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숟가락을 놨는데도 여전히 내 손 위에 겹쳐진 민선우의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었다. 그리고 힐긋 아래를 확인하더니,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을 올려 손등으로 볼을 쓸어주었다.
“커피 마실래?”
“네. 달달한 거요.”
“그래. 가서 소파에 앉아 있어. 하기로 한 건 커피 마시면서 하자.”
그러면서 일어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밥이 조금 남은 밥그릇과 수저를 들고 일어났다. 터덜터덜 싱크대로 걸어가다가 문득 뒤돌아본 상엔 아직도 많은 음식들이 남아 있었다.
아. 기억났다. 오늘 점심에 나는 컵라면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밀가루 맛에 질려 두 젓가락 정도 남은 라면을 버리면서 아깝다고 생각했었다. 아깐 이게 왜 기억나지 않았을까. 아니, 기억나지 않았다기보단 자꾸 다른 시간들과 섞여 헷갈렸었다. 요즘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가.
나는 잠시간 밥그릇을 내려다보다 걸음을 옮겼다. 싱크대에 담가두고 돌아서 민선우가 말한 대로 소파에 가서 앉았다. 얼마 뒤 민선우는 그런 내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계획 세워 봤어?”
나는 커피잔을 손에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은요.”
“말해볼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을 때를 맞춰 묻는 민선우를 힐긋 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내가 입을 댔던 곳을 문질러 닦으면서 나름대로 생각해놓은 것들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래서 거기에 들어가려면 사회복지사 자격증 1급은 거의 필수인 것 같고, 부서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래도 토익점수 있으면 좋은 것 같더라고요. 파워포인트야 그럭저럭 괜찮다고 해도 엑셀이랑 포토샵도 좀 공부해야 할 것 같고요. 또 제가 대외활동해 놓은 게 하나도 없어서 시간 있으면 봉사활동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말하고 보니 너무 두서없이 말한 것 같아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민선우의 얼굴을 확인했다. 녀석은 평온한 얼굴로 커피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내가 커피잔을 내려놓는 타이밍에 커피잔을 기울이는 녀석을 보면서 요점만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했다.
“그래서 일단 토익점수부터 만든 다음에 사회복지사 자격증 공부랑 엑셀, 포토샵 공부 시작하려고요. 자격증 시험은 돌아오는 때 응시해서 바로 붙는 게 목표고 토익은 900점 이상, 엑셀이랑 포토샵은 기본 이상, 봉사활동은 일주일에 한 번이 목표예요.”
...일단은요. 왜인지 몰라도 가만히 보는 눈길이 부담스러워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커피잔을 손에 쥔 채 눈을 굴려 눈치를 보자, 뭔가 생각하는 듯한 민선우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진호는 계획을 추상적으로 세우는 편이구나.”
“네? 아니, 나름대로 되게 구체적으로 짠 건데....”
“하하, 귀엽네.”
뭐지. 정말 내 딴엔 구체적으로 수치까지 정해서 계획을 짰는데 어디가 추상적이라는 걸까. 민선우는 정말 내가 귀엽다는 듯이 고개까지 살짝 저어가면서 웃었다.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인상 쓸 거 없어. 잘못했다고 하는 거 아니니까.”
“이미 실컷 웃어놓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민선우가 다리를 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근데 추가해야 할 게 있어. 두 가지.”
나는 허공에 펼쳐진 손가락 두 개를 보며 구시렁대던 것을 멈췄다.
“두 가지요?”
“응. 어려운 건 아닌데 중요한 거. 건강에 관한 거니까.”
건강. 하도 뜬금없어서 입으로 그 단어를 따라서 중얼거리는 새 민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녀석은 본인을 올려다보는 내게 손을 뻗어 이마를 쓸어올려 주었다.
“하나는 정신 건강을 위한 거고, 하나는 몸 건강을 위한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소파에 앉은 녀석이 가볍게 말했다.
“간단한 거부터 말하자면, 삼시 세끼 영양소 맞게 골고루 잘 챙겨 먹는 거. 그리고 그걸로는 지금 상태에선 모자랄 것 같으니 필요한 영양제 챙겨 먹을 것.”
그걸 뭘 계획까지 세우고 지키냐고 말하려다가, 녀석의 손이 만지작거리는 팔목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최근 들어 살이 좀 많이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커다란 손에 잡혀 있으니 살이 빠진 정도가 아니라 말라 보였다. 몸 건강. 아까 녀석이 했던 말을 입에서 굴리면서 더듬더듬 배와 옆구리, 허벅지를 만져 확인했다. 동시에 요근래 밥을 먹었던 것들을 곱씹어 보았다. 불규칙적이고 영양가 없는 음식들투성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괜스레 투덜댔다.
“벌써 두 개 다 찼는데요.”
그러나 민선우는 내 투덜거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게 바짝 붙어 앉은 녀석은 내 턱을 잡더니 배를 들춰보느라 아래를 보던 얼굴을 들어 올리고 속삭였다.
“병원 알아놨어. 상담사도. 병원은 토요일에 내가 같이 갈 거고, 상담도 같은 날 병원 끝나고 가면 되도록 예약해놨어. 물론 첫날만 내가 잡은 거고, 다음 주부턴 나비가 일주일에 한 번씩 스케줄 잡아서 만나면 돼. 날짜 봐서 내가 동행하거나 기사 붙여줄 거야.”
잘생긴 얼굴이 다가오는 모양을 보고 홀릴 뻔했으나 ‘병원’이라는 단어 하나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차려졌다.
“어... 잠,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병원이라뇨?”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상담사는 또 무슨 소리냐고 덧붙이는 내 윗입술에 민선우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잔뜩 흥분해 언성을 높이던 나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모습이 퍽 웃겼는지 민선우가 목을 울리며 웃더니 내게서 조금 떨어져 앉아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테이블 저쪽에 있는 본인의 커피를 잡으려는 모양이었다.
“심각해질 거 없어. 가족을 잃는다는 건 매우 큰 상실이잖아. 네게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문제가 생기지 않길 바라서 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아니, 그래도 필요 없어요. 그냥 슬픈 거야 시간 지나면 나아질 거고. 일에, 공부에 어쩌면 학원까지 다녀야 할 수도 있어서 시간 없을 것 같아요. 그런 건 좀 시간 지나도 안 좋거나 그러면, 그때 시간 봐서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시 자리에 바로 앉은 녀석은 내가 흥분해서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더니 툭, 짧은 질문을 던졌다.
“진호 오늘 몇 시에 일어났어?”
“어, 저기. 그... 아! 8시요.”
“요즘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지 않아?”
“그건 요즘만이 아니라 원래 다 그런 거-”
“어제 몇 시에 잤어?”
내가 답을 하지 않자 커피를 마시면서 질문하던 민선우의 얼굴이 날 향했다. 녀석은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저께는? 여기 온 첫날엔?”
“....”
“김진호.”
모른다. 몇 시에 잤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요새 나에게 밤은 억겁같이 느껴질 정도로 길어졌다. 고요한 밖, 조용한 방. 눈을 깜박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곳에서 내 머리는 계속 생각하고 떠올리고 상상했다. 빈틈없이 꽉 차게 복잡했다가 어느 순간 텅 빈 것처럼 모든 생각들이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새벽 내내 나는 나 혼자 울다가 웃다가 멍을 때렸다. 그러다 그게 너무 괴로워서, 어떤 소리라도 나면 괜찮을까 하고 핸드폰을 켜 아무 동영상을 재생했다. 보고, 보고, 또 보고. 해가 떠올 때쯤에야 겨우 졸음이 찾아와 눈을 감으면 금세 알람이 울렸다. 그럼 눈을 뜬다. 축축 처지는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만 한 시간. 결국 급하게 서둘러야 할 시간이 되고야 서둘러 일어나 허둥지둥 출근 준비를 했다.
그게 오늘 아침이었고, 어제 아침이었으며 그저께 아침이었다.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는 내 정수리로 민선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진호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네게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라 간단히 상태 확인하는 거고, 혼자 새벽 내내 생각만 하기보단 말로 털어내는 게 좋을 것 같아 하라는 거야.”
뭐라고 반박하고 싶지만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무는데 민선우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박수를 치더니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워 말했다.
“네가 정한 목표들과 내가 추가한 항목이 포함된 일정을 짜 줄게. 일주일이 아마 분 단위로 나뉘게 될 텐데, 진호 네 성격상 너무 엄격하면 스트레스가 될 것 같으니 조금쯤은 어겨도 괜찮아.”
세상에, 채예령도 아니고 일정을 누가 분 단위로도 짜...? 아니 근데 내 일정을 왜 네가 짜? 황당해서 말아 물었던 입이 점점 벌어지고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일주일은 그냥 지켜볼 예정이야. 그동안 진호가 어떻게 하는지를 봐서 너무 과하거나 적으면 조절하고, 의지뿐 아니라 다른 모티베이션이 더 필요한지도 보려고. 평가 기준은.... 그래. 공부는 페이지 수 확인하면 되겠다. 몸은 0.5kg 증량, 병원이랑 상담은 필수 참가.”
“아니 잠깐, 잠깐만요. 그러니까 그걸 왜 형이 정하냐고요!”
녀석은 내가 팔을 잡고 언성을 높이든 말든 매우 산뜻하게 웃었다.
“할 수 있지, 진호야?”
귀공자 같은 미소와 달리 눈빛은 매우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