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선우가 본인의 핸드폰을 그리 보란 듯이 들이밀 리 없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제 할 말을 하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선우는 그들을 향해 빈정거렸다.
“그러니까. 시간 없으니까 가라고. 못 알아듣겠어? 더 쉽게 말해줄까요? 정작 뭐가 중요한지 몰라서 기회를 놓쳐버린 머저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없으니까, 괜한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꺼지시라는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
“모른 척하고 싶은 거겠죠, 머리에도 근육만 들어찬 깡패 씨는.”
선우는 천천히 발을 움직여 세 명과 마주 섰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세 명의 딱 중앙에 서서 팔을 벌리니 그럭저럭 그들의 진로를 방해할 정도가 되었다. 당연히 세 명이 힘을 합쳐 밀면 밀리겠지만, 저렇게 합심하고 있는 듯 보여도 결국은 개인플레이를 할 게 뻔한 놈들이었다. 정새빈이면 모를까, 나름의 상식을 탑재한 태혁과 쌍둥이라면 장례식이라는 장소를 고려해 지나친 행동을 하지 않을 걸 예상한 행동이었다.
과연 세 명은 이를 악물며 선우를 노려보다가도 충돌하지 않고 갈 길을 모색하는 듯 주변을 곁눈질했다. 그러다 답답했는지 결국 선우의 어깨를 잡고 밀 듯이 몇 걸음 걸어가면서 태혁이 이를 으득거리며 읊조렸다.
“비켜. 내가 뭘 잘못했든 그건 너와 할 이야기가 아니다.”
“하하, 그게 미련인 줄도 모르고 엉뚱한 데서 좋은 형 노릇 하느라 늦은 주제에 말이 많네.”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은 기어코 선우의 몸을 밀어냈다. 살아온 환경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름대로 꾸준히 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힘으로 밀리는 건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선우의 얼굴에선 비소마저 사라졌다. 오랜만에 완전히 표정을 지워버린 선우가 그를 스쳐 지나가는 태혁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목적을 이루기 전에 얼른 손을 거뒀다. 결국 진호가 나오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다소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진호를 향한 선우의 얼굴엔 언제 무표정했냐는 듯 겸연쩍어하는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얼른 돌려보내겠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진심 섞인 너스레를 떨면서 슬쩍 본 진호의 얼굴에는, 아주 잠깐이지만 그들을 향한 반가움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내 나비는 마음이 약하기도 하지. 예상대로 세 명의 머저리를 안으로 들이는 진호를 따라가며 선우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물론 겉치레를 위한 형식적 미소는 그대로 띤 채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야기는 제법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끝까지 미련에 묶여 자존심을 못 버리길 바랐던 멍청이들이 무슨 일인지 아주 납작 엎드려 사과하는 꼴은 매우 거슬렸지만,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진호를 데려갈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선우의 마음은 하해와 같아졌다.
그럼에도 선우는 간헐적으로 진호에게 사람을 불러 불청객들을 내보낼까 물었고, 진호는 내내 외면하고 가끔 면박을 주면서도 그 질문에는 시종일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진호 또한 감정을 깔끔하게 잘라낼 수 없는 타입이라는 게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남의 불행에 다행이라고 붙여도 되나 모르겠으나, 어쨌든 선우에겐 다행스럽게도 장례식은 3일뿐이라 진호의 마음이 다 풀리기 전에 그들의 석고대죄도 강제로 끝을 맺었다. 어디에서 머무는지 모를 리가 없는 놈들이 갖가지 개수작을 부리겠지만 그 정도는 선우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므로 걱정이 되진 않았다. 아무리 애정에 약하고 사람에 약한 진호라지만, 이 정도로 상처받은 채 상처를 준 당사자들과 오랜 기간 떨어져 있으면 절로 마음이 떠날 터였다. 그렇게 세 명에 대한 진호의 관심과 애정을 천천히 잘라내는 동안 텅 빌 그 공간에 선우 자신을 채워 넣는다면, 진호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되겠지. 같이 지낼 보금자리로 가는 도중 조수석에서 잠든 진호의 목을 바로 해주며 선우가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선우는 우선 진호의 상태를 파악하기로 했다. 건드리면 바스러질 것 같이 약해진 진호도 어떤 의미에선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모습이었으나, 그가 아닌 다른 요인들로 그렇게 되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선우가 가장 좋아하는 진호의 모습 중 하나가 억울함이 깃든 반항기 어린 눈이었기에, 그걸 다시 보기 위해서라도 정신과 몸을 다시 건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선우는 그가 예뻐하면 예쁘게 웃고, 혼내면 겁을 먹을 먹고 잘못을 빌다가도 용서받으면 또다시 겁 없이 반항하고 잘못을 저지를 줄 아는, 그런 귀엽고 겁많은 그러나 단단한 진호를 원했다. 그래서 계획 세우기를 핑계로 진호를 3일 동안 면밀히 관찰했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진호는 잠을 자지 않았다. 아니, 이 정도면 잠들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 정도였다. 첫날엔 계속 핸드폰을 보는 모습에 나쁜 버릇이 들었나 싶었는데, 본인도 자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핸드폰을 멀리 두고 눈을 감았음에도 계속 잠들지 못했다.
버릇처럼 중얼거리던 혼잣말이 줄었다고 생각했더니, 도리어 잠들어야 할 밤에 계속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다 울고, 웃었다. 정신 분열로 보이진 않았고 낮에 괜찮은 척, 평소와 같은 척하며 내리눌렀던 격한 감정들을 혼자 있을 때 모두 쏟아내는 것 같았다.
선우는 그 모습을 보고 전부터 고민하던 것을 확정 지었다. 진호에겐 현재 정신적인 케어가 필요했다.
두 번째 문제는 영양이었다. 안 그래도 장례식장에서 봤을 때부터 살이 과하게 빠졌다고 생각했다. 정새빈이라면 몰라도 쌍둥이와 최태혁이 밥을 먹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 부분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호는 전과 비교했을 때 적어도 5kg 이상, 10kg 정도 빠져 보였다. 최근 병원에 붙어 간병하느라 밥을 제때 먹지 못한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일하시는 아주머니와 미리 수배해놓은 진호의 사무실 사람의 보고서를 연 선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보고서엔 계획을 주고 지내보라고 했던 지난 일주일간의 식생활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내용은 생각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기본적으로 양이 극단적으로 적어졌고, 왜인지 몰라도 간편하고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들만 찾았다. 심지어 나름 먹어보겠다고 뭔가를 준비했다가도, 다른 걸 하다 까먹어버려 끼니를 거르는 일도 있었다. 누가 보면 밥도 먹을 수 없을 만큼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굴었다.
누구보다 맛있는 것을 좋아하고, 한 끼를 먹더라도 제대로 요리해서 먹던 예전과 전혀 상반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영양이 부족해서 그런지 진호는 늘 기력이 없었으며, 최근엔 남몰래 머리를 꾹꾹 누르거나 진통제를 먹는 모습도 보였다.
선우는 패드를 책상에 던지듯 내려놓고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미간을 주무르며 잠시 고민했다. 얼마 전 같이 다녀온 진호의 정신과 결과는 예상하던 대로였다. 진호를 상담했던 상담사는 현재 진호의 자기방어 기제가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판단했다. 스스로의 감정과 기억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소위 건망증이라고 말하는 증상이 심화된 걸로 보인다는 상담 기록지가 책상 한구석에 펼쳐져 있었다.
좋지 않았다. 선우는 지난 3일 그리고 일주일 동안 지켜보면서 본인의 의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최종적으로 결론 내렸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진호는 현재 본인이 괜찮은 상태라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걸 정면에서 아니라고 하는 것도 진호에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았다.
진호가 작금의 상황에 직면하게 하는 건 의사와 상담사의 역할이지, 선우가 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상처받은 진호를 성심성의껏 보듬어주며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 예정이었다. 기본적으로 그 위치를 지키면서도 진호에게 뭔가 동기부여를 해줄 만한 게 없을까. 어린아이같이 나약해진 나비를 잘 달래고 얼러,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방법.
어린아이, 어린아이.... 아. 그거라면.
책상 위를 톡톡 치던 선우의 손이 돌연 멈췄다. 간단한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상과 벌. 착한 아이에겐 칭찬 스티커를, 잘못한 아이에겐 사랑의 매를. 적절한 보상과 벌을 주는 건 선우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진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진호는 엉덩이가 예쁜 편이었다, 살이 빠지면서 약간 빈약해지긴 했으나, 다른 곳에 비해 여전히 봉긋 솟아있었다. 선우는 머릿속을 차지한 온갖 음험한 생각을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아쉽지만 지금은 자제해야 할 때였다. 더 많은 것들은 진호가 좀 더 단단해진 후에, 온전히 그의 손에 떨어지면 천천히 하나씩 가르칠 생각이었다. 커다란 손이 흥분에 젖어 지나치게 올라간 입꼬리를 꾹 눌러 진정시켰다.
진호가 싫어하면서도 조금만 밀어붙이면 마지못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가볍고 할 수 있을 것 같은 벌. 그의 욕구를 채워주면서도 정말 벌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안해낸 것 같이 보이는 게 뭐가 있을까. 선우는 멋대로 벌칙을 정하는 대신 상 정도는 진호가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다음 날 밤, 진호는 어렸을 때도 당해본 적 없는 엉덩이 맞기, 즉 스팽을 벌이라고 웃으며 말하는 선우의 통보를 들었다. 이상한 말을 했다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태연자약한 태도와, 계획을 제대로 지키는 데 적절한 자극이 될 거라는 설득에 넘어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만 것도, 모두 선우가 의도한 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