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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177)화 (177/234)

177화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기보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나는 잔뜩 엉킨 실뭉치를 풀지 않고 그대로 잘라버리기로 한 순간부터 이 관계에 대한 이성적 사고를 놓아버렸다.

거기다 얼마 전, 그나마도 버티고 있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아주 세게 넘어버린 참이었다. 이런저런 상황과 정신적 불안에 기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내 몸에는 어제도 최태혁이 남긴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고, 기억에는 그들과 몸을 섞었던 순간들이 가득했다.

이 이상으로 비정상적일 수 없을 만큼 비틀어진 관계를, 정상적인 친애의 기준에 끼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죄악감에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아니지 김진호. 나 스스로까지 속이려고 하지는 말자.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작게 조소했다. 상황이든 뭐든 내가 벌인 일, 수습할 생각도, 벗어날 용기도 없는 새끼가 무슨 죄악감이야. 빈정거리는 소리가 양심을 찔렀다. 그래, 맞는 말이었다. 지금 내 말문을 막은 것은 비단 그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죄악감이 목을 조르는 것 같다면, 내 목소리를 앗아간 것은 회의감과 비참함이었다. 누가 제일 좋은지 깨달아봤자 내게 좋을 것이 하나 없는데 왜 그런 서글픈 짓을 해야 해. 짧은 유흥거리일 게 뻔한 그들의 사랑을 가늠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질문을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들과의 시간을 곱씹고 말았다는 비참함.

그게 정말이지 너무 엿 같아서, 나는 내가 들어도 어색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애써 부정했다.

“그런, 그런 관계가 아니라니까요. 제일 좋고 말고 할 사이가 아닌-”

“진호야.”

아빠는 내 이름을 부르며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로서는 매우 드문 행동이었다. 나를 빤히 주시하는 눈빛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렸다. 머쓱한 마음에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진짜 아닌데, 하고 중얼거렸으나 그 뒤에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마냥 아니라고만 해서는 이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한숨과 함께 어느 정도 솔직함을 담은 답을 건넸다.

“멋있죠. 형들이 되게 멋있는 건 맞는데요. 근데 진짜 그런 쪽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제가 감히 좋아한다고 잘 되고 뭐 그럴 만한 사람들도 아니고요. 어떻게 좀… 뭐라 그러지? 그냥, 생각보다는 잘 된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오래 갈 것 같지도 않고. 제가 그, 못 올라갈 나무는 아예 쳐다도 보지 말자는 주의라서....”

많은 것들이 생략되긴 했지만, 진심이었다. 문제는 내가 말을 이어갈수록 심상치 않아지는 아빠의 표정이었다. 그는 결국 내가 말을 흐리는 틈을 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주먹을 쥐고 침대를 치면서까지 내지른 호통 소리는 내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물릴 만큼 커다랬다. 병실 안을 쩌렁쩌렁 울린 것도 모자라 밖에까지 닿았는지 다급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드르륵, 다소 거칠게 문을 연 것은 경호팀장님과 간호사 선생님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그들은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와 콧김을 씩씩 뿜고 있는 아빠를 번갈아 보더니 동시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아무 일 없어 보이는데 왜 갑자기 소리는 지르고 그러신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문 아빠를 흘끗 본 후 경호팀장님과 간호사 선생님을 향해 머쓱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별일 아니에요! 잠깐 좀 흥분하셔서. 어, 팀장님은 신경 안 쓰셔도 될 것 같고, 혹시 저기, 간호사 선생님 아빠 혈압 좀 한 번 재 주실 수 있으실까요? 보시다시피 얼굴이 너무 좀, 붉어지셔가지고.”

양손을 내저어가면서 부정하는 나를 보던 간호사 선생님이 아빠의 얼굴을 한번 스윽 확인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데스크로 가셨다. 경호팀장님은 병실 안으로 몇 걸음 들어와 가볍게 안을 훑어보더니 내게 짧은 묵례를 하고 나갔다. 다시 돌아오실 간호사 선생님을 위해서인지 문을 조금 열어둔 채였다.

그리고 아빠는 그들이 나가자마자 아까보단 작지만, 여전히 흥분이 가득 담겨 커진 목소리로 내게 따지듯 말했다.

“감히라니. 왜 그게 감히야! 네가 뭐 어때서! 걔네들이 잘나면 뭐 얼마나 잘났다고 네가 좋아하는 게 감히가 되는데! 뭐? 못 올라갈 나무우-? 내가 보기엔 못 올라가긴커녕 좀 올라와달라고 엘리베이터 설치하고 레드카펫 깔아준 수준이고만, 그게 어딜 봐서 못 올라갈 나무야!”

“아, 아니 아빠. 그게 아니고요...!”

“웃기네 진짜. 이것들이 잘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우리 진호가 이런 생각이나 하게 만들고. 잘났으면 뭐 해. 어? 감히 우리 진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 뭐? 하! 참나. 모자란 놈들이 뭘 어떻게 했으면 우리 애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아빠는 침대를 주먹으로 퍽퍽 내려치면서 ‘이런 생각’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했다. 아무래도 내가 스스로를 낮춰 말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열린 문틈을 힐금거리면서 분기탱천한 아빠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 아빠. 일단 좀 진정하세요, 네? 그게 그, 형들이 저한테 뭘 했다거나 뭐, 말을 그런 식으로 했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요. 그냥 객관적으로!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렇다- 하는 뭐 그런 얘기였던...!”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내 말을 들은 아빠의 언성은 더 높아졌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뭐가! 우리 진호가 어때서! 네가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어? 감히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그렇게 스스로가 별거 아닌 사람처럼 생각하는 거냐고! 네가 얼마나-!”

똑똑똑.

“저어.... 실례합니다.”

나이스 타이밍. 간호사 선생님은 안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는지 문이 열려 있었음에도 굳이 노크를 하고 들어오셨다. 덕분에 아빠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물었다.

혈압 재는 동안 진정이 좀 되셨으면 좋겠는데. 도르륵 눈동자만 굴려 환자복 위로 벨트를 두르는 간호사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어색하게 하하, 하고 소리 내 웃었다. 그러자 선생님도 나를 보고 형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행히 혈압이 크게 오르지는 않았다. 혈압을 체크한 선생님이 벨트를 뗀 후 나갈 준비를 하는데, 그때까지도 잔뜩 화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던 아빠가 대뜸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우리 진호 어때요?”

“네, 크흠, 콜록, 콜록. 네?”

오 마이 갓. 나는 입을 떡 벌렸고, 간호사 선생님은 되묻다 사레가 들렸는지 연달아 기침을 했다. 저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야. 부디 농담이면 좋으련만, 당황과 혼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뒤통수가 딱할 정도로 아빠의 얼굴은 진지 그 자체였다.

“우리 진호 어떠냐고요. 선생님이 보시기에요.”

“어… 음.... 그... 좋, 좋은 청년… 이, 죠?”

나를 한번 돌아본 선생님은 물음표를 잔뜩 단 얼굴로 무난하게 답했다. 아빠의 얼굴이 조금 환해지는 것 같더니, 벨트를 동아줄처럼 잡고 있던 간호사 선생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죠? 우리 진호 선생님이 보기에도 되게 좋은 애죠? 짧게 봐도 그게 막 느껴지죠?”

“아, 그, 그럼요! 딱 봐도 엄청 좋은 청년인 것 같은 느낌이 막-”

“맞아요! 우리 진호가요, 이런저런 일을 많이 겪었는데도 얼마나 애가 바르고 착하게 컸는지....”

분위기를 읽은 센스 만점 간호사 선생님의 호들갑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아빠는 다른 의미로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누군가 들어오면 데면데면하게 굴던 태도를 잊은 듯이 볼에 홍조까지 띄워가며 나의 장점에 대한 칭찬 릴레이를 늘어놓았다.

별것 아닌 일에도 얼마나 금칠을 해주시는지. 민망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 볼도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보단 워낙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이라 차마 떨쳐내지도 못하고 붙잡혀있는 간호사 선생님을 구해드리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비척비척 힘없이 걸어가 두 사람의 사이에 서서 아빠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아빠, 간호사 선생님도 바쁘-”

하지만 말을 끝내 다 마치기도 전에 아빠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고 잡아당기더니 아주 자랑스럽게 외쳤다.

“거기다 우리 애가 진짜 생긴 것도 엄청 잘생겼잖아요!”

정적. 거짓말이 아니고, 과장도 아니고, 정말 정적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는 말에 멍하니 아빠를 보고, 간호사 선생님을 봤다. 잔뜩 신이 난 아빠는 침묵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듯했다. 아니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다든지. 그렇지 않은 이상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을 했을 리가 없었다.

“그죠? 간호사 선생님이 보기에도 우리 진호 엄! 청! 잘생겼죠?”

아 제발 아빠. 민망해서 내린 시선에 간호사 선생님의 그린 듯이 올라가 있는 입꼬리 한쪽이 부들거리는 것이 잡혔다.

“그, 그럼요. 진호 씨가 좀 잘생겼죠. 훈남이죠, 훈남!”

이젠 그냥 장단을 맞춰주기로 결심한 건지 간호사 선생님이 엄지를 치켜들고 힘차게 허공을 가르는 것이 보였다. 하.... 살다 살다 쥐구멍에 숨는 초능력을 바라는 날이 올 줄이야. 나는 결국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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