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그는 기어코 나에게서 알겠다는 대답을 이끌어내더니 물었다.
“아주 자세하게 말해줄 수도, 정말 간결하게 말해줄 수도 있어. 후자가 쓸데없는 사견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그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 네가 여기에 오기까지 했던 결심을 허무하게 만들게 될까 봐. 진호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처음에는 내 눈을 마주하는 것도 힘들어했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에는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듯한 그 모습이 부담스러웠지만, 나 또한 묘한 감정에 휩싸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자세히 듣고 싶어요. 사견이 들어가도 좋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집 근처에 보육원이 있었어.”
그의 이야기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엄마는 그의 집 근처에 있던 보육원에 살던 여자아이였다. 일반 가정집과 비슷하게 꾸며져 있는 그곳이 보육원이라는 사실을, 어린아이들은 몰랐기에 당연히 그도 처음엔 몰랐다고 했다. 아이들이 혹시나 고아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조금 떨어진 학교에 다니는 엄마와, 가장 가까운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원래라면 친해질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워낙 오지랖이 넘쳤던 그의 성격으로 인해 골목길에서 한두 번 마주쳤던 엄마와 그는 어느새 매일 만나서 놀 정도로 친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서로의 사정을 잘 알게 되었으나, 그런 건 그들에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들의 관계는 성장할수록 더 끈끈해졌다. 그에게 엄마는 조금 이기적이고 기분파지만 예쁘고 귀여운 여동생이었고, 엄마에게 그는 바보에 약골이지만 유일하게 자기편인 남동생이었다. 그는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부모님과 맞벌이로 바빠 하루에 한두 마디 하는 것이 다인 부모님을 대신해 서로를 많이 의지했다고 했다. 둘 다 서로를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엔 짙은 그리움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너무 희미에서 자세히 보고 있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미소는 입가를 거칠게 문지르는 손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절레절레 흔들리는 고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사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겠다는 그의 다짐이 드러났다. 잠깐 감정을 추스르는 듯해 보이던 그는, 이번엔 아버지와의 만남을 말해주었다.
“태훈이는 내 옆자리였어.”
고등학교 입학 후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간 교실, 칠판에 쓰여 있던 번호를 찾아간 자리 옆에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냉정해 보이는 얼굴에 커다란 덩치까지 더해 말 걸기 무서웠던 그 친구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가장 친한 친구가 되더니, 1년이 가기 전에 그의 성향을 일깨워주는 짝사랑 상대가 되었다.
그는 처음 그의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아버지와 거리를 두려고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시도는 번번이 아버지로 인해 실패했고, 결국 욱하는 마음에 뱉은 고백은 그들이 연인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믿기지 않았지만, 그와 아버지는 같은 학교 학생들도 의심을 넘어 공식 커플이라고 공공연히 인정할 정도로 단 한 번도 싸우지도 않는 연애를 했다.
이때쯤 그는 아버지에게 엄마를 소개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두 명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리고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괴감 어린 말을 하고 그는 또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졌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목을 마찬가지로 뼈에 살가죽만 붙어있는 모양새의 손으로 주무르며 허공을 향하는 눈동자가 헛헛했다.
“처음에 둘은 잘 지내지 못했어.”
그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함과 동시에 이야기가 이어졌다.
엄마와 아버지의 성격은 마치 상극과 같았다고 했다. 그래도 둘만 있을 때는 그럭저럭 무시하면서 지내는 것 같았지만, 그와 함께 셋이서 있을 때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싸웠다고 했다. 특히 몸이 약한 그의 컨디션이 나빠질 땐 서로를 탓하고 간호할 사람을 정하느라 살벌하게 대치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래도 그게 나쁘진 않았어. 둘이 그렇게 싸우더라도 진심은 아닌 걸 알았으니까. 그게 그대로만 이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근데 그렇게 지내던 나에게 갑자기 불행이 닥쳤어.”
그중에도 커다란 두 가지의 불행은, 그의 일상과 더불어 세 사람의 관계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울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일자로 만들어 침을 삼키던 그가 황급히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한 방울의 눈물이 턱 끝에 맺힐 때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사고로 사망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연이어 알게 된 그의 병. 얄궂게도 장례식장에서 쓰러진 그가 걱정되어 아버지와 엄마가 반강제적으로 받게 만든 건강검진에서 그는 정밀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는 통보를 들었다.
“정밀검사 결과는 폐암이었어. 폐암 2기.”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그동안 나타났던 증상들을 가볍게 넘기고 몸을 소중히 하지 않은 업보였다고,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변변찮은 살림이라 그런지 그에게 남은 것은 부모님 앞으로 들어있던 보험금이 다였는데, 그마저도 빚을 갚고 혼자 살 집을 구하느라 몇 달 정도 버틸 생활비만 겨우 남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아버지와의 연애를 할아버지가 알게 되었고,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 아버지는 집을 나왔다. 그러면서 예정되어 있던 미국 유학은 무산되고, 분노한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포를 놓았다. 마침 항암치료를 받지 않기로 결정한 그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들고 일어난 엄마와 아버지가 한참 대치하고 있던 때였다.
“거기서부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어.”
아버지와 엄마는 그가 항암치료를 받지 않기로 결정한 이유를 돈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꼭 그런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그가 아무리 설명하고 거부해도 그들은 듣지 않았다.
두 사람은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항암치료를 받아보는 것을 시작으로, 보험이 들지 않는 약품 사용과 일본과 미국 등지의 해외 치료 등 점점 더 치료의 규모를 키워갔다. 돈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으나 집을 나온 아버지와 나이가 차서 보육원에서도 독립해야 했던 엄마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음이 분명했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그에게 치료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가 물을 때면 대학을 다니면서 과외와 기타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열심히 돈을 벌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나 그건 누가 들어도 말이 되지 않는 변명이었다. 소중한 두 사람의 간절한 애원을 언제까지고 거절할 수 없어, 결국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면서도 그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믿고 싶었다. 의심하기에 그는 이미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있었다.
암 증상은 돈을 들일수록 나아지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또 재발하고, 벗어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악화되며 그의 발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고개를 드는 기시감을 외면하고 크나큰 잘못을 막을 수 있었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며, 그는 별안간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어떤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아....”
돈. 그를 놓을 수 없는 두 사람. 할아버지의 조건과 그들이 처한 상황. 그가 내게 한 사과. 모든 것이 향하는 사실은 하나였다.
“일본에서 개발한 새로운 치료를 받고 한국에 온 날이었어. 내가 두 사람 외엔 친구가 얼마 없긴 해도 아예 없는 건 아니었거든. 오랜만에 길에서 마주친 동창이 나한테 그러더라고. 나는 너랑 태훈이 응원했었다고. 나 말고도 응원하는 애들 많았는데, 이렇게 돼서 유감이라고. 그런 새끼 잊고 너도 꼭 보란 듯이 행복하라고.”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그냥 흘려들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이리저리 수소문한 결과는 황당했다. 오늘 아침에도 그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던 아버지와 둘이 닭살이라며 혀를 차던 엄마가 결혼을 한 것이었다. 일본에 있던 그를 직접 간호한다고 둘이 한꺼번에 찾아왔던 그 기간이 그들의 신혼여행이었다는 것까지 알게 된 그는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그 길로 찾아가 추궁한 그에게 돌아온 답은 가관이었다.
“입양을, 할 거라고 그러더라. 결혼하면 그래도 좀 봐줄 줄 알았는데 아내 자궁에 문제가 있어서 불임이라고 그러는데도 가정엔 아이가 있어야 한다면서 고집을 부리시더라고.”
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를 악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삼킨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쥐고 그 위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그 길로 나는 도망갔었어. 너무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것 같긴 한데, 방법은 보이지 않고. 그냥 내가 없어지면 다 멈추지 않을까.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그 둘한테 말하지 않고 서울을 떠났어. 핸드폰도 놓고, 모든 짐도 놓고. 주머니에 든 현금만 가지고 나도 처음 들어본 지방으로 도망갔어.”
그리고 한 달 정도가 지난 시점에 그를 찾아온 아버지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던 그를 힘으로 강제해 차에 태우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 길 끝에 있던 것은,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친구와 처음 보는 작은 남자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