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175)화 (175/234)

175화

“형, 저 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크게 외쳤더니 집 안에 소리가 울렸다. 경호팀장님이 대문 앞에서 인사만 하고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형이 있는 게 분명한데, 신발을 다 벗고 집에 들어설 때까지 아무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요 며칠간 퇴근하고 아빠에게 가 있느라 내가 더 늦게 들어올 때마다 현관에서 바로 보이는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렸던 것에 그새 익숙해졌던 건지, 그 침묵이 영 어색하고 싫었다.

“형! 저 왔다고요!”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쳤는데도 집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결국 현관에 서 있던 것을 그만두고 인상을 찌푸린 채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여기저기 고개를 돌려가면서 확인해도 최태혁은커녕 평소 집에 있던 남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궐 같은 집이라 그런지 유독 더 휑해 보이는 모습에 덩달아 내 가슴도 휑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발끝에 걸리는 계단을 느끼고 어느새 눈앞에 있는 계단을 따라 2층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미적미적 2층으로 올라가는데 어쩐지 다리가 무거웠다. 중간쯤 올라온 계단에서 보니 1층 거실이 더 넓고 적막해 보였다.

지잉.

때마침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누구지.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연락을 주고받던 몇 명을 떠올리면서 나머지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내 패턴을 푸려는데, 귀에 어떤 소리가 잡혔다. 희미하게 들리는 물소리.

“아 뭐야.”

먼저 씻고 있었나 보네. 안도하고 보니 내가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었는지가 느껴졌다. 불안해하다니.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는 게 뭐라고. 순간 외로움을 느꼈다는 것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동안 나 혼자 있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긴 했지. 정새빈은 나랑 말 그대로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았고, 쌍둥이는 곁에 있든 없든 언제나 옆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최태혁은 자기가 없을 땐 사람을 붙여놨기 때문에 혼자가 될 수가 없는 상태였고 말이다.

물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을 찾아 걸음을 옮기면서 무심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보통 이럴 때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이 생겼다고 좋아하려나? 근데 나는 왜 이렇게 이게 싫고 불편하지.

그 집으로, 한때는 죽음이 다가올 것임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곳인데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다.

지잉, 지잉.

손에 쥐고 있기만 했던 핸드폰이 확인을 재촉하듯 몇 번 더 진동했다. 나는 문고리를 잡으려고 올렸던 손을 내리고 몸을 돌려 주르르, 등을 문에 기댄 채 그대로 무릎을 세우고 주저앉았다. 진동을 느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연락이 와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들어간 것은 당연히 아빠와의 대화창이었다.

[진호야 집에 잘 들어갔어?]

[잘 들어간 거야?]

[집인 거지?]

집에 도착했다고 보낸 메시지 뒤로 잘 들어갔냐는 확인 문자가 와 있었다. 경호를 받는 것에 대해 물어서 본의 아니게 어떤 사람들로부터 노려지고 있다는 말을 한 뒤로, 집에 완전히 도착해 안전하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안달을 내셨다. 글자에서 요 며칠 새 익숙해진 아빠의 말투와 표정들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나는 방금 전까지 혼자 청승을 떨고 있었던 것도 잊고 피식거리면서 잘 도착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답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잠시 답장을 기다리다가 1이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시간을 확인했다. 진통제를 맞고 주무실 시간이었다.

나는 대화창을 띄워 놓은 화면을 엄지로 두 번 정도 쓸어내리고 나서 다른 연락을 확인하기 위해 이전 화면으로 돌아갔다. 예령이를 이어 민선우, 정새빈, 남궁 후와 호. 그 뒤로 동창회에서 만난 후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 두 명과 몇 개의 광고 문자들까지 늘어져 옆에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진 목록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신기했다. 내가 기억하는 친구 목록에는 공짜로 뭔가를 받기 위해 가입하고 구독한 곳에서 오는 스팸 문자들과 예령이밖에 없었다. 언뜻 봐도 상표로 가득한 프로필 사이 살아있는 사람은 예령이 딱 한 명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스팸 문자도 얼마 없을뿐더러, 목록의 상단을 차지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아, 진짜 많은 것들이 바뀌었구나. 새삼 실감이 났다. 그래, 이러니까-

달칵.

“어어-”

생각을 방해하는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젖혔다. 동시에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기 위해 등을 바로 세워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문자에 답하느라 양손에 핸드폰을 준 자세 몸이 뒤로 기우뚱 기울었다. 하필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라 머리를 바닥에 찧을 거란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무언가가 몸을 지탱해주었다. 슬쩍 실눈을 뜨니 저 위에 눈썹을 잔뜩 휜 최태혁의 얼굴이 보였다.

“하하, 다 씻으셨어요?”

뭔가 민망해서 허허롭게 웃으면서 말을 건네자마자 녀석이 모로 기울어져 있던 고개가 절레절레 좌우로 저어졌다. 왠지 후- 하는 한숨 속에 멀쩡한 방 놔두고 왜 방문 앞에서 이러고 있냐는 질책이 섞인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이제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경지에 들어버린 건가- 싶어 조금 뿌듯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같이 한숨을 쉬는 나에게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최태혁은 내 겨드랑이 밑을 잡고 무를 뽑듯 내 몸을 쑥 들어 올렸다. 갑자기 쑥 올라간 시야가 얼떨떨하고 조금은 재밌기도 해서 괜히 헤헤, 하고 실없이 웃었다. 그러자 뒤에서도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태혁이 가볍게 실소할 때 나는 소리였다. 녀석이 내 어깨를 잡고 방안으로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 없이 끌려가면서 확인한 얼굴엔 확실히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나는 녀석이 입은 실내용 가운을 힐긋 확인하고 녀석을 향해 물었다.

“오늘은 왜 거실에 안 있으셨어요?”

내가 듣기에도 뭔가 묘하게 투정과 추궁이 섞인 투가 민망했다. 수습을 해야 하나. 습관처럼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면서 최태혁의 표정을 살피려고 살짝 곁눈질을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나를 향해 있었던 파란 눈동자에 딱 걸려버렸다.

“뭐가 좀 묻어서.”

담백한 말투와는 달리 녀석의 한쪽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그 얼굴이 왜 ‘내 똥강아지가 주인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던 모양이지?’하는 말을 하는 것 같지.

착각이겠지? 진짜 너무 얄미운데. 말하지 않아도 이 정도로 말이 들리는 지경이면 이거 거의 부부 아니냐, 우리.

순간 앞치마를 두른 최태혁이 여보, 오셨어요- 하면서 현관에 나와 반기는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진짜 토할 뻔.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상상을 흐트러트리고 나를 향해 이건 또 무슨 지랄이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최태혁을 향해 아무 말이나 던졌다.

“뭐가 묻었길래 온 방 안에 김이 모락모락 할 때까지 씻으셨어요?”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하고 보니 나도 씻고 싶어졌다. 잠옷을 챙기기 위해 옷장으로 걸어가면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하려나 싶어 녀석의 얼굴을 한 번 확인했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이 무심하게 답했다.

“있다. 잘 안 지워지는 거.”

“잘 안 지는 게 뭐 있지. 김칫국물? 김치찌개 같은 거 먹다가 쏟았어요?”

“뭐… 비슷해.”

녀석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면 오자마자 씻은 것이 이해가 갔다. 근데 바로 씻고 싶을 정도로 쏟은 거면 옷에도 묻어서 방에 냄새가 나야 하는 거 아닌가? 잠옷과 속옷을 품에 안아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코를 킁킁대봐도 바디워시 향밖에 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서 인상을 찌푸리는데, 느닷없이 턱, 하니 뒷목이 잡혔다. 당연하게도 최태혁이었다.

“옷은 네가 오기 전에 처분했으니 쓸데없는 거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씻고 와.”

“아, 아파요! 알았어요. 씻으러 갈게요! 알아서 간다고요!”

녀석은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놓아주지 않고 그대로 욕실을 향해 밀었다. 확 느껴지는 온기와 함께 자유가 된 목을 한 손으로 주무르며 녀석을 째려봤다. 진짜 힘만 드럽게 센 놈 같으니라고. 차마 뱉을 용기는 없는 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내가 째려본다고 깨갱할 리가 없는 녀석은 씩씩거리는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까분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엉망이 되었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렸다. 최태혁은 이번엔 내 볼을 한번 톡 치더니 돌아섰다. 그리고 욕실 문이 막 닫히기 전 툭, 하고 뱉듯이 말했다.

“형 방에 있으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씻고 나와.”

녀석답지 않게 조금 장난기 섞인 말투였다. 잠시간 욕실에 내려앉은 정적 뒤로 점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녀석 들으란 듯이 크게 소리쳤다.

“안 불안해하거든요!”

그리고 나서도 멋대로 차오르는 안도감을 외면하기 위해 샤워하는 동안 내내 쿵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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