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3일은 금방 지나갔다. 나 때문에 갑작스럽게 휴가를 내서인지 민선우는 그동안 계속 바빠서 아침과 저녁에 얼굴 잠깐 보는 것이 다였다. 그래서 그때 했던 대화를 잊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녀석은 아침에 나를 데려다주면서 차에서 내리는 내게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오늘 잊지 않았지? 저녁 먹기 전에 들어갈 거야. 같이 저녁 먹고 얘기하자.”
나는 괜히 뜨끔 하는 마음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 그 단어 하나가 사람을 왜 이렇게 복잡하고 초조해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3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기에 결연한 마음을 먹고 크로스백 끈을 다잡았다. 뒷일은 뒷일이고 출근부터 해야 했다.
이제 익숙해진 길을 걸어 마찬가지로 익숙해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우렁차게 인사를 외쳤다.
“안녕하세요-!”
“어, 진호 씨 왔어요?”
“안녕하세요.”
원래 조심히 들어와 주변 자리 사람들에게 조용하게 인사하던 것과 달리 장례식 후 출근부터는 매번 이렇게 큰 소리로 모두에게 인사했다. 처음엔 죄송한 마음에 사과하는 의미를 담아 크게 인사하면서 고개를 숙인 것인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하게 되었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지만 전과 다른 모습이 늘어가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점심시간 후 갑자기 없어진 직원이 며칠이나 지난 후에 돌아왔는데도 말이다. 평소 다른 사람 일에 매우 관심이 많은 과장님마저 나를 보고 왔냐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였던 것을 보면, 아무래도 팀장님께서 대충 사정을 설명한 듯했다. 어디까지 말씀하셨을까, 하는 불안과 함께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가 들었다.
처음에 날 매우 조심스럽게 대하던 사람들은 오전이 오후가 되고, 하루가 이틀이 되면서 점점 원래대로 돌아갔다. 신경 써주시는 건 감사했지만 누군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은 나로서도 불편한 일이었기에 반가운 일이었다. 이런 일을 제외하면 말이다.
“진호 씨, 물어봐도 되는 건가 계속 고민했는데 내가 진짜 너무 궁금해서. 왜 있잖아, 그 경호원들. 그분들은 이제 같이 안 다니는 거예요? 오늘 내내 안 보이던데.”
퇴근하기 전에 과장님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파티션 너머로 눈만 빼꼼 내밀고 물었다. 순간 사무실이 싹 조용해지는 것을 보니 모두가 궁금해하던 화제였나보다. 나는 슬쩍 뒤로 등을 기댄 대리님을 옆눈으로 힐긋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왜? 그때 뭐 무슨 일 있다고 그랬잖아. 그거 다 해결된 거야?”
말문이 터져버린 과장님은 곤란한 티를 내며 웃어 보이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 경호원을 데리고 와야 했을 때 잘 무마해 넘어간 줄 알았는데, 그땐 내 뒤에 서 있던 경호팀장님의 눈빛이 너무 살벌해서 넘어간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길래 그러냐, 재벌 집 상속자인 줄 알았다, 지금은 그럼 안전한 거냐고 질문하면서도 내 대답보단 그저 자기 추측을 늘어놓기 바쁜 과장님을 놔두고 나는 잊을만하면 울리는 핸드폰을 힐긋 확인했다.
[비가 온다. 우산은 있는지 걱정이군.]
[오늘 구내식당 음식 진호가 좋아하는 거더라. 잘 챙겨 먹었기를.]
[나 수술 들어가. 긴 수술이라 자정쯤 돼야 끝날 것 같아.]
그날 이후로 최태혁과 쌍둥이는 내게 꾸준히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엔 질문을 보내던 녀석들은 몇 번의 시도 끝에 내가 답장을 보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질문이 아니라 본인들의 생활을 보고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그런 건지 의도한 건지는 몰라도, 문자에는 그들이 나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점점 삼천포로 빠지는 과장님을 말려야 하는 건 아닌지 직원들이 서로 눈짓하는 것을 모르는 척하기 위해 흐린 눈을 하고 과장님 옆 허공을 봤다. 그러자 정신이 없어 신경도 쓰지 않았던 지난 이틀 동안의 녀석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갔다.
민선우는 녀석의 집에 가겠다는 나의 답을 듣자마자 회사에 전화하더니 휴가를 받았다. 아버지가 회장인 회사에 취직하면 2일 정도의 휴가 따위, 그 전날 전화 한 통으로 낼 수 있는 것 같았다.
뭐 때문에 여수에 있었는지 모를 정새빈은 3일 내내 돌아갈 기미가 전혀 없어 보였다. 녀석은 안쪽에 마련된 방에서만큼은 내가 편히 있어야 한다면서 그 방을 차지하고 나 외엔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나 엄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두 분은 정말 미친놈처럼 구는 정새빈에게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외부 화장실을 이용하고 손님이 없어 텅텅 빈 식당 한구석에서 잤다.
내가 들어갈 때마다 곤히 자고 있었기에 그냥 자기가 편하게 자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으나, 내가 아닌 사람이 들어가면 귀신같이 일어나 쌍욕을 하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최태혁은 첫날 하루를 꼬박 지키고 날이 밝자 그 모습 그대로 일을 나갔다가 저녁에 다시 와 자리를 지켰다. 다음날 화장터에서 박귀염 씨가 무릎을 꿇으며 사정하지 않았다면 추모원까지 동행할 기세였다. 정확히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박귀염 씨가 안쓰럽고 소란이 이는 것이 귀찮았던 내가 이만 가보라고 말해서 간 거 같았지만.
남궁후와 호는 일이 일인지라 첫날부터 계속 콜을 받으면 갔다가 틈이 생길 때마다 와서 자리를 지키는 것을 반복했다. 녀석들이 계속 들락날락거리는 덕분에 언뜻 보면 그래도 손님이 계속 오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어딜 다녀오는 손엔 꼭 먹을 것들이 들려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내가 평소 잘 먹고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이었다. 물론 그때는 먹을 정신도 아니었고 그놈들이 준 건 더 먹기 싫었기에 쳐다도 보지 않았다. 녀석들이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인가 싶으면서도 마음이 풀리지 않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이틀 동안 최태혁과 쌍둥이를 대부분의 시간 동안 외면했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굴다가 한 번씩 울컥 짜증이 치솟을 때가 되어서야 녀석들에게 예령이 병문안 안 가보셔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아주 조금은 해소되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지겨웠지만 그렇다고 듣기 싫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이 그 말을 하는 것을 기다리기도 했다. 아마 요 며칠 동안 내가 평생 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미안해’ 소리를 들었을 성싶었다.
“진호 씨, 내 말 듣고 있어?”
한창 혼자 떠들던 과장님이 드디어 나를 봤는지 약간 더 언성을 높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눈을 굴려 확인한 과장님은 다행히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워낙 말이 길어 듣다 보면 딴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익숙해지신 걸까. 맹한 생각을 하면서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벌집 아들 아니고요, 그냥 목격자 보호 프로그램 이런 거였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저 먼저 퇴근해보겠습니다!”
민선우가 아침에 했던 말 때문인지 오늘 하루는 정말 빨리 지나간 느낌이었다. 마지막에 오지랖 가득 넘치는 질문을 받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나쁠 것 없는 평범한 하루를 가득 채웠던 고민들을 곱씹으면서 가방을 멨다. 그리고 계속 중얼거리는 과장님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와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30분 전에 온 메시지 내용대로 오늘은 기사님이 아니라 단정한 차림의 민선우가 차 옆에 서 있었다.
“오늘 하루 잘 보냈어?”
“네, 뭐. 그럭저럭요.”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고 차에 탄 우리는 잔잔한 재즈 음악을 들으며 집으로 향했다. 민선우의 집이지만 요리에 전혀 소질이 없는 녀석을 놔두고 내가 저녁을 차리곤 했기에 오늘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도착해서 부엌에 가보니 이미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온갖 산해진미가 다 있는 것을 보니 저절로 텐션이 올라갔다.
“이게 다 뭐예요? 고기랑 해산물에 탕에 찜.... 출장 뷔페 부르셨어요?”
“아니. 그렇다기보단.... 밥 먹고 얘기해줄게. 가서 손만 씻고 와. 식기 전에 먹자.”
“네! 잠시만요!”
내가 해서 먹는 것도 맛있고 좋지만, 남이 해준 맛있는 밥을 먹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법이다. 특히나 최근 며칠은 장례식의 여파가 남아있어 요리할 힘이 잘 나지 않아 대충해서 먹기도 했기에 제대로 된 음식을 마주한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냄새도 모양새도 내가 한 것보다 훨씬 맛있어 보이는 음식에 흥분한 나머지, 일하는 중에도 놓지 않고 있던 고민은 싹 날아가고 설렘과 흥분이 차올랐다.
나는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달려가 손과 발을 씻고 나와 냉큼 의자에 앉았다. 민선우도 얼마 가지 않아 걷었던 소매를 내리면서 걸어왔다.
녀석이 자리에 앉고, 우리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막 숟가락을 들었을 땐 세 그릇이고 네 그릇이고 먹을 것 같았던 나는 무슨 일인지 금방 배가 차는 바람에 한 그릇도 채 비우지 못했다. 내가 봐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배가 부른데도 차마 숟가락을 내려놓지 못하는 내게 어느새 한 공기를 깔끔히 비운 민선우의 손이 닿았다.
“무리하지마, 진호야.”
“아니 그게 아니라. 무리가 아니라요.”
“양이 좀 준 것뿐이야. 괜찮아 진호야. 숟가락 내려놓자.”
조곤조곤 말하는 녀석의 눈을 보면서 그 손길에 따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별거 아닌 일인데 왜 이렇게 충격적일까. 내가 밥 한 공기를 못 비우다니? 나 오늘 점심에는.... 점심에는.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점심 뭐 먹었더라? 샌드위치 먹은 게 오늘인가? 어제였나? 아. 어제저녁이었다. 냉장고에 감자랑 계란이 있길래 삶아서 마요네즈랑 섞어서 샌드위치를 해서 먹었다. 그럼 오늘 점심은 진짜 뭘 먹었었지. 기억이 아예 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자꾸 헷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