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부자들이 좋아하는 곳인가, 여기가. 차가 들어서는 길이 어째 익숙하다 했더니 민선우가 날 데려온 아파트는 쌍둥이와 같이 지냈던 아파트 옆 동이었다. 워낙 부지가 넓어 바로 옆 동이라고 해도 조금 걸어야 했지만, 어쨌든 한동안 지냈던 만큼 못 알아볼 리가 없는 그런 곳. 자기 집으로 오라길래 내가 일했던 그 집으로 갈 줄 알았더니 이 녀석도 부자답게 집이라고 부르는 곳이 여러 군데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지친 몸을 핑계로 여기로 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내 어깨를 감싼 민선우에게 몸을 맡기고 묵묵히 걸을 뿐이었다. 그런 내 태도에도 녀석은 기분 나빠하거나 과하게 신경 써주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어느 집 문 앞. 차에 타기 전, 그리고 차에 내릴 때부터 쭉 내 어깨에 얹어 부드럽게 방향을 틀어주던 손이 떨어지더니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어서 와, 진호야.”
활짝 열린 문 안으로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는 복도가 보였다. 역시나 익숙한 구조. 나는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못 이겨 머쓱하게 인사했다.
“실... 례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같이 걸어와 놓고 이게 맞나 싶었지만, 인사를 받은 민선우가 만족스럽게 웃으니 된 거 아닌가 싶다.
“좀 놀란 것 같네.”
“음... 제가 생각했던 집이 아니라서요.”
현관 복도와 거실의 경계선에 서서 나를 뒤돌아보는 민선우에게 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동과 층이 달라서 조금 다를까 했는데, 내부 구조마저 비슷한 것 같았다. 나는 집주인인 민선우가 뒤에 있다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휘적휘적 처음 보는 집 안을 돌아다녔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민선우는 대충 집안 파악을 마치고 소파 끝에 걸쳐 앉은 나를 보고 슬쩍 웃었다.
“익숙해 보이기도 하고.”
“아. 그건-”
“쌍둥이 때문이겠지. 알아.”
갑작스러운 지적에 당황해서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으나 나보다 민선우가 더 빨랐다. 다섯 놈들과 있을 때 정말 한 번도 빠짐없이 하는 생각이 있다면, 어쩌면 이렇게 나에 대해 다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쌍둥이와 같이 지낸다는 건 말했지만 어디서 지내고 있다는 건 말한 적이 없는 거 같은데 쟨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호기심과 기시감으로 인해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러자 나를 보고 있던 민선우가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 최태혁네 회사가 지은 거거든. 그때 모두 하나씩 분양받았어. 나랑 쌍둥이뿐만 아니라 정새빈이랑 최태혁도 하나씩. 위치도 나쁘지 않고 새 건물이라 깨끗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때 병원 근처에서 지낸다길래 여기인 줄 알았어. 아마 다들 알고 있었을 거야.”
“진짜요? 다들요?”
아는 사람들 태도가 아니었는데. 연락할 때 다들 알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와 나를 데려갈 것처럼 이를 바득바득 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결국 병원에 찾아와 나를 납치하듯 데려갔던 최태혁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민선우의 눈이 휘었다.
“협약도 있고, 각자 한국에 없기도 했고. 이런저런 사정도 있었으니까. 일시적이었지만 네가 ‘집’이라고 인식하는 곳은 되도록 건들지 않기로 암묵적 동의가 있었거든.”
“어.... 그런 거 치곤 그냥 막 와서 절 데려가던데....”
“정새빈은 말도 없이 널 데리고 잠적한 거였잖아. 거기다 걔랑 같이 오래 있을수록 네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했어. 그 뒤에 최태혁은 쌍둥이와 지내는 것보단 본인이 데리고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암묵적 동의고 협약이고, 결국엔 다 자기들 멋대로 했다는 이야기 같은데 그거. 아닌가? 그나마 그거라도 있기에 자기들끼리 나를 마구잡이로 주고받는 유치한 쟁탈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각자 동도 다르고 쓰임새도 워낙 달라서 마주친 적은 없었는데 아마 오늘을 기점으로 달라질 거야.”
“...네?”
“내가 널 데리고 여기로 온 거 지금쯤이면 다른 녀석들도 다 보고받았을 테니까. 그 녀석들도 조만간 여기로 올 게 뻔해서. 목적은 어떻게든 너랑 마주치는 거겠지. 뒤늦긴 했지만 깨닫긴 한 것 같거든.”
성가시게. 그 말을 중얼거릴 때 내내 잔잔한 미소가 띄워져 있던 얼굴이 찰나의 순간 일그러졌다 돌아왔다. 내가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빠른 변환이었다.
“사실 마음 같아선 그놈들도 파악하기 쉽지 않은 곳으로 데려가서 머리카락 한 올도 찾지 못하도록 숨겨두고 싶지만, 사회생활엔 경력이 중요하잖아. 내 나비가 일하고 싶다는데. 해야 하는 걸 도와주기로 한 마당에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이번에는 숨겨두고 싶다는 대목에서 내게 보낸 눈빛에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아까와 마찬가지 눈을 깜박하는 짧은 시간에 녀석의 눈은 다시 다정하게 돌아와 있었기에 내가 또 잘못 본 건가 싶었다.
“출퇴근 시간이 짧아질수록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들었어. 그 말을 기준으로 본다면 진호 네게 여기는 최적의 거주지고. 다만, 진호 너도 그들과 마주치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을 테니까 출근할 땐 내가, 퇴근할 땐 기사를 보낼 거야. 일단은 거기까지만 해보자.”
“...거기까지요?”
다섯 놈들과 지내면서 확실히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말 사이에 교묘히 숨어있는 찝찝함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머뭇거리며 되물은 말에 민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씩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도와주겠다고 했잖아. 규칙적이고 엄격하게.”
아니다. 내가 기억하기론 분명 규칙적이고 엄격하다는 말은 본인의 성격을 설명할 때 나온 거고, 도와주겠다는 말과는 별개였다. 근데 그게 어째서 규칙적이고 엄격하게 도와준다는 게 되어버린 걸까. 나는 당황한 것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얼굴에 드러냈다.
“그, 렇게 도와주실 필요 없는데요. 그런 얘기 아니었었는데.”
뒤로 몸을 물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내게 민선우가 깍지를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건 봐서 결정하자. 나도 내가 ‘해’주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거라고 한 만큼 처음부터 손댈 생각은 없어.”
“손을 댄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녀석은 내 물음에 찌푸린 표정 그대로 얼마간 침묵했다. 그 정적이 심상치 않아 괜히 긴장되어 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내 민선우가 살짝 고개를 들어 으음-하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고개를 내리고 나와 눈을 맞추어 왔다.
“좀 쉬고 저녁 먹인 다음에 천천히 얘기하려고 했는데 말하다 보니까 나와버렸네. 이렇게 된 거, 먼저 이 이야기부터 끝낼까?”
말을 하다 마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못된 짓 중 하나였다. 이미 호기심과 알 수 없는 불안을 잔뜩 자극당했던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민선우가 긴장이 역력히 드러날 내 얼굴을 보고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더니 물었다.
“그럼 먼저 물을 게 있어, 진호야.”
“뭔데요?”
민선우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뭐야?”
나는 그 질문에 눈을 몇 번 깜박이다 덤덤하게 대답했다.
“취직이요.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는 거요.”
뭔가 실제로 말하고 보니 되게 속세에 찌들고 소박하면서도 너무 당연해서, ‘이루고 싶다’라고 거창하게 말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지만 정말 그거였다. 민선우는 내 얘길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반응을 할지 조금 긴장해서 지켜보던 나는 녀석의 너무 여상스러운 태도를 보고 나도 모르게 굳었던 몸에 힘을 풀었다.
“번듯함의 기준이 뭔데?”
“사람들이 이름을 들으면 알 정도로 큰 곳에서 일하고 싶어요. 되도록 제 전공에 관련된 곳에서요. 아이들...을. 아이들을 위한 곳이면 더 좋고요.”
민선우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위해서 뭘 할 예정이야?”
나는 이번 질문에도 바로 답을 하려다 멈췄다. 막연하게 취직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있었지만 그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기엔 너무 이것저것 끌어다가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실이 또 조용해졌다. 침묵을 깨트린 것은 본인 무릎을 톡톡 치며 내 대답을 기다리던 민선우였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데 3일. 3일 후에 계획이 세워지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다가 맛있는 밥 먹고 자는 게 맞는 것 같다.”
녀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긴 다리로 몇 발짝 걸어간 녀석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방 보러 가자.”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에게서 반 보정도 뒤에 섰다. 딱히 손을 잡지 않고 위를 올려다보자 고개를 기울이고 웃어 보인 녀석이 몸을 돌렸다. 민선우가 내게 보여준 방은 총 네 개로, 녀석이 사용하는 침실과 내가 사용할 침실, 녀석이 사용하는 서재와 내가 사용하게 될 서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