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혹시 근데 진호야. 저기, 이런 거 물어도 되나 싶긴 한데 걱정도 되고 그래서.”
오늘은 주말이라 아침부터 병실에 온 참이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바쁜 최태혁을 따라 꽤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어제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하고, 배달시킨 음식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음식들을 펼쳐 놓고 막 먹으려던 찰나, 아빠가 조심스레 폭탄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 형들 말이야. 혹시 남자 좋아하니?”
“...예?!”
다행히 음식을 입에 넣지 않은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뿜을 뻔했다. 나는 숟가락을 든 자세 그대로 굳은 채 되물었다. 겨우 한 글자였는데 그마저도 삑사리가 나면서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가 그대로 드러났다. 아빠는 그런 나를 보고 이미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음, 역시 그렇구나. 그랬어.”
뭔가 중요한 것을 깨달은 사람처럼 살짝 그러쥔 손을 입에 대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 영 불안했다. 중얼거리는 말도 영 께름칙한 것이 절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됐든 아니야. 그거 아니에요. 다급한 마음에 숟가락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면서 부정하는 말을 뱉었다.
“아니, 역시는 무슨 역시예요. 아빠 지금 무슨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죠?”
“이상한 생각이라니. 그런 거 아니야.”
말은 아니라면서 얼굴의 미소는 점점 음흉해지는 건 뭘까.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그냥, 네가 형들이랑 있었던 일을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좀 더 특별한 감정들이 오가는 것 같아서.”
“아니, 대체 어떤 점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딱 집어 어떤 점이라기보단... 전반에 걸쳐서? 특히 최근에 있었던 일들 들으면 의심할 여지도 없었는데. 그것도 완벽한 이성애자면 모를까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백퍼야, 진호야.”
그렇게 말하며 아빠는 나의 강한 부정이 오히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학 때부터 우리 진호한테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챙겨줬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매일같이 연락하면서 안부 묻고, 일상 공유하려고 하는 것만 해도 그런데. 진호 너, 얼마 전부턴 그 형들 집에서 돌아가면서 지내고 있다면서. 그게 그냥 아끼는 동생이라서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 확인 사살하듯 두 번 물어보며 나를 보는 얼굴엔 장난기 반, 순진한 아이를 보는 어른의 여유가 반씩 들어차 있었다. 나는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매번 말했던 변명을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그거는요 제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그래. 알아. 뭔지 저어어얼대 말 안 해주는 그 복잡한 사정 때문에 당장 집에 들어가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마음씨 착한 형들 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거. 아주 귀가 닳도록 들었으니까.”
몇 번이나 꼬치꼬치 캐묻는 걸 피했더니 앙금이 남았었나 보다. 두 손을 하늘로 펼쳐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과장된 제스처를 하는 모습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짧은 한숨만 연거푸 쉬었다.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거짓말들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뭐, 엄밀히 말하자면 아빠의 의심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 더 골치가 아팠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매우 두꺼운 철판을 깔면 친한 형 동생 사이라고 말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절대 아닌 것이 맞으니까. 누가 친하다고 그 짓을 하겠어.
그러나 여기서 아빠는 어쩜 그리 감이 날카롭냐고 박수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관계를 무슨 수로 설명해. 미치지 않고서야 못 하지.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제일 잘하는 연기, 바보같이 둔감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그 형들이 집에 돈도 많고 개인 스펙도 장난 아니라서 본인들도 돈이 되게 많아요. 집도 막 몇 채씩 가지고 있고, 누구 하나 먹여 살려도 전혀 티도 안 날 만큼이라 그냥 음, 어려운 동생에게 베푸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도와주고 있는 거죠. 다른 뜻은 없어요.”
“흐음....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이상한데. 그게 정말 진짜 친한 형으로서 하는 행동들이라고? 매일 별것도 아닌 일로 전화하고, 종일 뭐 했는지 물어보고, 바쁜 와중에도 시간 내서 보러 오고, 걱정된다고 사설 경호원을 붙여주는 게?”
빤히 바라봐오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서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아빠 앞에서 입이 너무 가벼웠다는 생각과 후회가 밀려왔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떨어져 가는 것이 초조해서 아무 이야기나 하고, 정말 친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라도 오는 전화를 피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저 행동의 주인공은 차례로 정새빈, 민선우, 쌍둥이들과 최태혁이었다. 정새빈은 최근 정말로 진짜 뭣도 아닌 일로 전화해서 내 대답을 듣고 끊어버리는 이상한 취미가 들었다. 오늘 배달 음식 받으러 가면서도 한 통 받았는데, 그때의 질문은 ‘알토가 좋아, 바리톤이 좋아?’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갑자기 전화해서 그걸 묻더니 며칠간의 경험으로 이미 지쳐버린 내가 ‘바리톤’이라고 아무 말이나 하니 ‘응’이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망할 놈이었다.
민선우는 매일 내가 뭘 했는지 아주 꼼꼼하고 집요하게 물어봤다. 아니, 사실 뭘 했는지 물어본다기보단 뭘 할건지 물어보고 정말 했는지를 체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가끔은 어떤 걸 하는 게 더 좋겠다고 제안하고, 자기 말대로 했는지 확인했다. 녀석의 조언은 삶에 꽤 유용해 보이거나 들어서 나쁠 게 없는 것들이었기에 대부분 수용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나는 녀석이 추천한 스타일로 옷을 입고, 알려준 음식점에서 골라준 메뉴를 주문해 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건 양반이었다. 쌍둥이는 차례로 아빠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을 넘어 내가 없을 때도 가끔 찾아와 상태를 살펴준다는 얘길 들었을 땐 속으로 뒷목을 잡았다. 물론 우연찮게 마주치면 병실 엘리베이터까지만 데려다주던 녀석들에게 안에 들어가 보고 가겠냐고 먼저 말한 것은 내가 맞았다. 그러나 나는 어디까지 아빠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인사만 시켜주려던 거였지, 서로 ‘풍선 크로스!’라고 외치면서 대통합하라고 소개한 것이 아니었다.
경호원은 말할 것도 없이, 너무나 명백히 최태혁이었다. 그냥 형이 형사 비스무리한 좀 위험한 일을 하는데, 내가 운 나쁘게 엮이는 바람에 도의 차원에서 그러는 거라고 얼버무리긴 했지만, 지금 말하는 것을 보면 그 변명도 썩 먹힌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면서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내가 사실은 한 번 죽었다 회귀했고, 회귀한 후에 또 죽긴 싫어서 친구를 구해냈던 다섯 명을 내 편으로 만들고자 별 생쇼를 다 했고. 그 결과 미친놈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긴 했는데, 그게 이상하게 발휘되어 저들끼리 승부욕이 달아 이상한 협약을 하는 바람에 나한테 열 올리고 있는 거라고 말할 용기는 당연히 없었다.
거기다 최근에 아빠의 친구이자 내 부모님인 사람들 때문에 너무 충격받아서 멀쩡한 집 놔두고 남의 집을 전전하며 살고 있고, 때마침 호시탐탐 내 몸을 노리고 있던 놈들이 내가 처한 상황과 애정 결핍, 현실도피를 하는 내 성격을 이용해서 드디어 나를 꿀꺽했고, 그게 퍽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이젠 정말 자기 거라는 인식이 도진 건지 전보다 더 미친 듯이 집착하고 잘해주는 상황이라고는 죽어도, 정말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손에 눌려 뭉개지는 발음 그대로 웅얼웅얼 똑같은 말만 했다.
“진짜 그런 거 아니에요.”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담겨 나간 힘없는 목소리 뒤로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대로 잠시 기다리던 나는, 더 추궁할 듯이 굴던 아빠가 조용한 것에 신경이 쓰여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가락을 슬쩍 벌려 틈을 만들었다.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손에 턱을 괴고 나를 보고 있었다. 잠시간 이어진 대치 후 눈을 한번 굴리더니 가벼움과 진중함, 그 사이정도 되는 투로 물었다.
“그럼 진호는?”
질문을 듣자마자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빠가 음식을 놔두느라 펼쳐 두었던 테이블 위의 접시를 옆의 협탁에 옮기더니, 테이블을 밀어서 넘기면서 노래하듯 말했다.
“다들 누가 봐도 매력적일 만큼 잘생겼고, 키 크고, 능력 좋아서 대학에서도 알아주는 인기인들이었다며. 그런 사람들이 우리 진호한테만 그렇게 오랜 시간 특별히 친절하고, 잘해주면 반할 만도 하잖아. 그 형들이 어떤지는 차치하고, 우리 진호는 어떤가 싶어서.”
구구절절 맞는 말 뒤에 따라붙은 당황스러운 호기심에 입술이 말랐다. 머리로는 당연히 아니라고, 아까보다 더 당당히 말해야 하지 않냐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이 말라서 그런가 싶어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사이 테이블을 치운 아빠는 무릎을 접어 끌어안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내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는 가볍게 웃었다.
“아니라는 말을 바로 못 하네, 우리 진호. 근데 맞다는 말도 안 하는 거 보면 음.... 진호야. 그럼 이건 어때. 지금까지 한 말은 일단 다 잊어버려. 이성적으로 호감이고 뭐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형으로서. 그냥 형으로서 생각하는 거야. 알았지?”
그렇게 말하면서 뾰족이 세운 무릎 위에 볼을 기대는 아빠는 첫사랑 이야기에 들뜬 학생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의 첫사랑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어른 같기도 했다.
“그냥 형으로서, 진호는 어떤 형이 제일 좋아?”
그렇게 어른과 아이를 넘나드는 묘한 분위기를 하고 던진 질문은 아주 깊숙이 허를 찌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