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선우는 병실 앞에 서서 생각했다. 얼마나 멍청하면 저 안에 있는 걸까. 소란스러운 밖의 소리와 두꺼운 2인 병실의 문 덕에 안에서 하는 대화는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것 따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이 상황을 수습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가 별 소동 없이 차례를 기다린 이유는 간단했다. 오로지 진호의 정신상태를 위해서였다. 그들 다섯이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것들은 서로 알려주는 편이었다. 보통의 사람들보다 윤리관이 옅을 뿐 그들에게도 인간성은 존재했기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굳이 망가트리는 취미는 없었다.
특히 진호는 알면 알수록 아주 예민하고, 생각이 많으며, 이미 어느 정도는 망가져 있는 상태였으므로 특별히 주의가 필요했다. 정새빈이 말도 없이 잠적함으로 인해 선우를 포함한 나머지가 눈에 불을 켜고 진호에 대해 파헤치고 나서는 더욱이.
그들은 이제 진호를 밖으로 돌리지 않기로 암묵적 결론을 내렸다. 진호의 세상엔 그들 외에도 진호에게 해로운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건 좋지 않았다. 적어도 진호가 스스로 그들 중 누군가를 선택할 때까지 버텨주지 않는다면 아마 다섯 모두 적잖게 분노할 것이 뻔했다. 선우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잠시 멈췄다.
분노라.
감정 기복이 격하지 않은 그가 자연스레 분노를 떠올렸다는 게 신기했다. 기실 감정 기복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다소 가학적인 성향도, 공감을 잘 못 한다는 것도, 보통 사람처럼 행동하기 위해 따로 학습이 필요했다는 것도 그런 부분들이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가 진호를 건드릴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는 것만으로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니.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다. 전에 진호에게 명백히 애정을 드러냈던 일도 그러고 보면 평소 그답지 않은 일이긴 했다. 심지어 애정을 드러낸 이유도 진호를 안심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이미지 관리를 할 필요 없는, 입막음 정도야 간단히 할 수 있는 상대를 안심시키기 위한 배려는 평소 선우의 입장에선 귀찮아서 하지 않는 일이었다.
문득 예령이 교통사고를 당해 저 안에 누워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선우 그 스스로가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아마 진호를 보기 위해 이미 같은 병원으로 오는 길이 아니었다면 그저 의례적인 전화 한 통만 하고 말았을 정도로 그에겐 그저 그런 소식이었다.
한때 그를 위해 신이 보내주셨구나 싶었을 만큼 그의 모든 취향을 모아놓은 듯한 예령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그의 기준에서 가장 오랫동안 흥미가 식지 않았던 인간이었음에도 그랬다. 그러나 선우는 그 뒤에 진호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 망설임 없이 그 병문안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예령은 이제 그에게 딱 그 정도의 사람이 되었다.
그럼 김진호는?
그 의문이 머릿속을 꽉 채울 때쯤 병실 문이 열렸다.
일그러진 얼굴을 한 진호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슬픈 건지 화가 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몰라도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을 하고 문을 연 진호는 섬세한 손길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소리 없이 닫힌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왠지 모를 애처로운 뒷모습을 보면서 선우가 아, 하고 아주 작게 탄성을 뱉었다. 그랬다. 드디어 그의 인생에도 찾아온 것이다. 흥미를 넘어선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가. 그의 기준에서 너무 평범하고 전혀 탐날 게 없어 보이는 진호에게 설마 그런 감정이 생겼으리라 차마 생각도 못 했을 뿐이었다. 선우는 방금 그의 머리를 강타한 깨달음이 퍽 달갑고 기꺼웠다.
혹여라도 진호가 볼 새라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지금 웃는 모습을 보이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우는 저 문 너머에 있을 녀석들의 미래가 너무도 빤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완전히 내리누를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의 애처로운 나비는 아직도 문 앞에서 우두커니 바닥을 보고 서 있느라 슬금슬금 올라간 자신의 입꼬리를 보지 못했다.
그래, 그동안 이런저런 이성적인 잣대에 홀려 깨닫는 것이 너무 늦었다. 그들은 모두 평소답지 못했다. 흥미, 취향, 경쟁심, 소유욕, 동정. 별 잡다한 것들을 갖다 붙였지만,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기엔 그 무엇도 충분치 못한 단어들이었다. 아무리 돈이 썩어나게 많고, 가지고 싶은 것은 무슨 수를 쓰든 가져야만 하는 미친놈들이어도 기본적인 선이라는 건 있기 마련이다.
진호에 대한 그들의 행동은 이미 흥미라기엔 과했고, 취향이라기엔 맞지 않았고, 경쟁심이라기엔 너무 협력했고, 소유욕이라기엔 지나치게 소중하게 대했다. 동정이라는 단어는 두 번 재고할 가치도 없었다. 동정은 다섯 중 가장 인간적인 쌍둥이들도 움직이지 못하는 하찮은 감정이었다.
즉, 이 감정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선우 본인뿐만이 아니라는 점인데. 이 대목에서 선우는 또다시 참지 못하고 눈을 휘면서까지 웃고 말았다. 최태혁과 남궁후, 남궁호는 멍청한 정도가 아니었다. 천하의 머저리들이었다. 감정이란 걸 무 자르듯 아주 간단히, 깔끔하게 잘라낼 수 있는 본인의 성격이 이처럼 만족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뭐, 돌이켜보면 그가 채예령에게 가지고 있던 것은 흥미 그 이상도 아니었던 듯하지만.
선우는 막 뒤돌아서는 진호의 몸을 보면서 표정을 다잡았다. 걱정을 담은 상냥한 미소를 꾸며내는 것 정도야 그에겐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잔뜩 상처받았을 나비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기도 했으니, 머저리들 때문에 터지려는 웃음만 잘 갈무리하면 됐다.
머저리들이 했던 실수를 하나하나 친절히 주지시키자 점점 눈물이 고이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면서 한차례 위기가 찾아왔지만, 그것도 기꺼이 참아냈다. 선우는 이미 너덜너덜할 나비의 가슴에 상처를 늘리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진호를 향해 그로선 저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려 보였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바닥에 처박힐 경쟁자들의 처지에 기뻐 웃는 것은 눈앞의 소중한 나비를 어느 정도 달래고 난 후가 맞았다. 그 정도의 정상적인 사고는 학습을 마친지 오래였다.
짧은 질의응답을 마치고 선우와 진호는 나란히 서서 복도를 걸었다. 그러다 여유롭게 걷던 별안간 선우가 제 옆에서 울음을 참는 얼굴을 하고 걷는 진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를 힐긋 올려다보는 울망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싱긋 웃어주었다. 귀엽게도 잔뜩 풀이 죽은 진호가 본인 딴엔 마주 웃어준답시고 선우를 향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입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물기 어린 눈동자는 금세 정면을 향했다. 선우는 입술을 꼭 깨물고 눈에 힘을 주는 애처로운 옆모습을 보다가 힐긋 뒤편을 곁눈질했다. 뒤늦게 뛰쳐나온 머저리 셋의 형체가 시야에 잡혔다. 사람이 많은 복도였지만 남다른 덩치를 가진 셋이기에 잠깐 스치면서 봐도 그 셋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참아왔던 웃음을 소리 없이 흘렸다. 끝까지 올라가 곡선을 그린 입가는 이 정도 거리에서도 그들에게 보였을 터다.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린 선우의 팔이 진호의 어깨를 더욱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장례식장에 돌아와 진호를 들여보내고 선우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람을 부르는 것이었다. 말은 안 해도 은근히 그 셋을 기다릴 진호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선우는 굴러들어온 기회를 차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기회가 그에게 굴러온 이유는 머저리들이 직접 걷어차 줬기 때문이 아닌가. 끈질기게도 울려대는 진호의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선우가 다른 빈소를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장례식장 앞에서 저게 뭐 하는 짓이야? 재산 싸움이라도 난 건가?”
“그건 모르겠고, 아무리 그래도 저러면 안 되지. 여기 저 사람들 가족만 있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신 분들한테 예의가 아니잖아, 저건.”
사람들은 본인들이 비난하는 일의 원흉이 바로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웅성거림에도 선우의 표정은 아주 태연했다. 애초에 산자에 대한 배려조차도 필요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그에게 죽은 자에 대한 예의는 당연히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가 깔아놓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오려고 애쓰는 저 셋이 진호의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그렇게 안쪽에서 서서 가만히 저 너머를 주시하던 선우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선우가 급하게 부른 인원이 쌍둥이가 병원에 연락해 불러온 보안요원과 최태혁이 동원한 그의 조직원들의 수에 결국 밀리고 만 것이었다. 선우는 혀를 차며 살벌하게 걸어오는 세 명을 향해 곤란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장례식장에서 소란 피우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꺼져. 너랑 말할 시간 없어.”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치면서 말하는 남궁호를 보며 선우는 어쩔 수 없이 팔을 뻗었다. 약간의 결벽증으로 다른 사람과 접촉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그가 자길 잡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리 세지 않은 힘이었음에도 남궁호가 멈칫 동작을 멈췄다. 선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힘을 실어 옆에 걷고 있던 태혁과 남궁후를 향해 밀었다. 체격이 좋은 만큼 둘 다 꼴사납게 밀리진 않았지만 걷던 것을 멈추고 옆을 볼 정도의 충격은 되었다. 선우는 잔뜩 분노한 눈을 한 셋을 보면서 진호의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가지 마. 오지 말래, 진호가.”
“수작 부리지 말고 비키라고. 이럴 시간 없다는 말 못 들었어?”
셋은 화면이 꺼진 핸드폰을 힐긋 보고서는 안 그래도 찌푸린 인상을 더 험악하게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