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169)화 (169/234)

169화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잘 지내셨어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덤덤한 척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행여나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을까 봐 몇 번이고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속으로는 항상 ‘그 사람’이라고 지칭해서 그런지, 오랜만에 꺼내든 호칭이 생각보다 낯설었다. 하긴, 옛날에도 그를 부를 땐 되도록 호칭을 생략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러본 적도 드물었다.

근데 왜 나는 굳이 지금 아저씨라는 말을 하고 말았을까? 그냥 오랜만이라는 말만 하면 되었을 것을. 순간적으로 옅은 후회가 느껴졌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진짜 진호구나.”

힘들게 쥐어 짜낸 안부 인사에 돌아온 것은 답변이라기보단 혼잣말에 가까운 감탄이었다. 아니, 감탄이 아니라 탄식인 건가. 숨이 섞인 중얼거림은 중의적으로 들려서, 그게 긍정적인 의미인지 부정적인 의미인지 판별하기 쉽지 않았다. 표정을 읽어보려고 해봐도 허공을 바라보는 눈은 슬픔을, 활짝 웃고 있는 입은 반가움을 담고 있어 더욱더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갑, 아니. 그.... 제가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죠. 죄송해요. 미리 연락을 드리고 왔어야 했는데.”

상투적인 말이었다. 평소 연락하고 지낸 사이처럼 살갑게 들리는 말이 민망했다. 내가 언제 그 사람에게 직접 연락해 본 적이 있던가. 내 핸드폰에 그의 번호가 저장되어있던 것은, 그저 또 하나의 비상 연락망을 등록해놓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 음… 일단 앉을래?”

“아, 네, 네. 어디 앉으면 될까요?”

“아무 데나 진호 앉고 싶은 데로 앉아. 아, 제일 푹신한 건 저거야.”

아. 침대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에 맞춰 주춤주춤 걸어가던 몸이 멈췄다.

‘진호는 푹신한 걸 좋아하는구나?’

의자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 위로 더 생기 넘쳤던 과거의 목소리가 덧입혀져 들린 탓이었다.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혼자 힘으로 침대에 올라가 앉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지금, 음.... 보다시피 몸이 조금 안 좋아서. 미안하지만 나는 침대에 앉을게.”

미안. 곤란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사과하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나는 서둘러 그가 가리킨 의자를 향해 걸으며 최대한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런 거.”

그런 걸 왜 사과하는 거야. 나 때문에 일어났다고 내가 미안해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파 보이는 사람이. 나는 괜히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꾸만 제멋대로 울렁이는 감정을 내리누르기 위해서였다. 앉은 의자가 정말 그의 말대로 내가 좋아할 만큼 푹신한 바람에 별 소용은 없었지만.

나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입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다행히 아릿한 통증이 기분을 다시 가라앉혀 주었다. 덕분에 이불을 덮자마자 나를 향해 고개를 든 그 사람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음. 뭐 마시고 싶으면 저기 냉장고에 커피 우유 있어, 진호야.”

이 사람은 정말 뭘까. 나는 참지 못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눈치채지 못하는 새 땀이 말라버린 손바닥은 버석거렸다.

“아, 이젠 안 좋아하나? 하하. 하긴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럴 수도 있-”

“좋아해요.”

반사적이었다. 내 착각일 수는 있으나 민망해하는 어투 속에 섞인 희미한 자책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나간 말이었다. 나는 내가 그럴 줄은 몰랐는지 눈썹을 조금 치켜올린 그의 눈을 피하며 냉장고가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커피 우유 좋아해요.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찬기가 흐르는 냉장고 안에 들어찬 것은 하필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회사의 커피 우유였다. 이건 그가 좋아하는 음료기도 했다. 어린이는 커피를 마시면 안 된다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기만 먹는 건 치사하지 않냐며 반을 나눠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작은 크기의 우유갑을 집어 들고 입구를 열었다. 다시 찾아온 정적. 조용히 우유만 마시는 나를 그가 지켜보았다. 우리의 대화는 내가 몇 모금을 마신 후 양손으로 우유갑을 쥐었을 때 다시 시작되었다.

“놀랐겠다. 이름, 이 달라서.”

미소가 나올 상황이 아닌 걸 아는데도, 그는 말을 할 때마다 웃으면서 말했다. 생각해보면 그게 그의 습관 같은 거였다. 모든 기억을 통틀어도 그가 웃지 않고 말하는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나는 엄지로 우유갑을 쓸면서 물었다.

“안 물어보세요? 어떻게 찾았는지.”

“...글쎄.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서. 음… 물어볼까?”

귀로 흘러들어 오는 목소리가 덤덤했다.

“아니요. 근데 물어보시면 다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럼 됐어.”

중요한 것만 해도 모자란 게 시간이더라. 그가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송곳처럼 귀에 박혔다. 내가 이렇게 청력이 좋았나 싶을 정도로 선명했다. 나는 조금 구겨버린 우유갑을 옆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고 손깍지를 꼈다. 그의 모자란 시간을 더 이상 낭비하지 않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깍지를 낀 손에 꽉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뜨거워진 눈에 힘을 주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래, 까짓거 던져보자. 그렇게 되뇌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 온 이유요. 그게 뭐냐면요.”

“응.”

“그러니까, 어. 제가요. 제가.”

“응.”

횡설수설하면서 요점을 뒤로 미루는 나를 응원하듯, 그는 다정한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빙빙 돌아가는 나를 가만히 서서 기다려주는 것 같았다. 그게 또 뭔가 부끄럽고 미안해서 입을 오므리는 내게 그가 말했다.

“궁금해서 왔어?”

“...네?”

“아니, 나 같으면 그럴 거 같아서.”

놀라서 쳐다본 그는 눈썹 끝을 긁적거리면서 쓰게 웃었다.

“말해 줄 사람들이 아니니까,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거든. 그게 가장, 그래도 덜… 그렇기도 하고.”

말하는 내내 그의 시선은 이불 위에 놓인 손을 향하고 있었다. 내 눈을 마주 보는 것이 겸연쩍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말해줄 사람들이 아니라는 건, 99퍼센트의 확률로 아버지와 엄마를 뜻하는 거겠지. ‘덜 그렇다’라는 말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되물을 틈도 없이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머리도 몸도 나쁜 데다 못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그거 하나는 해줄 수 있거든. 이야기 말이야. 진호 네가 오기 전의 이야기, 어리다고 듣지 못했던 이야기,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 모두. 물론 네가 원한다면, 이지만.”

나는 초조한 듯 서로를 괴롭히는 그의 손가락들을 보면서 눈을 깜박였다. 그래, 그랬다. 이 병실에 들어서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감정에 밀렸던 나의 목적 중에는 분명히 그게 들어 있었다. 나는 의미 없이 몇 번 입을 벙긋대다가 침을 한 번 삼켰다.

“네.”

맞아요. 궁금해서 왔어요.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긴 문장을 말하면 목이 멜 것 같았다. 내 대답에 흠칫 몸을 굳혔던 그의 손가락이 서로를 강하게 맞잡았다. 천천히 들리는 고개. 생각보다 덤덤한 얼굴을 하고 그가 답했다.

“그래. 얘기해줄게. 진호 네가 궁금하다면, 당연히 말해줘야 하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해, 나는.”

‘나는.’ 어쩌면 간단히 지나칠 수 있을 그 말에 엄마와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들은 내가 아는 것을 꺼렸던 건가. 그래, 그러니까 어렸을 때도, 독립을 얘기할 때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가 죽고 나서도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거겠지. 내가 적극적으로 물었으면 어찌했을까, 잠깐 상상해 보았으나 떨어지는 결론은 같았다. 그들의 기준에서 선을 넘는 질문을 했을 때처럼, 그들은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고 답변을 거절할 게 분명했다.

“근데 이야기하기 전에, 네가 꼭 알아둬야 할 것이 하나 있어, 진호야.”

그새 상념에 잠겨 허공을 보고 있던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퍼뜩 시선을 돌렸다. 계속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그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그러셨더라. 내가 뭔가를 알아야 한다고 그러셨던가. 뭘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걸까.

비장하기까지 한 그의 표정에 스멀스멀 긴장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는 드물게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우리가 잘못한 거야.”

설명이 부족한 문장은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되지 않아서 나는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가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말았다.

“나는 지금부터 사실만 얘기하기 위해 노력할 테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감정이 들어갈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합리화를 할까 봐 얘기하는 거야. 무슨 사정이 있었든, 뭐를 겪었든. 우리의 선택은 옳지 않았고, 이기적이었고, 비겁했어. 그걸 잊으면 안 돼, 진호야.”

그답지 않게 단호하고 강단 있는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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