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그 후로 간호사 선생님은 아빠가 어떤 말을 하든 맞다, 그렇다 맞장구만 치더니 나중에는 민망해 죽으려는 내가 재밌었는지 도리어 나서서 나를 추켜세웠다. 가끔 오시는 나이 지긋한 수간호사님이었으면 모르겠는데, 딱 봐도 연령대가 비슷해 보이는 선생님이 나를 보고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칭찬하는 걸 듣고 있자니 정말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칭찬 지옥은 다행히 간호사 선생님이 호출을 받고 나가면서 잠정 중단되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이 탈탈 털려 그대로 아빠 옆에 고꾸라져 누워버렸다.
“진호야.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뭘요.”
등 돌리고 누운 내 어깨를 쿡쿡 찌르는 손길에 어깨를 안으로 말아 웅크렸다. 웃음기 섞인 어투가 얄미워 대꾸도 퉁명스럽게 나갔다. 시작은 내 자존감을 올려주려는 거였는지 몰라도, 나중엔 아빠도 내 반응이 재밌어서 더 오버하는 것이 너무 티 났다. 간호사 선생님과 그렇게 음흉한 웃음을 주고받는데 모르는 게 바보지. 나는 차마 아빠에게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하고 혼자 구시렁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진호야, 삐졌어?”
이번에도 웃음이 담뿍 담긴 투였으나 아까와 달리 장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치사했다. 내가 아빠의 이런 말투와 섬세하게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는 것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이러는 것 같았다. 나는 이번엔 그 손을 피해 움직이지 않는 대신 더 고집스레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자 아빠가 더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
“삐지지 마, 진호야. 반응이 재밌어서 장난을 좀 치긴 했지만 그래도 다 진심이었어. 아빠가 너무 속상해서, 그래서 우리 진호 창피해하는 줄 알면서도 못 멈췄어.”
나는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그만큼 길게 콧김을 뿜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아빠는 나를 굉장히 아꼈다. 속된 말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처럼 대했다. 그나마 또래보다 작아서 조금은 귀여워 보일 수 있었던 어릴 때와 달리, 이제는 그저 징그럽게 큰 사내 녀석일 뿐인데 그는 내가 감히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열렬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 자존감 낮은 발언을 했으니 속상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무심을 가장해 툭, 그의 속상함을 덜어주기 위한 말을 했다.
“속상할 게 뭐가 있어요. 제가 뭐 막 못났다, 이런 뜻이 아니라 그냥 정말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었는데.”
“일반적인 기준이 뭔데?”
“네? 아니, 그.... 보통 일반적으로 그 사람이 얼마나 잘났는지 나누는 기준 있잖아요. 얼마나 잘생겼는지, 키랑 몸이랑 직장이나 재력도 있고, 음… 지식수준 같은 것도 있고요. 그런 기준들을 적용했을 때 저랑 형들을 비교하면 그 형들에게 제가 매력이 없을 것이다, 하는 말이었어요.”
저라는 사람이 막 모자란 사람이다, 그런 게 아니라요. 마지막 말은 진심이 아니었지만 혹여나 아빠가 또 속상해할까 봐 덧붙였다.
다행히 그 말이 적절한 완충작용을 한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누가 우리 애 기를 죽였냐며 외치는 학부모에 빙의한 듯했던 아빠는 한참을 아무 말없이 내 머리만 만져주었다.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이 두피를 스치고, 섬세하게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것을 느끼면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으려니 잠이 몰려올 것만 같았다.
노곤함에 점점 잠식되어 가던 내 정신을 잡아챈 것은 아빠의 부름이었다.
“진호야.”
“...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대답하려니 반 박자 정도 말이 늦게 나갔다. 아, 이러다 진짜 잠들겠는데. 나는 아직 먹지 못한 밥과 아빠가 날 불렀다는 것을 상기하며 살짝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열고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날 부른 아빠를 보기 위해 살짝 몸을 틀었다.
아빠는 내가 움직이자 머리를 만지고 있던 손을 떼었다가, 바로 누워 자기를 올려다보는 것을 보더니 다시 손을 뻗었다.
“사람이 사랑을 느끼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어. 네가 말한 그 일반적인 기준들이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도록 하는 요소들이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소리야.”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손과는 달리 아빠의 시선은 허공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감정이라는 건 한 번 생기면 사람을 비이성적, 비합리적, 비효율적으로 만들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말이야. 그 정도가 되면 모든 기준이 다 소용없어지고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만 보이는 순간이 와. 머리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그걸 인정해주지 않아서 바보 같아지는 순간.”
무언가를 떠올리는 중인지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를 한 아빠의 미소는 잔잔하면서도 씁쓸했다. 나는 그 미소를 가만히 보다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일부러 입을 삐죽이며 반박했다.
“우리는 그걸 콩깍지라고 부르기로 약속을 했어요. 그리고 콩깍지는 언젠가는 벗겨지게 되어 있고요.”
“풋- 맞아. 콩깍지. 그러네. 그 단어가 있었네. 근데 진호야, 쉬워 보이는 콩깍지가 한 천만 겹은 되어서, 아주 10년이고 20년이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벗겨지지 않는 사람들이 의외로 되게 많아.”
초점이 또렷하게 돌아온 아빠가 아까보다 밝아진 얼굴로 내 입술을 꾹 누르면서 말을 이었다.
“처음엔 네가 말한 요소들이 호감도를 올려줄 수는 있겠지. 그것들이 장벽은 낮춰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 이후는 진짜 그 사람 자체가 중요해. 그건 객관적인 게 없거든. 진짜 주관적인 거야. 이 사람이 이해가 되는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행복한가, 싸우더라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신뢰를 주는가.”
입술을 누른 손가락은 볼을 스치더니 내 눈가를 쓸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계속해서 콩깍지를 덧씌우는 거야. 처음엔 외모 때문에, 그 사람이 내게 해주는 물질적 선물 때문에, 설렘 때문에 생기던 콩깍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 자체의 매력과 됨됨이, 아주 사소한 행동과 같이한 시간 같은 걸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기도 하거든.”
그 말을 하고 나서 조금 머뭇거리던 아빠가 입술을 한번 질끈 깨물더니 피식 웃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기도 해. 아주 잘생기고 키 크고 공부도 운동도 다 잘하는 부잣집 도련님이,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데다 받기만 하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그런 일.”
나는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바로 알았다. 아빠는 지금 본인과 아버지를 얘기하고 있었다.
그에 내가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아빠의 얼굴을 살폈다. 감정이 풍부하게 드러나는 얼굴엔 의외로 아주 약간의 아련함만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나를 내려다보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아빠는 내게 코를 찡긋거렸다.
“거기다 우리 진호는 정말로, 정말 정말로 사랑스럽거든. 네 마음에는 차지 않을 수 있겠지만 아빠가 보기엔 강단 있는 눈도, 앙증맞은 코도, 투덜이 입도 정말 잘생겼는데!”
“하아.... 그건 아빠가 보기에만-”
“특히나 여기. 여기가 얼마나 예쁜데.”
또 시작된 부담스러운 칭찬 릴레이에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가 가슴께를 쿡쿡 찌르는 손에 눈을 떴다.
“아픈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있어도, 부당한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 탓하지 않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 뭐든 금방 용서해버리는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심성. 밝게 웃는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스러움.”
아빠의 손이 내 볼을 감쌌다.
“우리 진호는 누구에게라도 평생 벗겨지지 않을 정도의 콩깍지를 씌우고도 남을 그런 소중하고 예쁜 사람이야.”
부끄러워서 그런가, 눈이 뜨거웠다. 나는 코를 훌쩍대며 눈에 힘을 주었다. 아빠는 그런 나를 보고 일순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더니 남은 손까지 뻗어 내 양 볼을 확 꼬집었다.
“악-! 잠, 아파요!”
“그러니까 누가 너 좋아하는 것 같으면 에이 그럴 리 없어, 하는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말고 흥! 또 내 매력에 빠져버렸군! 이렇게 생각하란 말이야! 알았어?”
치사했다. 내가 자기를 밀치지 못할 것을 알고 정말 온 힘을 다해 볼을 꼬집는 손길이 제법 매서웠다. 나는 한 줌 같은 손목을 아주 약하게 툭툭 치면서 목소리만 높였다.
“아! 아프다고요!”
“알겠냐구?! 응? 알겠다고 말해! 매력이 아주 철철 넘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란 말이야! 에잇! 에잇!”
“알았어요! 아, 난 진짜 매력이 너무 넘친다아악!”
“진심을 담아서 하란 말이야, 진심을!”
아빠는 내가 자기가 말한 것들을 그대로 따라 할 때까지 볼을 놔주지 않았다. 볼이 너무 얼얼해서 흐른 눈물이 꽤 오랜 시간 동안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지만 우린 아무도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그렇게 깔깔거리고 난 후 떨어진 아빠가 모르는 척, 내 관자놀이를 손으로 훔쳐 주면서 말했다.
“그 형들은 좀 두고 보자. 우리 진호 하는 소리 들으니까 아직 영 마땅찮은 놈이 없는 것 같아. 조금 더 지켜보다가 너한테 제일 잘하는 사람을 선택해. 널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고 유리 인형처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 알겠지?”
“아니, 그러니까 제가 선택하고 말고 할 그런 위치가 아니라니까요.”
뭘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선택하래. 흐물거리는 마음 때문이지 나도 모르게 솔직한 마음을 투덜대는 내게 돌아온 것은 아주 기상천외한 발상이었다.
“그럼 선택하지 말고 다 가지던가! 우리 진호 다 해! 진호가 하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다 가져버려 그냥! 아빠가 허락할게! 우리 진호 다 줄게! ”
나는 그 실없는 소리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