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진호...야?”
갑작스레 터진 고함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진 병실 안. 나도 생각보다 크게 내질러진 목소리에 놀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자마자 후회하며 눈치나 볼 거면서 왜 지르고 본 걸까. 스스로가 한심하고 바보 같았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나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최태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예령이 잘못이 아니야. 내 부하직원이 타고 있던 차가 급하게 방향을 틀다가 부딪힌 거다.”
어제도 통화하며 실컷 들은 녀석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눈을 떠 녀석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낯설게 느껴진 것은 목소리뿐이 아니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임에도 가슴이 시릴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그게 너무 생경해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내가 다시 화라도 낼 것 같았는지 이번엔 쌍둥이들이 말을 보탰다.
“진호야 일단 진정해, 진정.”
“얘 지금은 이렇게 괜찮아 보여도 여기 막 왔을 땐 놀라서 덜덜 떨고, 소리 지르면서 아버지 찾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 많이 놀라고 걱정돼서 잔소리하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지금은 좀 일러. 우리 좀 참았다가 더 괜찮아지면 같이 하자.”
그렇게 말하며 어느새 나와 채예령 사이에 선 녀석들이 장난스레 코를 찡긋거렸다. 녀석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주변을 둘러봤다.
채예령을 향해 서 있는 나와 나를 마주하고 있는 네 명. 어리둥절한 채예령과 인상을 찌푸린 최태혁, 어색하게 웃고 있는 남궁후와 호의 얼굴을 차례로 눈에 담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와 그들 사이에 있을 리 없는 선이 보이는 것 같아서였다.
나를 진정시킬 의도였을 녀석들의 개입은, 오히려 내가 외면하고 있던 감정만 더 선명하게 느끼게 했다. 또 하자마자 후회할 말들이 목구멍에서 어른거렸다.
나는 눈을 내리깔아 시야에서 녀석들을 지웠다. 마침 채예령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인지 다른 때보다 더 밝은 톤으로 말했다.
“많이 걱정했어? 야, 별거 아니었어. 차가 좀 많이 박살 나긴 했는데 나랑 아버지는 괜찮아. 입원도 안 해도 됐었는데 형이 자꾸 고집을 부려서....”
평소라면 녀석의 노력에 발맞춰 거짓으로라도 웃었으련만, 굳은 얼굴이 잘 풀어지지 않았다. 추하고 이기적인 내 안의 내가 자꾸 날것 그대로의 울분을 토해내고 싶어 했다. 채예령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 한마디에 앞뒤 생각 못할 정도로 놀라 달려왔으면서, 막상 괜찮은 것을 보고 안도하자마자 자꾸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런 스스로가 너무 창피하고 한심했지만, 자꾸 울컥울컥 치미는 이 설움은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만 방심하면 나의 아픔도 알아달라고 울며 무너질 것 같았다.
교통사고가 난 친구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너무 걱정한 나머지 안도하자마자 반대급부로 화가 나 잔소리를 한 것도, 그래.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긴 해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는 범위였다. 너무 격하게 얘기한 것 같아 후회되긴 하지만 창피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넌 다행히 좀 괜찮은 것 같으니 이젠 나 아픈 걸 알아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추하고 이기적인 억지였으므로 참는 것이 옳았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거칠게 얼굴을 문대니 조금씩이지만 굳었던 근육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나는 약간 부드러워진 얼굴 근육을 움직여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렸다.
“미안. 내가 너무 놀라서 잠깐 좀 미쳤었나 봐. 갑자기 소리 질러서 놀랐지. 미안해.”
의도했던 것보다는 딱딱한 어조였으나 그래도 무난한 사과의 말이 나왔다. 앞에 있는 쌍둥이들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한걸음 옆으로 가서 섰다. 그제야 채예령만 온전히 보였다. 녀석은 내가 진짜 진정한 건지 살피는 것 같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아냐. 나도 맨날 너한테 이런저런 잔소리하는데, 뭐. 네가 웬일로 큰 소리를 내나 해서 놀란 것뿐이었어.”
씩 웃는 녀석을 향해 나도 다시 한번 웃었다. 우리는 그 뒤로 실없는 소리를 몇 마디 주고받았다. 세 명의 시선은 채예령이 얘기하면 그에게로, 내가 얘기하면 나에게로 옮겨 다녔다.
사실 나에게 더 오래 머무는 것 같긴 했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모른 체했다. 유치한 행동임을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겨우 만든 이 미소가 어그러질 것 같았다. 나는 교통사고를 당한 내 소중한 친구가 천만다행으로 괜찮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자연스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애초에 채예령과 아저씨가 무사한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온 것이었다. 목적을 이룬 데다 본의 아니게 행패를 부려 망가트린 분위기도 어느 정도 수습이 된 것 같으니 이제 돌아가 봐야 했다.
꺼낸 핸드폰의 화면을 켜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있었다. 그리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비서님, 엄마, 아버지, 그리고 모르는 번호. 덤덤함을 가장한 얼굴로 목록을 확인하고 채예령을 향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너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까 이제 가봐야겠다. 내가 좀, 일이 있어서.”
“아 진짜? 급한 거 아니면 좀 앉아 있다 가지.”
“급한 일이야.”
아쉬워하는 녀석에게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너무 멀찍이 서 있기만 했다 가기 뭐해서 어깨라도 한번 토닥이고 갈 심산이었다. 그러나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채예령에게 먼저 팔이 잡혀버렸다.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인 녀석은 쌍둥이들과 최태혁이 있는 쪽을 힐긋거리며 속삭였다.
“야. 너 무슨 일 있지? 괜찮아? 형들 나가라고 그럴까?”
괜찮을 리가. 녀석의 질문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말이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걸 마주하고 있으려니 입이 간질거렸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오늘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들고 슬프며 겁이 나고 외로운지 당장이라도 말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안될 일이었다.
그대로 눈을 보고 있으면 결국 말해버릴 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내 팔을 잡은 녀석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수많은 말들을 떠올리고 지워냈다. 그렇게 하지 못할 말을 실컷 곱씹고 나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채예령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내 팔을 놓아주었다. 옆을 곁눈질하는 걸로 봐선 다른 사람들이 있어 말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본인 때문에 말을 더 삼가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서로에게만은 모든 걸 털어놓곤 했었으니까.
당연히 이 문제 역시 언젠가는 말해줄 생각이었다. 다만 지금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에 조금 미루는 것뿐이다. 녀석의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아프지 않을 만큼만 받아들이고, 적당히 흘려보낼 수 있을 때 나는 항상 그랬듯 녀석에게 찾아갈 예정이었다. 지금은 아무 설명하지 않아도 크게 궁금해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내가 기대도 될 것 같은 단단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채예령이 아니라 저들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녀석들이라면 그렇게 해줄 거라고 믿었기에 연락했었다.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 것 같지만.
나는 눈을 몇 번 깜박여 씁쓸함을 감추고 팔을 들었다. 따로 어깨에 뭐가 없는 걸 보면 다친 것 같진 않았으나 혹시 몰라 아주 살살 툭 치며 웃었다.
“나 이제 진짜 간다. 연락할게.”
그리고 큰맘 먹고 지금껏 외면하던 세 명을 향해 몸을 돌리며 차례대로 눈을 맞췄다.
“갑자기 찾아와서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그래서 죄송해요. 전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예령이 잘 부탁드려요.”
“김진호.”
“진호야.”
최대한 밝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뒷걸음질로 병실을 벗어났다. 최태혁과 쌍둥이 중 한 명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눈빛으로 내 이름을 불렀지만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에 무시했다. 채예령이 문자 하라고 소리 지르는 것에 알겠다고 대답한 것을 끝으로 문을 완전히 닫았다.
그리고 나는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상태로 서 있었다. 나름대로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다. 그러나 안에서 나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조금 있다 조그맣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손에 힘이 빠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자세 그대로 몸을 돌린 내 시야에 깨끗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구두가 잡혔다.
“얘기 다 끝났어?”
구두에서부터 길쭉한 다리, 넓은 어깨를 지나 눈에 들어온 것은, 싱긋 웃고 있는 민선우의 얼굴이었다. 바른 자세로 서 있던 녀석이 팔을 들어 올리더니 내게 뻗었다. 곧이어 차가운 손가락이 더듬더듬 볼 위를 쓰는 것이 느껴졌다.
“다른 애들한테도 전화하지 않았어?”
민선우가 내게 특유의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했어요.”
“안 받은 이유 들었어?”
“...아니요.”
예령이의 상태가 어떤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녀석은 전혀 뜬금없는 것들을 질문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어쩐지 질문에 답할수록 서러움이 달래지는 기분이 들었다. 민선우가 머리를 모로 기울였다.
“네가 왜 양복 입었는지는 안 물어봐?”
나는 눈을 감고 민선우의 손에 완전히 얼굴을 기대며 답했다.
“네, 안 물어보더라고요.”
중얼거리듯 뱉은 말을 들은 녀석이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볼에서 손을 뗐다. 나도 눈을 떴다. 민선우는 마치 기다린 사람처럼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가자, 나비야.”
녀석의 차가운 손이 이번엔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나는 일방적으로 잡힌 손을 보면서 엉거주춤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도중 언뜻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멍청한 것들, 이라고 시니컬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으나 워낙 작은 소리였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열심히 걸어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왔다. 내가 자리를 비우기 전만 해도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던 제단 앞에는 상복을 차려입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