기억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황급히 놀라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행히 민선우는 먼저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녀석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솟아오르는 쪽팔림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얼굴을 침대에 파묻고 이차로 소리를 질렀다.
“으으으으읍!”
미쳤다. 진짜 미쳤다. 죄 없는 침대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아무리 해 봐도 전날 기억은 점점 더 선명해져 너무 괴로웠다.
와, 진짜 미쳤다. 씨발, 진짜 짱구가 바지 벗고 맞는 거랑 내가 거기서 바지를 벗어야 하는 거랑 뭔 상관이라고 홀라당 바지를 벗냐고, 김진호. 뭐? 숫자를 세? 그걸 뭐 하러 자원해서 그 꼴을 당해! 왜! 그 새끼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데 숫자 20을 못 셀 리가 없잖아!
퍽퍽퍽.
나는 능글맞은 민선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녀석의 베개에 혼신을 담아 주먹질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런다고 해서 쪽팔림이 줄어들거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문제는 나지. 그래, 내가 잘못한 거지. 진짜 너무 쪽팔리고 어이가 없어 한숨이 푹푹 나왔다. 그리고 민선우도 민선우고 내가 한 창피한 언사도 언사인데, 가장 당황스러운 기억은 따로 있었다.
내가, 맞는 걸 좋아할 수도 있다니. 아픈 걸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으로서 결단코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나 어제 일만 보면 차마 부정할 수도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무 흥분해서 느껴지지 않았던 숙취가 이제야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면서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씻자….”
그래, 내가 정말 그랬을 리 없다. 술이 몸에서 좀 이상하게 작용한 것이 틀림없다. 나는 현실 부정이라는 단어를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며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기 아래에 섰다. 그리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다짐했다.
이제 정말 술은 죽어도 입에 안 댈 것이다. 그리고 규칙은 정말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것이다. 김진호 인생에서 가장 비장한 결심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