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코가 간지러웠다. 볼 안쪽, 입꼬리, 등, 가슴, 배 속까지 점점 이곳저곳이 근질거렸다. 그래서 나는 입술에 꾹 힘을 주면서 손을 들어 쇄골 밑을 긁었다.
좋아한대. 쟤가. 민선우가. ‘흥미가 있다’도, ‘가지고 싶다’도, ‘재밌어 보인다’도 아니고 ‘좋아한다’라고 했다.
너무 비현실적이고 태연하게 말해서 확 진심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생애 처음으로 타인에게 들어본 좋아한다는 말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선우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는데.
그럴 일은 없을 걸 알면서도 때때로 상상해본 적은 있었다. 다섯 명과 이렇게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누군가가 내게 혹시라도 진지해진다면, 아니 진지해지지 않더라도 저런 감정이 선연히 들어가는 표현을 할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
열이면 열 번 모두, 나의 예상은 남궁후나 호였다. 가장 장난기가 넘쳐 그럴까 싶으면서도 기실 가장 표현을 잘해주고 사람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펴준 놈들이었으니까. 정작 중요할 땐 없었지만 그래도 그 전엔 내가 우울해하면 그에 맞춰 웃게 해주려고 노력했고, 같이 있어 주려고 했다. 아빠의 병실에 찾아온 것도 그들이 유일했었고, 그때 그들은 아빠에게 날 많이 아끼는 형들이며 앞으로도 걱정하지 말라면서 안심시켜주었다.
그런 모습들을 봤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저들 중에 내게 진심이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쌍둥이 중 한 명이 아닐까 하고.
물론 민선우는 내가 아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상냥하다. 그러나 그 행동이 나에 대한 호감에서 기인했을까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대학생 때 채예령을 비롯한 애들이 이야기하던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한,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선배.
그것보다는 오히려 언젠가 정새빈이 했던 평가와 더 닮아 있었다. 소시오패스. 정말 그 말처럼 가까이서 직접 겪은 민선우는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정확한 선이 존재하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도 그걸 눈치채기 전엔 헷갈리기도 했다. 매사 진지하지 못한 쌍둥이보다 진중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최태혁보다 솔직하고, 또라이 같은 정새빈보다 매우 정상으로 보이는 녀석이 진심도 아닌데 이러려나?
시종일관 나긋한 말투, 웃는 얼굴, 행동 하나하나에 어린 배려와 내가 한 말은 사소한 것들도 기억해주는 세심함까지. 매일 오는 연락과 살을 부대끼고 싶어 하는 것을 차치하고서도 그런 녀석의 태도는 자칫 타인을 오해하게 할 만큼 묘했다.
그러나 녀석과 알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어쩌면 오히려 민선우이기에 그 모든 행동에 그다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이 내보이는 태도는 일종의 처세와 같았다. 상대가 호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한 연기에 가까웠지, 호감을 느낀 상대라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몰랐을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지만, 유독 나에게 향한 애정에 민감한 나는 눈치채고 말았다.
그래서 정말 기대가 없었는데.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금 내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귀하게 대할 거고, 내가 귀해질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반쯤 가려질 정도로 눈을 휘면서 웃는 얼굴에 거짓 한점 없어 보인다는 게 신기하고 또 간지러웠다.
“어… 그니까. 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 애초에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면전에 대고 내가 좋다고 한 사람은 정말 처음이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이성적인 의미에서 내가 좋다는 게 처음이라 사고가 정지해버렸다.
...잠깐. 근데 이거 이성적인 의미는 맞는 거지? 맞겠지? 아니 키스도 하고 그, 옛날 일이지만 아무튼 그, 그것도 한 사이에 이제와서 갑자기 아끼는 동생으로서 좋아한다는 소리를 하진 않을 거잖아. ...아닌가? 하긴 최근 생각해보면 내가 아무리 아빠한테 집중하고 싶으니 당분간은 방해하지 말라고 선포를 했다고 쳐도 너무 오래 안 보지 않았나? 이성적으로 좋아하면 중간에 못 참을 수도 있는 기간 아니었을까?
아니지. 멀리 갈 것도 없이 여기 온 후부터 나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심지어 일주일이 지나가도록 같은 침대를 쓰고 있는데도 녀석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같이 침대를 쓴다고 통보받은 첫날 한껏 긴장한 게 무색하도록 내가 잠들 때까지 날 토닥여주기만 하지 않았는가.
딱!
“헉!”
갑자기 귀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점점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이 일순 하얘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인 민선우가 보였다.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린 곳엔 녀석의 손가락이 있는 걸로 봐선, 방금 들었던 큰 소리는 녀석이 손가락을 튕겨 낸 소리였나보다. 아니나 다를까, 손을 거둔 민선우가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진호는 때때로 생각이 너무 많아.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넋을 놓아야 할 정도로 복잡한 거라면 차라리 그 대상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리고 이번 네 의문에 답해주자면, 나는 당연히 너를 이성적으로 좋아해.”
아끼는 동생이란 미적지근한 단어를 취급할 만큼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라서, 내가. 녀석은 그렇게 덧붙이며 내게 턱짓했다. 그 턱짓을 따라 내린 시야에 잡힌 것은 반 정도 비워진 밥그릇이었다.
“우선은 밥을 마저 먹을까? 놀란 건 이해하지만,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이게 나 혼자만 이렇게 놀라고 말 일인가? 쟤는 자기가 폭탄 발언해놓고 뭐가 저리 태연해? 이 와중에도 밥 먹는 걸 따지는 녀석을 향해 인상을 찌푸리는데, 녀석은 그런 내 눈길은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시계를 확인했다.
“그리고 전에 말했던 출장이 오늘이라 저녁에 내가 아니라 기사님이 가실 거야. 저녁 먹을 시간에 맞춰 전화할 거니까 빼먹을 생각 말고. 양 체크는....”
민선우가 먹으려던 나물을 자기 밥그릇 위로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여전히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녀석을 보던 중이었기에 당연히 눈이 마주쳤다. 몇 번 눈을 깜박이던 녀석은 이내 다시 젓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자율에 맡길게. 저녁 한 끼 정도는 믿어도 되겠지. 내일 오전 기상 시간 체크는 문자가 도착한 시간으로 할 거고, 병원까지도 기사님이 대동해주실 거야. 끝날 땐 내가 데리러 갈게.”
거기까지 말하고 녀석은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
기가 찼다. 방금 나한테 좋아한다 어쩐다 했던 놈 맞아? 그게 무슨 한 시간이 지났어, 삼십 분이 지났어. 불과 몇 분 전, 아니 체감상 몇 초 전이었다.
거기다 심지어 좋다고 말한 나한테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잖아, 쟤. 근데 저런다고? 그 대화가 벌써 끝이 났다고? 진짜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답답해서 말하고 싶은데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정말 좋아하냐고 되묻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명확했고, 잘못 들었다기엔 두 번이나 듣고 말았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내가 어떤 태도든 취해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이게 영 복잡했다.
옳다구나 나도 좋아했다고 말하기엔 나는 녀석을 비롯해 다섯 명을 대상으로 이런 종류의 감정을 키우지 않도록 노력해왔다. 사람인지라 당연히 아무 감정이 없지 않지만 그게 크기도 전에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외면해왔기에 그 마음이 크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나도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태인 거다.
아니, 아니다. 사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안다. 이런 애매한 게 진심일 리가 없다.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이렇게 갈팡질팡한다는 건 거절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말이 좋아 좋기도, 그렇지 않기도 한 거지 솔직히 저 마음을 온전히 받기엔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냉정히 끊어내기엔 아쉽다는 것 아닌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독하게 이기적이라는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저 민선우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는 게, 그게 왜 이렇게 벅차고 따뜻한지.
나는 그 마음에 답해줄 마음이 없노라고, 그러니 이 모든 게 그런 마음에서 기인한 행동이라면 그만하시라고. 그동안은 정말 감사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함이 맞는 것 같은데 입을 벌렸다가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다시 다물었다.
그러는 새 본인 밥그릇을 깨끗이 비운 민선우가 수저를 받침대에 내려놓고 날 향해 입을 열었다.
“진호야, 네게 어떤 대답을 바라고 말한 게 아니니까 그런 얼굴 할 필요 없어. 내가 네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건 그저 내 마음을 표현함으로써 널 안심시키고 조금이라도 기분 좋게 해주려는 거였어.”
내용과는 별개로 어조는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웠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대답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기도 하고.”
“...상관없다고요?”
어깨를 으쓱이며 하는 말에 반사적으로 되물으니 그걸 물을 줄은 몰랐다는 양 녀석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이내 생긋 웃었다.
“진호야. 내가 내 품에 들어온 널 순순히 놔줄 리 없잖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병원에서 말했던 것처럼 널 놔준다면서 집으로 돌려보내봤자 어차피 저 밖의 쓰레기들이 낚아채 갈 게 뻔한데. 내가 누구처럼 머저리 병신도 아니고 그런 짓을 왜 해.”
“아....”
그러고 보니 다른 녀석들 집으로 옮겨갈 때와는 달리 여긴 내가 제정신일 때 판단해서 제 발로 들어온 곳이었다. 여기가 아니면 그 녀석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다닐 것 같았고, 그건 싫었다.
문득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고집부려서 집에 돌아간다면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미래를 위한, 나를 위한 일들을 할 수 있을까? 답은 ‘못 한다’였다. 다섯 놈들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홀로서기엔 여러모로 너무나 약해져 있었다. 살이 조금 올랐지만 여전히 전과 비교하면 버석한 손을 쥐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그런 내 손 아래로 하얗지만 남자다운 손이 나타나 빈 앞접시를 가지고 갔다.
“지금 네게 중요한 건 너야. 괜찮으니까 너한테만 집중해. 맘껏 기대고, 화내고, 슬퍼하고, 좋아해. 다른 사람 감정까지 생각해주는 건 네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지고 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아.”
민선우는 가져간 그릇에 김치찌개를 가득 담아 다시 내 앞에 놔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고민보단 밥을 먹어. 네가 좋아하는 맛있는 김치찌개를 먹고, 네가 다니고 싶은 병원에 출근해서 일한 후에 퇴근을 하는 거야. 그럼 문 앞엔 선물이 걸려 있을 거고, 나는 네게 전화해서 저녁 먹을 시간이라고 말하겠지. 그럼 또 저녁을 먹고, 푹신한 침대에서 자.”
그렇게 며칠, 몇 주, 몇 달을 보내면 돼. 너는 그것만 하면 돼. 그렇게 말하는 민선우의 말에 홀린 듯이 숟가락을 들어 밥을 펐다. 밥을 먹고, 김치찌개를 먹었다. 젓가락을 들 필요 없이 민선우가 밥 위에 올려주는 반찬들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삼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나한테 집중하자. 민선우가 말한 것처럼 지금 당장은 밥이 맛있다는 거부터. 밥은 맛있고, 나에겐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 있고, 공부는 순조롭게 진도가 나가고 있었다. 아빠는 이제 고통 없는 천국에서 행복할 거고, 마냥 혼자가 된 것 같았던 나에겐 내 미래를 위해 기꺼이 손을 잡고 끌어주는 사람이 있고, 내가 아무리 외면하고 모질게 굴어도 아침 댓바람부터 연락하고 대가 없이 선물을 퍼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냥 그렇다는 것에 감사하고 좋아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오랜만에 무리 없이 밥 한 공기를 비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