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194)화 (193/234)

194화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펼쳤던 손만 말아쥐며 말을 이었다.

“뭐, 울고불고 화내고 때려도 된다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요. 진짜 그러는 거 아니에요. 형들 진짜 지금 엄청 꼴 보기 싫어요. 엉덩이 발로 차서 여기서 쫓아내고 싶어요. 아깐 뭐 하다 이제 와서 소란이냐 소리 지르고, 이미 늦어서 버스 떠났으니 썩 꺼지라고 소금 뿌리고 싶어요.”

말하면서 느꼈다. 앞뒤 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필터링 없이 하는 것은 정말 속 시원하구나. 특히나 맨날 눈치 보고 무서워서 할 말 제대로 못 했던 상대한테 하는 건 묘한 긴장과 희열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 번 터지고 제어가 되지 않았다.

“예령이 걱정돼서 뭐라 한마디 한 걸로 득달같이 예령이 변호해줄 땐, 알아서 대화할 테니 끼어들지 말라고 얼굴에 농구공 던지고 싶었고요.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대화하는지도 모르면서 사이에 껴서 워워 거릴 땐 정강이 차버리고 싶었어요. 나 나오고 낄낄거리는 거 들었을 땐 소화기 들고 가서 쏴버릴까 고민했고요, 다 예령이 생각해서 참은 거예요. 걘 진짜 교통사고 당했고, 내가 말하지 않아서 몰랐고, 적어도 나한테 괜찮냐고 물어봐 줬으니까요.”

뒤에서 정새빈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선우도 옆에서 피식거렸다. 앞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말아쥔 손을 다시 펴서 마주하고 깍지를 꼈다. 그리고 긴 숨을 후- 뱉은 다음 고개를 들고 눈으로 최태혁을 찾았다. 나는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놈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저 장례식 끝나고 형네 집에 안 가요.”

“김진호.”

최태혁의 인상이 단숨에 확 찌푸려졌다. 녀석은 일단 인상부터 찌푸리는 버릇이 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자주 헷갈리게 했지만, 이번엔 제법 명백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찌푸림이었다.

“형이 그랬죠. 누가 저 노리고 있다고. 그 사람들로부터 저 지킨다고 거기 감금까지 하려고 했잖아요. 어디 나갈 때마다 경호원도 매번 한 명에서 세 명까지 붙이는 것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 보고도 철저히 하게 하고요. 저 그거 엄청 불편했는데도 했어요. 형 말 믿었거든요. 그리고 형도 믿었고요.”

내 어조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고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울음기나 분노도 담기지 않았다. 그냥 평소 말투였다.

“근데 오늘 일로 그거 다 덧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오늘은 교통사고가 있어 어쩔 수 없-”

“아뇨. 형한테 원한 품어서 절 어떻게 하려는 사람들이 형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절 해코지 할까요? 형이 아직까지도 못 잡아 불안해서 절 가두려고 할 정도인 놈들이 그렇게 멍청하다고요?”

피식 웃으며 질문하자 반박하려던 최태혁의 입이 다물어졌다.

“확실히 그냥 다니는 것보단 안전하긴 하겠죠.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내게 도움이 되리라는 신뢰가 깨졌잖아요. 그러고 나니까 내가 왜 그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고 형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나, 지금 당장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랑 내가 왜 같이 살면서 눈치를 봐야 하나 싶어요.”

“진호야 앞으로는 정말 이런 일은 없을 거다. 네가 불안하지 않도록 더 신경을 기울이고, 다신 연락을 놓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예정이야.”

연이은 선언에 최태혁이 다소 다급한 어조로 날 설득하려 들었다. 오늘 정말 최태혁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번 정한 내 마음이 움직이진 않았다.

“싫어요. 화가 안 풀려요. 아직도 병실 침대 옆에 앉아 날 향해 인상을 찌푸리던 형 얼굴이 생각나서 서러워요. 미안하다 그러는 것도 이 사람이 정말 나한테 미안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남한테 뺏기기 싫어서 하는 말인지 모르겠고요.”

아니면 섹스 때문에 그러나 싶기도 해요. 당연히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람이 기절해도 멈추지 않고 한 것을 봤을 때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얘긴 아니었다. 최태혁은 빠르게 아니라고 부정했으나, 분위기 파악을 안 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모를 남궁후가 잽싸게 치고 들어왔다.

“그럼 우리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공허할 틈 없이 같이 있-”

“아뇨.”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말을 하는 녀석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거절했다.

“일도 사생활도 바쁜 두 분인데, 저 같은 게 공허한지 충만한지 알 수 있겠어요?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 형들이 봐야 하는 환자에게도, 형들 체력에도, 카메라로 가득한 변태 같은 집에서 홀로 채워지길 기다릴 제 정신에도. 무엇보다 오늘 제 인생에서 손꼽히는 공허한 순간을 만들어준 사람이 할 얘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처음엔 뭐라고 반박하려고 목소리를 내던 남궁후의 시선이 점점 흔들리더니 결국 아래로 떨어졌다. 아까부터 고개 숙이고 있는 남궁호와 나란히 의기소침해진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몸이 확 뒤로 넘어갔다. 힘 조절 없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거의 누운 자세로 보게 된 정새빈은 웃고 있었다.

“쫑쫑이는 나랑 지낼 거야.”

아주 신이 난 말투였다. 나는 딱 좋게 불빛을 가려준 정새빈의 머리 덕분에 눈부심 없이 올려다보면서 조금 겸연쩍은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것도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 먼 여수에서 여기까지 몇 시간 만에 와준 녀석에게 퇴짜를 놓자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거절하자마자 울먹이기 시작해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러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와의 계약을 떠올렸다.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 더 바쁘고 알차게 보내야 했다. 정새빈과의 생활은 안락하고 편안하지만 쉽게 게을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선 안 됐다.

나는 녀석의 눈에 눈물이 잔뜩 고인 것을 모른 체하고 배에 힘을 주어 상체를 바로 했다. 내가 갈 곳은 당연히 집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내가 살던 집. 저번에 잠깐 들렀을 때 생각보다 별거 없다는 것을 느낀 뒤로 이젠 돌아가도 되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나는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기 위해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전 당분간 집중해서 할 게 있어서요. 좀 바빠질 거라 그냥 집으로 갈-”

“우리 집으로 가자.”

하지만 도중에 끊고 들어오는 민선우의 제안으로 인해 짧은 문장은 채 완성되지 못했다. 어느새 내 손을 옆으로 밀어내고 내 옷을 정리해주는 민선우의 손을 보다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뒷덜미가 잡아당겨져 한껏 올라간 옷을 밑으로 내려 펴주던 민선우가 의문 가득한 시선을 느꼈는지 슬쩍 눈을 올려 나를 확인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싱긋 웃어준 녀석은 손을 올려 구겨졌을 뒷덜미를 펴주면서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봐, 진호야. 네가 집으로 가면 최태혁이 또 사람 안 붙일 것 같아? 처음엔 그래도 몰래 하려고 하겠지만, 결코 네가 원하는 대로 아예 손을 떼는 일은 없을 거야.”

녀석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었다. 힐긋 곁눈질로 확인한 최태혁이 민선우를 향해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봐선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운 추측인 것 같았다.

“쌍둥이도 그래. 저 녀석들이 혼자 덩그러니 있을 너를 그냥 두겠어? 어떻게든 널 감시하고 알려고 할 거야. 미안한 마음에 정말 네 말을 따라줄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네게 미움도 받은 마당이라 더 거리낌 없어질 가능성도 다분하지.”

이것도 차마 아닐 거라고 말하기가 그랬다. 더군다나 쌍둥이가 움찔 몸을 떤 것을 봤으므로 부정은커녕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은 과거에도 나 몰래 우리 집에 카메라와 도청기를 설치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물론 누구 보기에 부끄러운 생활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 나도 모르는 새 카메라가 생기는 건 절대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정새빈은.... 굳이 같이 살지 않더라도 네가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될 거야. 진호가 혼자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 놔둘 애가 아니잖아. 네가 뭔가를 해야 하든 말든 쟨 아마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서 자기 페이스에 말려들게끔 할걸?”

나는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지극히 타당한 추측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내가 집에 있고 녀석들을 번갈아 가며 만났을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툭하면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만 보고 있는 정새빈을 욕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 옆에 누워 느른한 분위기를 즐기곤 했다. 같이 살 땐 정말 손가락 까딱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에 푹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나를 집에 데려가 살려는 것을 보면 분명 우리 집에도 뻔질나게 드나들려고 할 것 같았다.

그러다 아예 우리 집에 눌러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쳤을 때, 나도 모르게 뒤돌아 확인한 정새빈은 입을 삐쭉 내밀고 민선우를 한껏 째려보고 있었다. 민선우가 말한 대로 할 심산이었음이 그대로 티가 나는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집으로 돌아가 생활하는 것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결정한 모양이었다. 머리가 또 복잡해지려는데 민선우가 내 턱을 잡고 본인을 마주 보도록 돌렸다.

“그러니까 우리 집으로 와, 진호야.”

녀석은 정말 나를 위해 제안하는 것처럼 염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나는 저 짐승들과 달리 매우 규칙적이고 엄격한 사람이잖아. 나는 쓸데없이 사람을 붙이지 않고도 안전하게 지켜줄 거고, 쓸모없는 두 사람처럼 너를 외롭게 만들지도 않을 거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널 방해할 일은 없을 거야. 진호가 집중해야 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나한테 와, 나비야. 민선우가 넥타이를 고쳐주며 속삭이는 소리에 나는 좌우로 고개를 돌려 최태혁과 남궁후, 호, 정새빈을 봤다.

그래, 내가 건방졌다. 나는 정새빈이 했던 말처럼 겁도 없이 맹수가 가득한 쓰레기통에 들어온 참...새는 아니고. 아무튼 힘없는 무언가였다. 그런 내가 자력으로 저 맹수들을 견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쥐고 있는 목줄은 그들의 울타리 안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뜻을 거스르지 않았을 때에만 힘이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꼴 보기 싫은 세 명의 간섭과 마약과 같은 정새빈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나마 차악의 방법인 것 같아서였다.

그 대답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동안 조문객 한 명 오지 않는 쓸쓸한 빈소지만, 그래도 상주인 내가 더 이상 자리를 비우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버지, 엄마와 한 공간에 멀뚱히 앉아 있는 것쯤 아빠와 있었던 일을 곱씹다 보면 금세 익숙해질 터였다.

나는 나를 따라 일어나려는 민선우와 정새빈에게 앉아서 밥부터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곧장 빈소로 향했다. 최태혁과 쌍둥이는 나의 외면에도 꿋꿋이 하루를 다 채우고 돌아갔다. 많은 일이 있었던 첫날 이후 남은 이틀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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