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아.... 그날이....”
여기 오기 전에 떠올렸던 그와의 첫 만남이 그렇게 이뤄졌던 거구나. 반쯤은 놀라서, 반쯤은 그저 반사적으로 내뱉은 깨달음을 흘렸다. 그는 그런 내 탄식 같은 말에 움찔 몸을 떨더니, 아랫입술을 깨물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나를 보는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하는구나.”
부들거리는 입꼬리처럼 아주 가느다란 중얼거림이었다.
“그래, 그날 우리가 처음 인사를 했었지? 많이 놀라고 또, 이상… 했을 텐데 그런 내색을 하나도 하지 않고 오히려 먼저 인사하러 다가와 줘서 얼마나.... 얼마나....”
그는 그 대목에서 이를 악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신중하게 고르는 것 같기도, 나오려는 말을 참으려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점점 더 붉어지는 눈시울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했다.
그러다 그가 별안간 픽 웃으며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하… 나 진짜, 왜. 왜 고, 맙다는 말밖에 생각이 안 나지, 왜? 미안해. 생각나는 말이, 왜 고맙다는, 그런. 그런 말 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나는 왜 이렇게 말을 못 할까. 미안해. 기분 나쁘지. 그 상황에 네가 무슨 느낌이었을지 알지도 못하고, 가해자였던 주제에 고맙다고 하다니. 하. 진짜 나도, 난 진짜.”
고맙다는 말이 그의 어딘가를 자극한 걸까. 그는 고맙다는 말 뒤에 아주 긴 자책을 내뱉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나를 마주하고도 내내 덤덤했던 그였다. 그러나 자기가 방금 내뱉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급격히 무너져내리는 모습에 나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우리 진호가, 아니. 진호가. 진호는 그때도 너무 착하고 어른스러운 아이라서. 그래서 그날도 내가 그렇게, 그렇게 추태를 부렸는데도 가만히 서서 기다려준 거. 나도, 나도 기억해. 미안해. 그걸 고맙다고 생각해서. 아저씨가 진짜 미안해.”
눈을 가리고 있는 손 아래로 너무 많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흐느낌조차 견뎌내지 못할 만큼 약해진 몸은 앞으로 고꾸라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일단 달래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알겠는데. 저는 괜찮으니까 진정하세요. 그 짧은 한마디가 뭐라고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내 목을 막고 있는 것이 울지 말자는 다짐일까, 케케묵은 원망일까.
그렇게 아무 말도, 그렇다고 어떤 행동도 못 하고 얼어 있는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내가, 내가 너무 갑자기 그랬지. 핑계로 들릴 건 아는데, 지금 내가 상태가 이래서. 그래서 감정 조절이 잘, 안 될 때가 있어. 미안해. 이것도 핑계인데. 자꾸 아픈 걸로.... 이제 이야기할게. 미안. 잠깐만. 그러니까, 우리가 그때 처음 만나고. 내가, 우.... 진호를. 진호를 처음 만나고.”
그는 자책하면서 세수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뭉갰다. 보는 내가 다 아플 지경으로 거친 손길이었다. 세게 문지른 탓에 눈물 자국이 지워진 그의 살갗이 온통 붉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뱉은 단어는, 파양이었다.
“파양하라고 했어. 내가, 진호 너를 파양하자고. 미안해. 진호 네가 싫었던 게 아니야. 네가 뭘 잘못한 게 아니라, 그 둘이 잘못하고 있었으니까. 둘은, 둘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었으니까. 그 또한 네게 상처가 될 걸 알면서도, 그래도 그 둘에게 아이는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의 말을 받아친 것은 엄마였다고 했다. 네가 보육원의 사정을 아냐고. 엄마는 이편이 나에게도 훨씬 좋은 환경이 주어지는 거라며 강하게 주장한 모양이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한참이나 입술만 달싹였다. 엄마가 그때 당시 했던 말들을 걸러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했길래 그랬을까. 나와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다던 엄마가 할 말을 곰곰이 예상해보았다. 지원 들어온 물품을 경쟁하듯 나눠 가져야 하는 환경? 선생님들의 애정 한자락 더 받기 위해 애교든 반항이든 눈에 띄는 행동을 하려고 안달 난 아이들? 그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나 같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큰 애들.
‘환경’만 두고 봤을 땐 설득할 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중에 뭘 말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그에 지지 않고 파양을 주장했으나, 지금까지 계속 그랬듯 두 사람에게 진 것 같았다. 나는 파양 당한 기억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이어서, 나는 일부러 진호 너를 만나지 않았어. 엄마 소리를 그렇게 예쁜 얼굴로 하는 애를 파양하자고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면목이 없기도 하고, 또, 사실 그렇잖아. 엄마 아빠라면 몰라도 부모님 친구 아저씨를 만나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으니까.”
네가 싫었던 것은 절대 아니라고, 그가 다급하게 덧붙이는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보면 첫 만남이 이후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가 맞았다. 그게 그래서였구나. 그 정도의 수긍이었다.
그는 그런 나를 보고 입을 이를 악문 채 작게 웃더니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게 지금 생각하면 또 다른 형태의 방관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그걸 몰랐어. 아니, 문제가 커질수록 외면하려고 하는 나약한 정신력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 아니, 그랬어. 아프다는 걸 핑계로. 자기 연민에 빠져서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합리화했어.”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그는 인정했다고 했다. 그 둘에겐 그가 하는 말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그의 죄책감은 원망과 분노로 변화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도망을 갔다고 했다.
픽 새어 나온 자조적인 미소가 그 ‘도망’이라는 단어 하나에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지만, 그는 그저 그 모든 것이 실패했다는 말로 그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쩌면 그 자신도 죽고 싶지 않은 마음에 완벽히 도망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읊조렸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창문을 보던 시선을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그러다 어느 날, 병원에서 너를 봤어. 그날도 나는 항암치료를 하기 위해 병원에 갔었는데, 로비에서 익숙한 어린이 하나가 엄청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더라고. 근데 혼자였어. 지금은 이렇게 훤칠하지만 진호 네가 어렸을 땐 조금, 작았잖아.”
그 작은 아이가 혼자 위풍당당하게 걷고 있는 게 귀엽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쫓아가고 있더라고. 그 당시 나의 키를 가늠하는 듯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면서 그는 옛날같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의 순간, 그의 입꼬리는 다시 허물어져 내렸다.
“그때 알았어. 네가, 아프다는 거. 그 큰 병원을 그 작은 애가 혼자서도 익숙하게 걸어갔던 이유까지. 그제서야 알았어. 어렴풋이, 어렴풋이 불안해하고 있었으면서. 그렇게 얘기하는데도 데리고 있는 거니까. 그러니까 잘하고 있을 거라고. 또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나는.”
그의 손이 이불을 잡은 채 주먹을 쥐었다. 그의 말은 군데군데 생략되어 있었으나, 그 상황 속에 있었던 나에겐 그 생략된 부분들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아이를 잘 돌보고 있을까 불안해하면서도, 파양하라는 그의 말까지 부정하면서 데리고 있었던 그들이니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병원을 혼자 다니는 것에 익숙해 보이는 나를 두고 그는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그래서 만나러 갔어. 만나러 갔는데, 근데 네 방이. 네 방이 너무 깨끗하더라. 네 엄마, 가 워낙 깔끔한 사람인 걸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너무 깨끗해서. 하얗고 깨끗한 게 음.... 내가 보기엔 너무, 아니더라고.”
한참을 말을 고르던 그가 한숨처럼 아이 방은 좀 더 시끌벅적한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숨처럼 내뱉었다. 그러면서 주제 넘는다는 생각인 걸 알지만, 그때까지도 긴장을 버리지 못한 너를 웃겨주고 싶었다고,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웃었다.
둘에게 몇 번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워낙 고집이 드센 두 사람은 노력하는 것 같다가도 그 성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보여서, 진호 너를 웃겨줄 사람은 본인밖에 없을 것 같았다고. 감히 그렇게 생각했다고 말하며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처음 내가 웃는 것을 본 날, 그는 그날을 기억한다고 했다.
“아직도 생생해. 이상한 아저씨가 친한 척하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작고 귀여운 진호가 처음 웃어줬던 날. 내가 가장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흥얼거리는 뒷모습을 보면서 했던 생각들. 장면 하나, 하나 다. 다 기억나.”
그 뒤로 그는 파양을 입에 담지 못했다고 했다. 그것 또한 미안하다고. 그는 파양을 입에 담아 미안했고, 또 그걸 말하지 못하게 되어 미안했다고. 그렇지만 이상하게 어린 내가 마음에 와 박혀 보내줄 수가 없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원래도 아이를 좋아했지만, 그중에서 나는 유독 더 예쁘고 사랑스러웠다고 잔뜩 붉어진 눈을 하고서도 웃으며 얘기하는 얼굴을 마주하고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를 꽉 악물었다. 그러나 볼 위로 삼키지 못한 눈물방울들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