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더라. 자꾸 몽롱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눈을 비볐다가 그대로 손을 내려 슬슬 저리기 시작한 다리를 주물렀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정장에 코트까지 아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민선우를 보고 반가워서 뛰기 시작했고, 그러다 발을 헛디뎌서 넘어질 뻔했지만 재치 있게 균형을 잡았다. 게다가 답지 않게 내 이름을 크게 외치며 걸어오는 민선우를 향해 브이를 했다.
그랬더니 민선우가 뭐라고 했더라? ...아. 아무 말도 안 했었구나. 그대로 아저씨처럼 한숨을 푹 쉬더니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빙글빙글 도는 세상이 휙휙 지나가는 광경에 와와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그 뒤엔 차에 타서 집에 왔고, 뭔가 집에 가기 아쉬운 마음에 지하 주차장에서 밖으로 나가려다 민선우에게 잡혀 이번엔 그 어깨에 둘러메졌다. 거꾸로 본 세상은 더 울렁울렁거려서 재밌었지만 토할 것 같아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집이었다. 그 뒤는 눈 깜짝할 새에 민선우 손에 이끌려 화장실에 가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잠옷을 입었다.
그래, 잠옷. 나는 입을 삐죽이면서 잠옷 끝자락을 쭈욱 잡아당겼다. 아니, 이대로 자기엔 아쉽지만 그래도 잠옷은 자라고 입는 거잖아. 근데 왜 민선우만 침대에 앉아있고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하냐고.
“진호야.”
“나도 푹신한 침대 좋아하는데 왜 나만....”
“김진호.”
어. 무서운 목소리. 오싹한 느낌에 구시렁거리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거의 항상 곡선을 그리고 있던 민선우의 입꼬리가 일자가 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사람 같아진 인상에 놀라 눈만 깜박이고 있으려니, 녀석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지켜진 계획이 단 하나도 없네. 늦게 일어나고, 시간 없다고 아침이랑 영양제는 그냥 건너뛰고. 점심은 부실하게 먹고, 갑작스럽게 회식한다고 공부도 건너뛰어, 귀가 시간 어겨. 거기다 술까지 마셔? 의사가 분명 약 먹는 기간엔 술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어… 그, 그래서 혹시 몰라서 저녁 약은 안 먹었으니까 괜찮지 않을….”
...까. 내 딴엔 변명이라고 한 건데, 더 살벌해지는 눈빛에 겁을 먹고 마지막은 거의 입 모양으로만 중얼거렸다. 절로 목을 움츠러들었다. 녀석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는 나를 조용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루. 딱 하루였는데 나비야. 응?”
한숨 섞인 목소리. 나는 녀석의 말에 듬뿍 담긴 질책에 눈을 내리깔며 괜히 딴청을 피웠다. 모두 나를 위한 약속이었는데 내가 하나도 안 지킨 게 맞으니까. 회식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머지는 다 내가 정신 못 차려서 그런 게 맞아서 양심상 고개를 수그렸다.
아니 근데 아무리 그래도 민선우의 저 태도는 너무 무서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했지만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며 참았다.
“웬만하면 한 번은 봐줄까 싶었는데 안 되겠다.”
“...응? 봐주다니요? 나 봐줘요? 뭐를?”
“안 봐줄 거라고 말했어. 약속한 대로 진호는 오늘 벌 받을 거야.”
어? 벌? 약속한 벌은 하나밖에 없는데. 다른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쟤 방금 내 엉덩이 때린다고 말한 거야? 나 엉덩이 맞아? 진짜?
“응. 진호 오늘 엉덩이 맞아.”
“왜? 왜요?”
“약속했잖아. 계획 안 지키면 벌로 엉덩이 맞기로. 시간 못 지키면 1분당 한 대, 약을 먹지 않으면 한 알당 한 대, 식사는 식사량과 사정 봐서 정하기로 했잖아. 그렇지?”
그건 맞았다. 이 새끼 진짜 미친놈인가 생각하게 했던 황당한 제안. 하지만 그렇게 싫으면 내가 지키면 되는 거고, 벌이라는 게 싫을수록 열심히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설득이 되어 그러겠다고 약속했었다. 덕분에 작심삼일은 수월하게 넘겼었지. 응.
근데 그렇다고 오늘 늦게 일어난 시간 일 분당 계산하고 안 먹은 영양제랑 알약 개수 한 알당 계산하면 그게 다 몇 대야? 한 대, 두 대, 세 대..... 어어… 너무 많은데...?
“나, 나 아플 거 같은데. 너무 많은, 많은데....”
“그만큼 많이 어겼으니까.”
자업자득. 살포시 웃으며 하는 소리에 경악했다. 이럴 순 없어. 그걸 다 맞으면 죽어. 나는 눈을 굴리면서 무릎걸음으로 녀석에게 다가갔다. 내가 지척에 다가가 자기의 무릎에 손을 올릴 때까지 가만히 있던 녀석은, 내가 간절한 눈을 하고 위를 올려다보자 무심한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었다.
“그동안 잘하다가 한 번, 딱 하루 뭐가 꼬여가지고요. 그래서 그런 건데. 막 일부러 막 게으름 피우고 그런 거 아닌데?”
“응, 알지. 진호 열심히 한 거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됐다. 고개를 끄덕이는 민선우의 말이 기꺼워서 맞장구를 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내 입에서가 아니라 민선우 입에서 나왔다. 아주 단호하게.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잖아.”
너무 맞는 말이라 반박은 못 하겠는데 그걸 다 계산해서 맞기는 싫고. 울상인 내 얼굴을 보고 민선우가 몸을 앞으로 숙여 볼에 입을 맞춰왔다. 본인도 안타깝다는 듯 살짝 찡그려진 미간이 너무 얄미웠지만, 그런 녀석의 몸이 뒤로 물러나기 전에 덥석 손을 잡고 이번엔 다른 방법으로 설득했다.
“그럼 나 그거 쓰면? 상! 나 아직 상 많이 모아놨잖아. 상으로 횟수 줄일래. 응? 줄일래요.”
“...상?”
응응. 내가 이런 똑똑한 방법을 생각해낼 줄 몰랐나 보다. 민선우가 당황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녀석에게 일부러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어? 상을 이런 데 써도?”
“응! 나는 엉덩이가 소중해. 내 엉덩이야!”
엉덩이를 양손으로 주섬주섬 감싸며 호기롭게 외치자 가만히 듣고 있던 녀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았던 사람치고 참으로 어쩔 수 없다는 말투였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리고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고민하던 민선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20대. 20대 정도면 잘 맞을 수 있잖아.”
많은 거 같은데. 20대도 충분히 많은데 말하는 사람이 저렇게까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하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원래대로 계산하면 배는 더 맞아야 하잖아. 그동안 잘해온 거 참작해서 많이 줄여준 거야.”
저게 또 맞는 말 해서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네. 그래, 뭐. 학교 다닐 땐 몽둥이로도 열대씩 맞고 그랬는데 손으로 20대면 못할 것도 없지 뭐.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녀석이 내 볼을 톡톡 치면서 아래를 눈짓했다.
“그래. 정해졌으니 바지부터 벗자 진호야.”
“...응?”
갑자기 바지는 왜?
“원래 손으로 엉덩이 맞을 땐 바지랑 팬티 벗고 맨살로 맞는 거니까. 아니면 옷 입고 매로 맞을래?”
...그런 건가? 하긴. 그러고 보면 짱구도 엉덩이 맞을 때 맨살이었던 기억이 있다. 옷을 입고 매로 맞는 것보단 그냥 벗고 손으로 맞는 게 훨씬 덜 아플 것 같다.
맞는 횟수를 협상하기 위해 녀석에게 바짝 붙어 섰던 몸을 뒤로 물렸다.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일어나려고 손으로 바닥을 짚는데 팔에 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에이, 쯧. 취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래! 괘씸한 마음이 들어 팔을 한번 노려봐주고 별수 없이 앉은 채 낑낑대며 잠옷 바지와 팬티를 벗었다. 그러자 조용히 기다리던 민선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이리 와, 나비야.”
나는 결연한 마음으로 그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녀석에게 다가갔다. 몇 번의 무릎걸음으로 금방 도착한 민선우의 앞.
“어? 어어?”
겨드랑이 밑이 잡히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내 몸은 민선우 무릎 위에 엎어진 자세가 되었다. 무릎이 바닥에 닿지 않아 잠시 허공에서 다리를 허우적대다가 발끝으로 바닥을 디뎠다. 조금만 뒤로 가도 무릎으로 디딜 수 있을 것 같은데, 민선우가 등을 꾹 누르고 있어 상체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자세면 위에서 내 엉덩이가 너무 적나라하게 다 보일 텐데.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여 엉덩이를 가리려던 나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밀어내는 손길에 결국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갈 곳 잃은 손을 들어 녀석의 바지 옷자락을 꾸욱 쥐는 순간, 위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시작할 거야.”
그 말 한마디에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