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농담이 아니었다. 무려 엑셀 파일로 받은 내 일주일 일정은 정말 분 단위로 쪼개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일하는 시간은 공백이라는 점 정도랄까. 아침 기상 시간부터 저녁 취침 시간까지, 하루 종일 뭘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적혀있는 일정표는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내가 말한 목표에 금방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음엔 남이 멋대로 정한 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거절하려고 했으나, 막상 받고 보니 오히려 싫다고 하면 게으른 사람이 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프린트한 종이를 가져와 내게 건네면서 다시 한번 할 수 있겠냐고 묻는 민선우에게 할 수 있다고 결연하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그 스케줄대로 일주일을 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보내려고 노력했다.
“흠....”
같이 체중계의 숫자를 보고 있던 민선우의 한숨이 귀에 닿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어깨를 움츠리자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한 체중계의 숫자가 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빠졌네?”
분명 어조는 평소랑 다르지 않은데 왜 이렇게 서늘하게 들리냐. 나는 귀를 문지르려고 들던 팔을 멈추고 힐긋 민선우를 곁눈질했다. 너무 가까이 있어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 그래도 영양제는 매일 아침에 잘 챙겨 먹었어요.”
“거짓말도 하고.”
어떻게 알았지. 처음 며칠은 잘 챙겨 먹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먹은 기억이 없었다. 그래도 설마 줬던 약을 일일이 세보지 않는 이상 모를 거라고 생각해 대뜸 질렀던 건데, 민선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반박해왔다. 한번 떠보려는 게 아니라 정말 확신에 찬 말투여서, 나는 우길 생각조차 못 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그만 내려와도 돼. 가서 앉아 있어.”
“어, 네, 네.”
녀석은 내가 건넨 문제지를 펼치면서 거실 쪽으로 손짓했다. 안경까지 쓰고 빠르게 페이지를 넘는 걸 보고 있자니 학생으로 돌아가 숙제 검사를 맡는 기분이 들었다. 힐끔힐끔 뒤돌아보느라 주춤주춤 걸어가는 사이에 페이지 수를 다 체크 한 건지, 책을 탁 덮은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얼른 가서 앉지 않고 뭐 하고 있냐는 무언의 눈빛. 뭔가 모르게 질책받은 느낌에 화들짝 놀라 짧은 거리지만 거의 뛰다시피 소파로 갔다. 항상 앉던 자리에 얌전히 앉으니, 뒤따라온 민선우가 테이블 위에 들고 있던 책들을 내려놓으면서 맞은 편에 앉았다.
“공부 진도는 그럭저럭 예상 범위 안이네. 문제 푼 거 보면 생각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거야 너무 오랜만에 다시 공부해서 그런 것도 있을 테니까. 우리 대학 들어올 정도의 공부 머리면 문제없이 금방 다시 감 잡을 거라고 봐. 혹시 혼자 하기 어려운 부분 있어?”
“예? 아뇨, 뭐.... 1급 시험이야 그냥 외우면 되는 거고 토익은 일단 하면 하는 대로 점수 오르는 중이라서요. 프로그램 쪽도 아직은 기본적인 거 복습하는 중이고요.”
“그래? 알겠어. 그럼 다음 주도 시간만 나눠놓을게. 분야별로 선생 후보는 이미 정해놨으니까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 일정 조율해줄게.”
아이패드에 무언가를 적느라 밑을 보고 있던 민선우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멈칫하는 것을 본 녀석이 손을 들어 안경을 벗으면서 물었다.
“병원 진료랑 상담은 어땠어?”
아. 그거. 순간 멈칫했던 나는 눈동자를 굴리면서 고민하다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 좋, 았어요. 괜찮았어요.”
인정하기 싫었지만 진심이었다. 녀석이 하라고 했던 것 중에 가장 하기 싫고 피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막상 하고 보니 가장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았다.
나를 병자 취급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인자하게 생긴 의사 선생님께선 내 긴 이야기를 찡그림 한번 없이 들어주셨고, 오히려 괜찮다고 말하며 다만 제대로 수면할 수 있도록 약을 처방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내겐 우울증과 그로 인한 불면증, 무기력증이 있다고 했다. 그에 대한 치료는 약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바꿀 수 있는 자잘한 생활 습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더 가볍고 부담 없는 처방에 그동안 왜 그렇게 가길 망설였을까 싶을 정도로 허탈했다.
상담은 더욱더 그랬다. 내 이야기를 하면 뭔가 모르게 비난받고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막연히 생각했던 것만큼 감동적인 효과나 엄청난 깨달음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우려했던 것만큼 무섭거나 싫지는 않았다. 정말 민선우가 말한 대로 별거 아닌,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래, 다행이네. 다음 예약 잡은 거 확인했어. 잘했어, 진호야.”
민선우가 생긋 웃는 걸 보며 나도 마주 웃었다. 긴장이 아주 약간 풀리는 기분이었다. 녀석이 안경을 벗는 새 몰래 긴 한숨을 내쉬고 얼른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아주 안도할 수 없었던 이유는 안경을 내려놓고 나를 향해 고개를 든 녀석의 표정이 마냥 상냥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 한 칭찬의 기색은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첫마디부터 아주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럼 지킨 건 그거 딱 세 가지네. 공부랑 병원, 상담. 그렇지? 심지어 병원이랑 상담은 내가 운전해서 왔다 갔다 했으니 지키지 않을 수가 없었던 일이고.”
“밥, 먹는 것도 지키긴 했는데요. 하루 세끼 먹기.”
“세 끼 먹는 게 목적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 증량하는 게 목적이었잖아, 진호야. 고작 컵라면 하나나 삼각김밥 두 개, 그것도 아니면 빵 하나 먹은 걸 누가 한 끼 먹었다 그래. 적어도 우리 집에서 나한테 저녁은 이렇게 제대로 차려 먹어야 한다고 부득불 우기며 같이 저녁 먹던 김진호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민망해서 괜히 한마디 덧붙였다가 말로 받았다. 나는 녀석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오므리며 슬쩍 시선을 내렸다.
“자는 시간은 처방받은 약 덕분인지 조금 당겨져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 약을 안 먹은 날이 있네? 의사가 약 격일로 먹으라고 했어?”
“...아니요. 그냥, 그.... 너무 푹 자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이 너무 빨리 괜찮아질까 봐. 편히 잠드는 게 미안하고 무서워서. 그 말을 삼키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숙이고 있던 고개도 더 아래로 떨어졌다.
“영양제도 그렇고 처방받은 약도 그렇고. 약 싫어하는 건 알지만 꾸준히 먹어야 좋아지지, 나비야.”
“...알아요.”
“흐음-.”
민선우의 기다란 손가락이 무릎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 녀석은 생각에 잠길 때 저러곤 했다. 요 며칠 같이 지낸 결과 알아낸 버릇이었다. 녀석의 반쯤 감긴 눈과 손가락을 번갈아 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던 나는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조금 긴장이 풀려버렸다. 저절로 몸에 힘이 빠져 어깨를 늘어트리려는 찰나, 녀석의 부름에 움찔 몸을 굳히고 고개를 들었다.
“진호야.”
“에? 예?”
민선우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오늘부터 같은 방을 쓸 거야.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사람의 수면 시간은 중요하니까 밤엔 내가 재워주고 아침엔 내가 깨워줄게. 직접.”
“네? 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 그럴 필요 없는데요.”
“아니야. 필요해.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같이 먹을 거고, 저녁도 되도록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일찍 퇴근할 거야. 점심은 어쩔 수 없이 도시락이겠지만, 삼시 세끼 모두 전문 영양사가 짠 식단대로 요리사가 준비할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방을 같이 쓰다니. 민선우가 살아 있는 알람이 되어 준다니? 밥을 같이 먹는 건 좋지만 내가 무슨 부잣집 도련님도 아니고, 할리우드 셀럽도 아닌데 뭔 영양사에 요리사야? 너무 당황스러운 말에 양손을 내저어가면서 거부했지만, 민선우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일주일은 워밍 업이었다고 생각해. 내일부턴 내가 직접 관리해줄 거니까. 이제 매일 확인할 거야. 영양제는 잘 챙겨 먹었는지, 처방받은 약은 처방대로 먹었는지. 오전에 일어난 시간과 취침 시간도 당연히 체크할 거고, 식사도 식단대로 되도록 규칙적인 시간에 얼마나 먹었는지까지 확인할 거야.”
저걸 철두철미한 성격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집요하다고 해야 하나. 분 단위로 쪼개진 일정표를 받았을 때 눈치채고 도망갔어야 했는데. 나 같으면 귀찮아서라도 절대 하지 못할 일을 녀석은 귀찮아 보이긴커녕 아주 신이 난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조금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다음으로 나온 말엔 소름이고 뭐고, 뒤로 조금 물렸던 등허리를 깜짝 놀라서 바짝 세우고 말았다.
“그리고 계획을 위한 3일을 포함해 약 열흘 정도 지켜보면서, 진호 네겐 동기부여가 좀 필요한 것 같다는 결론이 났어. 앞으로 네가 계획을 잘 이수하면 상이 있을 거고, 반대의 경우엔 벌이 있을 거야.”
“...네? 뭐라고요? 상이요? 벌?”
되묻는 내 말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 민선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응. 상은 이것저것 생각해 봤는데, 정하진 않았어. 네게 뭘 주면 좋을지 내가 추측하는 것보단 네게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괜찮으니 오늘 내로 생각해 보고 말해줘. 가능한 한 그대로 반영할게.”
녀석은 내가 상이 뭔지 궁금해서 되물은 것이 아님을 알 텐데도 뻔뻔하게 답하더니, 내가 반박할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어이없는 말을 지껄였다.
“벌은 정했어. 네가 벌을 받기 싫어서라도 계획을 지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걸 생각해내는 건 쉬웠거든.”
“아니, 잠깐만요. 상이고 벌이고 갑자기 왜 맘대로 정하는-!”
“엉덩이를 때릴 거야.”
...뭐? 방금 쟤 뭐라고 했냐? 멍해진 내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민선우는 말을 이어 나갔다.
“약을 먹지 않으면 한 알당 한 대, 정해진 기상 시간이나 공부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일 분당 한 대. 물론 끼니도 기준 미달일 경우, 그에 따라 대 수가 추가되겠지? 너무 겁먹지는 마. 처음 몇 번은 약하게 손으로만 할 생각이니까.”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민선우는 방금까지 개소리를 시전한 사람이라곤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