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182)화 (182/234)

182화


작은 음악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고통을 호소했다. 웬만하면 아픈 티를 내지 않는 아빠가 온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결국 진통제를 늘려달라고 했을 땐 심장이 철렁했다. 다행히 얼른 달려와 주신 간호사 선생님께서 진통제 링거의 양을 조절해 주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증이 좀 잡히는 것 같았다.

혈색이 좀 나아진 아빠가 너무 졸린다면서 침대를 내려달라고 말했다. 어제의 불안이 남은 나로선 아빠가 좀 더 오래 깨어있어 주길 바랐지만, 몸이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던 것을 봤기에 떼를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침대 등받이를 내리고, 이불을 정리해준 뒤 이미 비몽사몽인 아빠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안녕히 주무시라고 속삭였다. 이번엔 너무 오래 주무시지는 말라는 말까지 덧붙이고 나서 가만히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불을 켜야 할 만큼 병실이 어두워졌을 때, 동아줄처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일어났다.

드르륵.

“나오셨습니까. 팀장님께 바로 연락드리-”

“아뇨. 안 그러셔도 돼요.”

병실 문 인근에 서 있던 사내는 내가 나오자마자 인사를 하며 으레 그랬듯이 팀장님을 호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제 할아버지가 말한 떼어놓고 오라는 사람들은 분명 이들이었으므로, 어차피 동행할 생각이 없는데 헛걸음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내를 놔두고 할아버지라고 저장해놓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그래.

항상 대동하고 다니시는 비서의 번호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짧은 수화음 뒤에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할아버지였다. 나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며 말했다.

“지금 찾아뵈려고요.”

- 그래. 김 비서가 문자한 곳으로 오면 된다.

“...근데 문제가 좀 있어요. 어제, 떼어놓고 오라고 하셨잖아요. 지금 제가 사정이 좀 있어서 혼자 다니면 위험해서 같이 다녀주시는 분들이라서요. 이분들 없이 움직이긴 조금, 힘들어요.”

안에서 앉아 있는 동안 고민하고 정한 건데도 막상 말하려니 다소 민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도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는지 작게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렸다.

- 그래서?

“이분들이랑 동행하는 게 싫으시면, 죄송한데 할아버지께서 사람을 좀 보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 데려가실 분이요.”

묘하게 뻔뻔하고 당당한 요구에 할아버지는 한참을 뜸 들이다가 알겠다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뒤로 나는 당연히 최태혁에게 전화했다. 처음엔 강경하게 안 된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데리러 오고, 데려다줄 거라는 것과 가족이 관련된 일이므로 이것만은 존중해줬으면 한다는 내 고집에 못 이겨 조건부로 수락했다.

조건은 최태혁이 보낸 경호팀이 차에 탈 때까지와 내려서 병실에 오기까지의 길은 동행해야 한다는 것과 할아버지가 보낸 사람의 신변 조사를 허용할 것, 그리고 위치추적기를 지니고 있을 것이었다.

그 결과 할아버지가 보낸 사람들은 모두 경호팀장님에게 신분증을 보여줘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어느 커다란 저택의 거실에 서 있는 내 주머니엔 아주 조그만 위치추적기가 들어있는 상태였다.

“이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나는 남자가 가리키고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익숙한 얼굴이다 싶더니, 전에 할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찾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앉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어딘가로 걸어간 남자는 컵이 올라간 쟁반을 가지고 왔다. 따뜻한 차였다. 은은한 초록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아 녹차인 것 같았다.

최태혁의 집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못지않은 커다란 저택임에도 둘러볼 생각이 들지 않았던 나는, 탁자에 내려놓느라 파동이 이는 차의 표면만 보고 있었다. 그런 내 정수리에 할아버지의 질책이 꽂혔다.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사람을 붙이고 다녀?”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는 소리에도 들지 않던 고개를 들었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보였다.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죄송해요.”

내 덤덤한 거절에 할아버지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해도 말하기엔 너무 길고, 개인적인 사정을 다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나로선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얼마간 희한한 놈들한테 끌려다니더니 아주 당당히 사람을 요구하고 말이야. 쯧쯧, 뻔뻔한지고.”

할아버지가 혀를 차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나를 욕하는 소리는 익숙했다. 아빠의 곁을 떠나오면서부터 내 머릿속을 차지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자.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심한 말을 들어도 참을 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혀 차는 소리가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물었다.

“아빠가 부탁하신 게 뭔가요?”

그 질문을 들은 할아버지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말을 정리하시는 건가 싶어 기다리던 나는 생각보다 길어지는 침묵에 시간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할아버지.”

굳게 다물린 입은 내가 다시 한번 부르고 나서야 열렸다.

“재산.”

지금 뭐라고 하신 거야. 할아버지는 완벽한 무표정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명확한 발음의 짧은 단어는 당연히 아주 잘 들렸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네?”

되묻는 말에 할아버지는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고쳐 잡으셨다.

“재산이라고 했다.”

이번에도 못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아주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말로 의문이 해소되긴커녕 오히려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게 그놈이 내건 조건이었다. 네게 적당한 재산을 물려주는 것.”

“그게 무슨.....”

“그래, 말이 안 나오지? 내 아들 새끼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을 그놈이 아주 당당히도 요구할 땐 나도 기가 차 말문이 막혔다. 이게 다 모자란 자식놈을 둔 죄지, 내 죄야.”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설명을 요구하는 나를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그놈에게 나는 하나의 조건만 걸었어. 네 아비와 깔끔히 연을 끊을 것. 남의 자식과 내 돈에 기생하며 살던 놈이 감히 누구를 찾아온 건가 싶었지만, 그래, 그놈 꼴이 영 불쌍해서 딱 그거 하나 요구하고 원하는 대로 해줬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내 지팡이 끝이 바닥을 아주 세게 내리쳤다.

“그런데 그놈이 얼마 전에 아주 괘씸한 협박을 해오더구나. 다 죽어가는 마당에 무서울 것이 뭐 있겠냐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카메라 불법 설치나 사람을 시켜 감시하는 걸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그것도 안 되면 태훈이 자식에게 연락해서 계약이고 뭐고 무효가 되길 바라냐면서 되지도 않는 협박질을 하는 눈이 아주, 미친놈 같았어.”

나는 작게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물론 그런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은 내겐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암. 그런 것쯤이야 아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 그저 그놈 명줄만 깎아 먹는 일로 만들어줄 수 있다. 돈이란 게 그래서 좋은 거거든. 네 놈도 최근 어울려 다니는 놈들 보고 느끼는 바가 있을 것 아니냐. 그치?”

할아버지가 말하다 말고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귀에 들어오는 내용이 점점 더 버거워 숨이 가빠지던 찰나 받은 시선은 날카로웠다.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할아버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내렸다. 그리고 꼿꼿이 서 있던 등이 등받이에 닿는 것이 보였다.

“안 그래도 한때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던 놈, 그렇게 만드는 건 고민거리도 아니었어. 그런데 그놈이 그런 말을 하더구나.”

그 말을 끝으로 미미한 분노를 담고 있던 어조가 조금 변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내겐 책임이 있다고. 내 고집과 방관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까지 흔들었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덤덤한 듯 가라앉아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 늙어서 마음이 유해진 건지. 이상하게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더구나. 그래서 들어주기로 했다. 그놈의 협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네게 주어졌던 환경에 대한 동정심과 네가 달고 있는 내 성. 네 놈의 이름이 올라간 호적을 생각해서라도.”

거기까지 말한 할아버지가 어딘가로 눈짓했다. 조용한 발소리 뒤로 회사에서나 볼법한 결재 파일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파일을 가져온 것은 나를 안내해줬던 남자였다.

“재산을 주마. 내 핏줄도 아닌 놈한테 하게 될 줄은 몰랐다만,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약속한다.”

할아버지의 턱짓에 따라 남자가 결재 파일을 펼쳤다. 글자가 빼곡히 써진 종이 뭉치가 드러났다. 언뜻 봐도 하나하나 셀 수 있을 법한 두께는 아니었다.

나는 못이 박힌 듯 시선을 서류에 고정했다. 계약서. 종이 가장 위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주 간단한 조건만 이수하면, 그 순간부터 네 놈은 아마 평생 일해도 못 가질 만큼의 재산을 소유하게 될 거다.”

계약서에 적힌 대로라면, 할아버지가 내건 조건은 놀랍고 황당하게도 내가 할아버지의 눈에 차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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