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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173)화 (173/234)

173화

그의 다정함이 동정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 다정함은 얼마 되지 않는 소중하고 따뜻한 기억들이라서, 그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선택하는 단어가, 그의 표정이, 나를 향한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다정함은 내가 원하던 애정이었음을. 가족애였음을. 그제서야 나는 내가 그를 찾아와 확인하고 싶어 하던 게 무언인지 깨달았다.

당신은 나를 사랑했나요? 그래도 당신은 나를 사랑했어요? 차마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뒀던 질문은 내가 꺼내기도 전에 답을 받았다. 그게 너무 벅차고도 따뜻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번호가, 바뀌어 있어서. 그래서 이렇게 찾아와도 되나, 싫어하시진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근데 그래도 꼭 한 번은 뵙고 싶어서. 그래서 찾아왔어요. 묻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근데 그런 것보다도 그냥. 그냥 또 보고 싶어서요. 이번엔 꼭. 꼭.”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은. 마지막 그 말을 삼키면서 품이 한참 남을 정도로 가느다란 몸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부서질 것같이 가느다란 몸에 마음이 아렸다. 그는 내 등을 토닥이며 하하, 웃음소리를 냈다.

“그랬구나. 왜 그렇게 생각했어. 진호는 언제든 환영인데. 이렇게 찾아와줘서 내가 지금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데.”

그가 코를 훌쩍였다. 그의 턱이 닿아있는 어깻죽지가 젖어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가 또 한 번 코를 훌쩍이더니, 토닥이던 손으로 이번엔 등을 잔잔히 쓸어내리며 말했다.

“번호는, 진호야. 왜 바꿨냐면.”

그는 다음 말을 아주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결정을 내려서야.”

내 어깨를 잡고 밀어내는 힘에 저항 없이 밀려 나와 마주한 그는 쓰게 웃고 있었다.

“내가, 이젠 끝을 내려고. 그러려고 나야말로 염치없지만 네 할아버지에게 연락을 드렸거든.”

끝. 그가 말하는 끝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죽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끝을 내야겠다는 결정. 할아버지. 바꾼 이름과 연락처. 몸에 힘이 풀려 조금 띄우고 있던 엉덩이를 털썩 침대에 뭉갰다.

그래, 그랬다. 아버지라면 그를 절대 호스피스 병동에 데려오지 않았을 테다. 여기는,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오는 곳이니까. 설령 그가 원했을지라도 아버지라면 절대로 이곳을 허락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지금 있는 연락처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고, 회장님과 연락할 일이 있을 때를 위해 만들어놓은 거라 아무도 몰라. 조건이 있어서 네게도 알리지 못했고. 사실 네가 그거 때문에 불안해할 걸 알았으면 조건이고 뭐고 알려주는 건데, 음. 나를, 보고 싶어 해줄 줄은 미처 몰랐어.”

나를 싫어하는 게 더 말이 되는 상황이니까. 그가 미간을 긁으며 하는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걸 본 그가 손을 뻗어 내 볼을 감쌌다.

“이런 말 하면 좀 어이없을 수도 있는데. 진호가 우는 거 봐서, 좀 마음이 놓인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조심조심 눈가를 쓸었다. 나는 내 볼을 보느라 조금 내려간 그의 눈동자를 보며 코 막힌 소리로 물었다.

“갑자기요?”

다소 불퉁하게 나간 질문에 그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키득거리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너무 안 울어서 걱정했거든. 아플 텐데, 힘들 텐데. 못나고 이기적인 어른들 때문에 네가 많이 상처받았을 텐데도 안 울어서. 아니, 못 울어서. 우리 중엔 네가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사람이 없구나. 그 작은 몸에 다 꾹꾹 눌러 담으면 탈이 날 텐데. 그러지 않았으면 했거든.”

말이 이어질수록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다 그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미안해, 진호야. 이 말도 너무 많이 하면 네가 불편하니까 참아야 하는 거 아는데. 자꾸 말하게 되네. 미안.”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그를 가만히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괜찮다는 말은 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았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뭔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반쯤 충동적으로 말했다.

“아빠라고 불러도 돼요?”

그의 숨소리가 멈췄다. 그게 걱정이 되어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휘둥그렇게 뜬 눈이 보였다. 나는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기 싫어서요. 삼촌은 너무 멀고, 엄마 할 성별은 아니니까. 남은 가족은 그거 하나라서. 아빠라고 부르면 안 돼요?”

눈물이 고여 흐릿해진 시야로 그가 손을 들어 입을 가리는 것이 보였다.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나를 살피던 그는 별안간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고맙고 미안해, 진호야. 정말, 정말이야.”

그는. 아니, 아빠...는. 기도하는 것처럼 모아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온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나는 머뭇머뭇 날개뼈가 도드라진 등에 손을 얹고 그가 나에게 해줬던 것처럼 아주 살살 쓸어내렸다.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찬 바람을 쐬고 싶어서 굳이 경호팀장님을 설득해서 걸어 나와 바깥 공기를 마시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죽었던 그날보다 더, 잊지 못할 것 같을 정도로 커다랗고 벅찬 날이었다.

나는 무심결에 배를 쓸고 있던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병원을 올려다봤다.

‘내일도 올게요.’

그 말에 활짝 웃어주었던 얼굴이 불 켜진 병원 창문 위로 어른거렸다. 그러나 그 잔상은 뒤에서 들리는 내 이름에 금세 흩어졌다.

“진호야.”

최태혁. 한껏 치켜들었던 고개를 그대로 옆으로 돌린 곳에 녀석이 서 있었다. 오늘도 아주 세련된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모습이 오늘따라 더 듬직해 보였다. 나는 비스듬히 보던 고개를 바로 하고 녀석이 서 있는 곳을 향해 섰다.

“형.”

나는 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녀석을 불렀다. 근데 막상 부르고 보니 목이 울렁거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울컥, 감정이 치솟아 입을 앙다물고 버텼지만, 내 앞에 온 녀석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쓸어 올려주는 순간 터지고 말았다.

“나, 오늘. 오늘, 아빠 생겼어요. 아빠가, 가족이. 진짜 나를 사랑해주는,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해주는. 그런 사람이 생겼어요. 나도 이제, 가족이 있어요, 형. 더는, 더는 혼자가 아니에요. 혼자가 아니었대요.”

너무 기뻐서 웃음이 났다. 그와 동시에 아까 손에 만져진 몸이 너무 뼈투성이라서 눈물이 났다. 좋은 날이라 벅찰 만큼 기뻤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을 가늠하면 어김없이 눈물이 났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는데. 그렇게 행동으로 보여줬는데. 나는 허상 같은 엄마를 놓지 못하고, 차갑기만 한 아버지를 포기하지 못해서 배척하느라 흘려버린 시간이 아까워 눈물이 났다.

“가장 먼저 해야 했어요. 그게 가장 먼저였어요. 나는 또 쓸데없는 거에 정신이 팔려서. 죽는 거, 그깟 게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아니, 무섭더라도 이럴 줄 알았으면 아빠 먼저 찾았을 거예요. 아빠가 생길 줄 몰랐어요. 나는, 동정인 줄로만 알고. 그래도 그게 너무 감사해서. 빈말이어도 그냥, 그냥 좋은 말 한마디 듣고 싶어서.”

최태혁은 복받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녀석에게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강아지 패턴의 아주 귀여운 손수건이었다.

“어...?”

갑자기 등장한 발랄한 손수건이 너무 황당해서, 순간 울음도 멈추고 멍하니 녀석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최태혁은 보란 듯이 팡, 하고 손수건을 세게 털어 펼치더니 내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내 강아지가 워낙 울보라서. 하나 장만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을 듣고 정확히 삼 초 뒤. 나는 뿌에에엥-하는 웃긴 소리를 내면서 또 울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이상한 소리였냐면, 내가 그 소리를 내자마자 그 최태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을 정도였다.

“이런 소린 또 어떻게 내는 건지.”

녀석이 큭큭대면서 하는 소리에 째릿 눈을 흘기던 나는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조심스레 눈가를 닦아주는 손길이 너무 다정했다. 진짜 재수 없는 건지, 멋있는 건지, 무서운 건지 잘 모르겠는 이상한 새끼. 아니, 이상한 새끼들.

너네가 자꾸 이렇게, 내가 힘들 때, 고민될 때, 슬플 때 같이 있어 주면 나는 기대하게 된단 말이야. 이게 진심일 수도 있다고, 나 같은 게 진짜 너희에게 소중해졌다고, 지금 잠깐이 아니라 어쩌면 계속,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소중하게 여겨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단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눈을 들어 본 최태혁은 두 번째 손수건을 꺼내 펼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녀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강아지가 잔뜩 그려진 귀여운 손수건이어서 나는 한숨과 함께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그랬다가 아닌 걸 알게 되면, 그럼 너무 아플 것 같단 말이야.

최태혁에게 들렸을까 걱정도 되지 않을 만큼, 아주 작고 힘없는 혼잣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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