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203)화 (202/234)

203화

“...어?”

시계가 잘못된 것 같다. 분명히 알람을 맞춰놨는데 더듬더듬 찾아서 가져온 핸드폰 액정에 떠 있는 시간은 그것보다 한참은 지나있었다. 왜? 왜 지금 8시 반이야?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큰일 났다. 진짜 씨발, 진짜 큰일 났다!

“씻, 잠, 문자… 아니, 씨발!”

문자고 뭐고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지금 회사에 지각하게 생긴 마당에 그게 뭐 중요해. 나는 화장실 쪽으로 뛰어가며 벗고 있던 잠옷을 마저 벗어 던졌다. 그리고 다급하게 칫솔에 치약을 묻혀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미친, 씨발, 미친, 씨발! 할 일이 없던 비속어가 방언 터진 것처럼 술술 나왔다. 이런 초조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대강 씻고 나와 아무거나 주워 입고 다시 핸드폰과 가방을 들었다. 방을 나서면서 켠 핸드폰 액정에 비친 시간은 8시 37분. 부재중 전화 표시와 문자가 왔다는 알람은 그저 눈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통화버튼을 눌러 기사님 번호를 검색해 전화했다. 나에겐 다행이고 기사님껜 죄송스럽게도 기사님은 약속된 시간부터 대기 중이셨던 모양이었다. 다리를 떨면서 기다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지하, 익숙한 차에 올라타 바로 출발한 나는 정각 9시에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허억, 헉, 허억.”

“진호 씨 엄청 뛰었나 보네?”

“네, 헉, 네.”

누가 봐도 전력 질주한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니 옆자리 대리님이 작게 큭큭댔다.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진짜 학생 때도 이렇게까진 안 뛰었는데. 나도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구나. 탈력감에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가방을 책상 밑으로 밀어 넣고 주섬주섬 일할 준비를 했다.

“늦잠 잔 거야?”

“하… 네. 정말 기분 좋게 일어나서 핸드폰 확인하는데 몇 시였는 줄 아세요? 8시 반이었어요. 세상 무너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하, 그건 무너지지. 그래도 용케 지각 안 했네. 역시 가까이 살면 그런 게 좋은가 봐. 고생했는데 진정도 할 겸 탕비실 가서 뭐 좀 마셔요. 아침 못 먹었을 텐데 과자라도 좀 먹고.”

대리님이 사람 좋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정말 좋으신 분이다. 나는 겸연쩍게 웃으며 그럴까요, 하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 씻어 뒤집어둔 텀블러를 들고 탕비실로 가는데 차분해진 머릿속에 오늘 지켜야 했던 계획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오전에 일어나야 했을 시간, 먹어야 했던 약, 영양제, 아침, 차에 타야 했던 시간. 하나도 지켜진 것이 없었다. 약은 가방에 있으니 지금이라도 먹으면 된다지만, 나머지는 이미 시간이 지났거나 집에 있었다. 거기다 도시락. 도시락도 가져오지 않았다. 식탁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도시락을 상상하며 이마를 짚었다. 와, 진짜 어떡하지.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일단 탕비실로 향했다. 일어난 시간과 밥은 어쩔 수 없다 치고, 약은 지금 먹고 영양제는 먹은 척하자. 아침은 일단 급한 대로 탕비실 과자 먹고 오늘 입맛 없어서 간단히 먹었다고 하고. 점심은 회사 동료와 약속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안 되겠지. 솔직히 이런 걸로 달래질 민선우가 아닌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희망을 품고 걸음을 재촉했다.

생각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난 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 문자에, 민선우의 답은 아주 간결했다.

[응, 알았어 :) 이따 보자.]

목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예상대로 하나도 수습된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은 진호 씨도 같이 가자. 응?”

오늘 진짜 왜 이러지. 오전처럼 또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하는 대리님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말았다. 나는 좋게 말하면 인턴이고 솔직히 말하면 단기 알바생이다. 그래서 자연히 사무실 회식에 같이한 적이 없었다. 그걸 딱히 섭섭해하지도 않았다.

근데 나와 가깝게 지내고 날 챙겨주던 다른 직원분들은 그게 매번 미안했나 보다. 오늘은 나도 같이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팀장님께 건의했고, 당연히 그래도 된다는 답을 들었단다. 점심을 같이 먹으러 온 멤버 모두가 가서 얘기도 좀 더 하고, 고기도 실컷 먹으라면서 설득하는데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머릿속은 엉켜버린 스케줄을 정리하느라 엉망이었다. 오후 스케줄도 다 망했네. 차라리 상담이라도 잡혀있으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또 하필 내일이었다. 아니, 이건 불가항력이니까 정말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남몰래 침을 꿀꺽 삼키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심호흡 몇 번 후 데려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 앞에 구구절절 사연을 써서 문자를 보냈다. 바로 없어진 1과 몇 분이 지나서야 온 답.

[그래, 잘 다녀와 :) 술은 안 돼.]

‘술은 안 돼’ 뒤에 웃음 표시가 없는 걸로 봐선 술은 정말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어어? 진호 씨, 그거 술!”

“푸학-!”

오늘 무슨 마가 낀 것이 틀림없다. 알자마자 뱉어내긴 했지만 이미 한 모금 정도는 넘어가 버린 술기운에 서서히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허허 웃었다. 흥이 올라 쓸데없는 내기를 하다 먹게 된 청양고추가 너무 매운 나머지 눈에 보이는 아무 잔이나 잡고 들이켠 게 문제였다. 심지어 보통 고깃집에 없다는 도수 높은 술을 보고 한번 마셔보고 싶었다면서 시켰던 사람 잔이어서 그런지,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목이 타 없어지는 줄 알았다.

나는 누군가가 괜찮냐면서 쥐여준 물컵의 물을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면서 생각했다. 와, 망했다. 술은 진짜 안 된다고 했는데. 아니, 근데 이것도 생각해보면 좀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닌가. 내가 뭐 그게 술인 줄 알았나? 모르고 마셨는데 봐줘야지. 안 그래도 매운 입에 들이부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그 정도면 벌 받은 거잖아. 어차피 맛대가리 없어서 줘도 마시고 싶지 않은 술인데, 실수로 한 모금 쪼금 마신 거 가지고 혼나면 억울할 거 같은데.

근데 여기 좀. 갑자기 좀 더워지지 않았나?

“대리님. 저기, 대리님!”

“음? 왜 진호 씨?”

“여기 좀, 덥지 않으세요?”

“어? 덥다고? ...헉. 설마 진호 씨!”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대리님이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에이, 설마. 아니겠지. 에이. 라고 중얼거리면서 나를 이리저리 살피셨다. 그냥 덥지 않냐고 물어본 건데 왜 그러시지. 설마. 설마 내가 취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아하, 아하하! 거참. 내가 아무리 술이 약하다고 해도 설마 저거 한 모금에 바로 취했으려고! 나도 성인 남잔데! 설마!

“아 대리님! 설마 저 지금 취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에이, 아니에요. 그냥 좀 더워진 거 같아서 물어본 거 가지고. 대리님! 저 김진호, 그렇게까지 약하진 않습니다! 저 이래 봬도 맥주 두 잔은 거뜬히 마시는 놈입니다!”

“...그, 그래?”

나의 매우 또렷한 해명을 들은 대리님은 취한 게 아니라면 됐다면서 내 어깨를 토닥였다. 약간 미심쩍고 떨떠름해 보였지만 어쨌든 알아주신 것 같으니까. 어쩐지 매우 뿌듯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다 보니 목이 말랐다. 덥기도 덥고 뭔가 엄청 시이이이원한 걸 마시고 싶은데. 얼음물 없나. 얼음물. 불판 옆에 놓인 물잔에 남은 물은 보기만 해도 미지근해 보였다. 그렇다고 새 물을 담기엔 물통이 비어 있었다.

아, 뭐야. 물이 없다는 걸 알자마자 역설적으로 더 목이 말라왔다. 덥고, 목말라. 뭐라도 좀 마시고 싶은데. 어후, 나 오늘 왜 이렇게 껴입었냐. 밖에라도 나갔다 올까 잠깐 고민하던 나는 그래도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나가는 건 포기했다.

그래도 더운 건 더운 것이기에 임시방편으로 불판의 열기 때문에 홧홧한 얼굴을 철판 테이블에 가져다 댔다. 음식 접시와 잔, 병들이 어지러이 올라간 곳을 피해 댔기에 내 볼에 닿은 면적은 적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쇠의 차가운 기분이 볼의 열을 아주 조금은 식혀주는 기분이었다. 이제 시원한 것만 마셨으면 좋겠는데. 부쩍 무거워진 눈꺼풀을 깜박거리는데, 시야에 무언가가 운명처럼 들어왔다.

다름 아닌 물기 맺힌 갈색 병. 누구나 한 잔 마시고 나면 크으, 하는 소리를 내며 시원하다 외치는 액체.

오, 나 저거 알아. 저거 사람들이 다 시원하다 그랬어. 응. 저것도 술이긴 한데, 일단 약한 술이니까 조금만 마시면 상관없는 거잖아. 저걸로 일단 급한 목을 축이고 얼음물을 달라고 해서 벌컥벌컥 마시자. 그렇게 누가 들어도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일어나 손을 뻗었다.

“진호 씨 마시려고? 여기 새 잔 있, 어? 진, 진호 씨? 진호 씨!”

아이, 조금만 마실 건데 설거지하기 귀찮게 뭘 또 새로운 잔을 써요. 입 안 대고 마실게요. 생각보다 많이 들어있는지 묵직한 맥주병을 들고 허공에 띄웠더니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그들에게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맥주병 입구를 향해 고개를 젖혔다. 셋, 둘, 하나. 조준, 발사!

“크으-! 시원하다!”

나는 정말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딱 세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다음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번쩍 손을 들었다.

“이모니임! 여기 얼음물 한 통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뭔가 모르게 조용해졌던 테이블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진호 씨 설마 취한 거야? 진짜 너무 귀엽다.”

다들 내가 취했다고 오해를 하는 모양이지만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이므로 그런 것 따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렇게 흥이 확 올라버려 사람들과 왁자지껄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모두 각자 갈 길을 가는 사이, 저만치에 익숙한 형체가 서 있는게 보였다.

민선우. 괜찮다고 한사코 말렸는데도 구욷이 나를 데리러 온 민선우!

“민선우우! 꺄호! 나 여기따아아!”

어딘가 살벌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든가 말든가, 나는 녀석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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