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하루가 바빴다. 지금껏 이렇게 열심히 산 적이 있나 싶었을 정도로 참으로 알차고 바빴다. 요즘의 생활을 돌아보자니 채예령이 매번 내게 게으르다고 면박하던 것이 떠올라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느라 자연히 볼에 스치는 부드러운 베개로 아예 얼굴을 묻어버렸다.
푹신해. 하루 중 가장 부지런해지기 힘든 아침, 깨긴 했으나 아직 멍한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있으려니 이내 사락거리며 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진호야. 이제 일어나야지. 응?”
“으응.... 눈 떴어요.”
“안 뜨고 있으니까 말하는 거야. 오늘 아침은 진호가 좋아하는 김치찌개니까 얼른 일어나자.”
침대 한쪽이 기우는 느낌이 들더니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같은 방을 쓰면서 놈이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부지런한 놈인 걸 알게 되었다. 녀석은 분명 새벽같이 일어나 운동과 샤워를 마치고 출근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일 테다. 밤에도 내가 잠에 들 때까지 자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일찍 일어나 운동까지 하는 건지.
언제 한 번 새벽에 눈이 떠진 김에 녀석을 찾아 집을 돌아보다 운동하는 걸 봤는데, 그저 가볍게 러닝머신을 타는 정도가 아니었다. 부잣집 도련님같이 생긴 얼굴에 그런 몸이라니. 원래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바벨 들어 올리느라 꿈틀거리는 근육을 목도하고 있자니 절로 침이 꿀꺽 삼켜질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최태혁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네 명도 평균 이상으로 몸이 좋았다. 최태혁은 그냥 모든 게 다 컸고, 쌍둥이랑 민선우 역시 옷 위로도 ‘아 저 사람은 몸이 좋구나’를 알 수밖에 없는 체격과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선 그나마 정새빈이 좀 왜소한 편이었는데, 그마저도 벗은 몸을 본 사람으로서 결코 빈약한 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골격에 언제, 무슨 운동을 하는지는 몰라도 알차게 근육이 들어차 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다섯 모두 떠올리는 것만으로 참 섹시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몸을 하고 있었다. 신기한 건 내가 그 몸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눈으로 본 사람은 최태혁과 민선우뿐이라는 거지.
나머지는 도대체 어떻게 그 몸을 유지하는 거야? 민선우는 또 어떻게 저렇게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그런 격한 운동을 하고 있....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라고 두 번 말했어, 나비야.”
“일어났습니다!”
는 게 뭐. 쟤가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하든 말든 그게 뭐 중요해. 그냥 많이 부지런하고 잠이 없는 놈인가 보지. 나는 삼천포로 빠진 생각을 뚝 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가 아무리 푹신하고 이불이 부드러울지라도 저 ‘나비야’ 소리에는 일어나야 했다. 단호한 어조일수록 녀석이 정해놓은 시간에 가깝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1분에 한 대. 일견 보면 모델처럼 아름답지만, 바벨로 인해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솥뚜껑만 한 손에 맞으면 엉덩이가 터질 것이다. 거기다 쟤 팔뚝이 얼마나 두꺼운데. 절대 안 될 말이었다.
“그래, 얼른 씻고 나와. 나는 식당에 먼저 가 있을게.”
“네! 먼저 드시고 있어도 괜찮아요.”
욕실에 들어가다 머리만 빼꼼 내밀고 하는 말에 시계를 보던 민선우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을 맞춘 녀석이 싱긋 웃더니 자기가 보던 시계를 톡톡 치며 말했다.
“아슬아슬했네. 얼른 씻고 와. 기다릴게.”
나는 세상 다정한 어조로 말하고 방을 나서는 녀석의 뒤통수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끝에 1분만 늦게 올 걸 그랬네, 하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잘못 들었다기엔 너무 좀 선명하게 들리긴 했는.... 아니, 아니지.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이미 닫힌 문을 보면서 또 삼천포로 빠지려는 생각을 다잡고 벽에 걸린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에 주어진 샤워 겸 옷 입는 시간은 25분이었다. 별로 준비할 게 없는 나에겐 느긋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다른 생각에 빠지거나 따뜻한 물을 맞으며 넋을 놓다 보면 어느새 20분이 훌쩍 넘어버린 적이 있기에 방심할 수는 없었다.
먼저 먹으라고 했지만 보나 마나 또 시계 들여다보면서 내가 늦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을 민선우가 눈에 훤했다. 나는 잠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안 늦었죠?”
“...응. 오늘도 잘하고 있어.”
그런 거치곤 영 아쉽다는 목소리인데. 휘적휘적 식탁으로 걸어가면서 미심쩍은 눈으로 민선우에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정말 칭찬하는 것처럼 웃는 녀석의 표정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아무튼 오늘도 무사히 시간 지켜 온 게 중요하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앉았다. 오늘 아침은 민선우가 미리 예고한 대로 내가 어제 먹고 싶다고 말했던 김치찌개였다. 당면에 라면 사리까지 푸짐하게 들어간 모양새를 보니 아침부터 조금 과한가 싶었지만, 아침으로 삼겹살을 먹곤 했던 예전을 생각하면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신나서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고 바로 수저를 집어 들었다. 당면, 당면. 라면, 라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물! 나조차도 언제 들어본 건진 모르지만 신나서 갖다 붙인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덜어온 음식을 막 입에 넣으려는데 순간 올라간 시야에 민선우가 들어왔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피식 웃더니 본인도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매일 말하고 있지만, 먹고 싶은 만큼 먹는 거야. 많이 먹고 싶으면 많이, 적게 먹고 싶으면 적게.”
거기까지 말한 민선우가 자주 먹는 나물 반찬을 집어 입가에 가져오다가 멈추고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무리하게 먹다가 또 토하거나, 토할 바엔 적게 먹는 게 낫겠다며 또 새 모이만큼 먹었다간 정말 호되게 혼날 줄 알아.”
“...넵.”
단호한 눈빛은 차치하고, 실제 어제와 그저께 있었던 일을 가지고 와서 하는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내가 순순히 답하며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리자 녀석이 작게 웃으며 나물을 입에 넣고 말했다.
“그래, 얼른 먹자. 사실 아까 진호 오기 전에 못 참고 살짝 맛봤는데 김치찌개 정말 맛있더라.”
“형이요? 진짜요?”
“응. 냄새가 너무 좋아서.”
짧다면 짧지만 그래도 같이 살면서 알게 된 민선우는 계획 페티쉬가 있는 건가 싶을 만큼 본인이 세운 계획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못 참고 먹어버렸다? 확실히 김치찌개 냄새가 죽이긴 했지만 정말 그 정도라고?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웃어버리며 민망해서 내려놓은 면을 다시 집어 들었다. 입안 가득히 넣고 우물우물 씹자마자 새콤매콤한 김치찌개 국물의 맛과 고소한 밀가루 맛이 조화를 이뤘다.
맛있었다. 민선우가 말한 것처럼 정말 맛있었다. 그게 내 얼굴에도 드러났는지 민선우가 작게 소리를 내고 웃으면서 숟가락을 들었다. 순간 눈에 들어온 녀석의 숟가락이 뭔가를 먹었다기엔 너무 새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퍼뜩 떠오른 기억에 입 안에 남은 음식을 얼른 씹었다.
마침 지잉,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근래 인간관계의 폭이 좀 넓어졌다고는 하나 출근도 전에 연락이 올 사람은 몇 없었다. 거기다 최근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분명 셋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나는 문득 읽긴 했지만 답장은 하지 않았던 녀석들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민선우를 향해 물었다.
“맞아, 형. 그, 저기 저녁에 오셨던 아주머니랑 경비 아저씨께서 무슨 말씀 없으셨어요? 집 앞에 뭐가 놓여 있었다거나 아니면 택배가 왔다거나.”
“응? 진호 혹시 뭐 시켰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런 건 아닌데....”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되물어오는 말에 일단 고개를 저었다. 내가 시킨 건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분명 뭔가가 있어야 했다. 최태혁, 남궁호, 남궁후 심지어 정새빈까지 음식과 옷가지, 꽃 등 각종 선물들을 놓고 갔다고 했는데 그게 다 거짓말일 리도 없고, 누가 가져갔다고 해도 하나 정도는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 눈에 띄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아니, 그리고 애초에 이 고급 아파트 최상층까지 와서 몰래 물건 가져갈 사람이 어딨어.
아무래도 영 이상해서 인상을 찌푸리자, 나를 보고 있던 민선우가 다시 젓가락을 움직이면서 무심하게 얘기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집 문 앞에 누가 자꾸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는 얘긴 들었던 것 같아.”
“...쓰레기요? 아니 그, 쓰, 레기라고 보기엔 좀 많이 깨끗하고 좋아 보이지 않았대... 요?”
“쓰레기가 놓고 간 게 쓰레기가 아니면 뭐겠어. 아무리 깨끗하고 값나가는 거라도 쓰레기는 쓰레기지.”
쌍시옷 발음에 쓸데없이 힘이 많이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인데. 나는 말문이 막힌 채 정갈하게 아침을 먹는 민선우를 쳐다봤다. 말하는 걸 봐선 다 갖다 버린 것 같지? 딱히 가지고 싶었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일단 나한테 온 걸 말도 없이 버렸으니까 한마디 해야 할 거 같기는 하고.
“왜? 다음엔 그냥 들여놓으라고 할까?”
“네? 어, 그… 그래도 돼요?”
“...안 될 게 뭐 있어. 진호한테 온 선물인데 네가 받고 싶으면 받는 거지.”
방금 전까지 쓰레기라고 그렇게 강조하던 놈이 왜 갑자기 또 선물이래.
“진호 네가 가질 수도 있는 걸 쓰레기라고 할 수는 없잖아.”
고개를 든 민선우가 내가 속으로만 한 생각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그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입을 헤 벌리고 있으려니, 녀석이 숟가락을 내려놓고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내 볼을 톡톡 치고 떨어지는 손가락.
“이제 진호 네가 입고 먹고 마시고 치장하는 것, 네가 가진 배경과 살아가는 환경 그 모든 것들은 다 귀한 거야. 귀하지 않더라도 네가 쥐면, 아니. 바라는 그 순간부터 귀한 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거고, 네가 그렇게 여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거야.”
녀석이 식탁 위로 두 팔을 올려 기대더니 손을 마주 잡아 깍지를 꼈다.
“놀랄 거 없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나는 상상 이상으로 돈이 많고, 다른 녀석들만큼 도덕적이지 못한 데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진심으로 널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그런 내 품 안에 있는 너를 나는 세상 어떤 존재보다 귀하게 대할 거야. 너는 내게 귀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이제부터 기분 좋게 깨닫기만 하면 돼, 진호야.”
민선우는 나를 보며 활짝, 정말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