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두 분은. 엄마랑 아버지는 육아엔 영 소질이 없었어요. 둘 다 엄청 똑똑하고, 멋지고, 또 일도 잘하시는 것 같긴 한데. 근데 뭐랄까, 좀 많이 개인주의자시거든요. 나쁜 분들은 절대 아닌데요, 그냥 엄마는 좀 감정적이고 아버지는 타인에겐 관심이 잘 없는 편이랄까요. 그래서 음. 감정적으로 힘들 때가 좀. 좀 있었어요.”
나는 잠시 멈춰 입술을 오므렸다가 안으로 말아 물었다. 그 상태에서 코로 숨을 흡 들이마신 후에 입을 오리처럼 내밀고 후, 하고 뱉었다. 좋아. 눈물 고비 잘 넘겼어.
“막 그렇게 심한 건 아닌데 그냥 뭐랄까. 조금 힘들었어요. 근데 그럴 때 제가 일어날 수 있게, 정말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밖에서는, 그게 예령이네였어요. 그, 부모님께서 저를 되게 세심하게 보살펴 주시고 또 예령이도 마치 형제처럼 저를 챙겨줬어요.”
아니었다. 나는 말을 하면서도 그들이 내게 베푼 친절은 이 정도 단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나에게 어떤 존재냐 하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자기 스스로의 아집과 강박을 못 이겨 나를 상처 줄지라도, 내가 먼저 예령이를 놓는 일은 없을 거라고. 죽는 게 무서워 별 생쇼를 다 하고, 비슷한 일만 생겨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트라우마를 안게 되었을지라도, 예령이네 어머니가 날 부를 때마다 기꺼이 그 집에 가겠노라 다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내 가족의 울타리에 넣기엔 그들은 너무나, 이미 가족 그 자체였다. 그 안에 내가 속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쉽게 말해 예령이네는 내가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참고 견디다 죽을 것만 같을 때 갔던 안락한 피난처.
그러나 피난처에서 살 수는 없었으므로, 언젠가는 돌아가야 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그리고 안에서는요. 집에서는, 아니. 딱 집이라기엔 여기저기긴 한데 아무튼. 그 가족 안에서는 그 사람이었어요. 기분이 좋을 때만 친절해지던 엄마와 달리 자기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날 먼저 생각해준 사람. 아버지처럼 이성적으로 베푸는 친절이 아니라 마음으로 나를 보듬어준 사람.”
내가 ‘안’에 있는 사람 중 유일하게 싫은 티를 내는 사람이었는데도,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내게 뭔가 강요하지도,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근데 어, 제가요. 제가 좀 그 사람을 싫어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싫어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피했거든요. 연락도 안 하고 살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 음. 어딨는지를 모르겠어서요. 그 사람이 오래전부터 아팠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지금은 더 아플 텐데. 그런데 제가 이제야 마음을 먹어서요.”
목이 울렁거렸다.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단어 하나하나가 힘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입을 안으로 말아 물며 눈에 힘을 주었다. 두 번째 다가온 눈물 고비를 넘겨내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보다 훨씬 쉽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최태혁이 내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맞추고 물었다.
“찾아야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인 건가?”
말을 하려고 하다 그대로 멈췄다. 목소리를 내는 순간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나는 열었던 입을 닫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조용한 방안에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 하는 거고.”
“...훌쩍.”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코를 문질렀다. 녀석은 자기 말에 고갯짓만 하는 내게 친절히도 티슈를 내밀었다. 물도 그렇고. 이런 게 자꾸 어디서 나오는 거야. 팔이 길어서 그런가, 몸을 살짝만 기울여도 저만치 있는 협탁에서 뭔가를 가져와 내미는 녀석의 손을 새삼 신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런 내 행동을 오해했는지, 녀석이 내게 내밀고 있던 티슈를 다시 고쳐 잡고 직접 코를 닦아주었다.
“김진호.”
“...네.”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최대한 울음을 삼키고 답했다. 아주 조그맣고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다행히 눈물이 흐르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쓰려고 했던 방법 말해봐.”
“네, 네?”
“그냥 서울을 뒤지려고 하려던 건 아닐 것 아니야. 내 강아지가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진 않을 테니.”
절대 아니지. 이 넓고 사람 많은 서울에서 그런 식으로 사람을 어떻게 찾아. 그것도 나 혼자. 나는 급작스러운 이야기 전개에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고요. 그, 전에 받아뒀던 연락처로 일단 연락을 해 보려고 했어요. 그게 안 되면, 음. 아버지께 여쭤보려고 했어요. 아버지는 분명히 알고 계실 테니까요. 제가 물어보면, 그러면 아마 알려주실 거예요....”
“김진호. 왜 말에 자신이 없어.”
귀신 같은 최태혁. 녀석의 눈매가 날 가늠이라도 하듯 가늘어졌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거짓말을 더럽게도 못하는 내 입은 뻐끔거리기만 하다가 얌전히 다물렸다.
자신이 없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가 그와 만나게 해줄 거라는 확신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냉정히 끊어내는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가 보기에 나는 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를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그의 건강에 안 좋다고 판단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야 뭘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했을 테고, 덜 자란 외형이 동정심을 불러내 그럭저럭 넘어가 주었지만, 지금 나는 성인이었다. 아버지의 기준에서 나는 더 이상 돌봐야 하는 대상이 아닐 것이므로, 그와의 연결점을 허락해줄 리 없었다.
“지금 말하는 꼴을 보니 두 개 다 영 불확실한 모양인 것 같은데. 다른 방법은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 것 같고. 그렇지?”
“아니, 그.... 네.”
호기롭게 말한 것치고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게 드러나서 그런지, 갑자기 창피함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결심하고 나서 바로 여기 끌려오느라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고 나름대로 자기 합리화를 해봐도, 얼굴에 오른 열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 얘기만 듣고 내 마음이 가볍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정말 절박한데. 진짜 찾고 싶어서 또 한 번 심한 짓을 당할 각오까지 하고 말한 건데. 왜인지 초조함과 함께 원인 모를 서러움이 치솟아 세 번째 눈물 고비가 찾아왔다. 그래서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아랫입술을 꽉 물고 버티는데, 침대 최태혁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더니 나를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나는 내 볼을 감싼 손이 이끄는 대로 고개를 단단한 어깨에 기댔다.
“툭하면 울려고 하는 버릇부터 어떻게 해야지, 이거 원.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아닌데요. 안 우는데요.”
“하긴. 우는 거라기엔 콧물이 더 많이 흐르긴 해.”
뭐 인마? 갑자기 들어온 놀림에 나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고개를 들려고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지그시 누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만 으득 갈았다. 가까이 있던 녀석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렸는지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달래려는 듯 엉덩이를 토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괘씸한 마음으로 눈앞의 어깨를 깨물어볼까 했다가, 참고 다시 얼굴을 기댔다. 최태혁은 짧게 웃고 나서 한참 동안 조용히 나를 꽉 끌어안고만 있었다. 그러다 내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질문을 하기 바로 직전에 입을 열었다.
“해.”
“...네?”
앞뒤 잘라먹고 던져진 본론에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고개를 조금 젖히자 녀석의 매끈한 목과 남자다운 목젖이 보였다. 최태혁은 어느새 또 가져온 티슈로 내 코를 닦아 주면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별수 있나. 내 강아지가 이렇게 벌벌 떨면서도 꼭 하고 싶다고 조르는데 들어줘야지. 해. 일.”
“진, 진짜요? 진짜 일 다녀도 돼요?”
“그래. 대신 전처럼 사람 붙여 줄 테니 같이 다녀. 출퇴근용 기사에 실내까지 쫓아다닐 놈들 해서 적어도 세 명. 위치 이동할 때마다 연락하고 집 나가기 전, 들어와서 전화하고.”
놀라서 상체를 떨어트리고 녀석의 얼굴을 확인하는 내게 최태혁이 피식 웃으며 조건을 설명했다. 그래도 전에 겪었던 조건이라 그런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조금 더 엄격해질 것 같긴 하지만 아예 감금을 당하는 것보단 훨씬, 천만 배 정도는 나았다. 최태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면서 더 놀라운 소리를 했다.
“그리고 사람 찾는 건 괜히 쓸데없는 걱정하게 만들지 말고 맡겨라.”
“네, 네?”
저게 무슨 소리야. 맡기라니?
“우리 애들이 그동안 해온 게 있어서 사람 찾는 건 잘하는 편이다. 그러니까 그건 이쪽에 맡기란 소리야. 얌전히 잘 있으면 늦어도 다음 주 안으로는 만나게 해주마.”
최태혁은 휘둥그레졌을 내 눈가를 매만지다 얼굴을 들이밀었다. 파란 눈이 훅 가까워지더니 눈매가 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방안에 울리는 쪽, 하는 소리. 가벼운 입맞춤 뒤에 코를 맞댄 최태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답.”
최태혁이 하는 질문이 으레 그렇듯이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부감 없이 녀석이 원하는 답을 줄 수 있었다. 아니, 알겠다는 대답을 하는 게 너무 기꺼웠던 나머지 나는 녀석의 품에 뛰어들어 목을 꼭 끌어안고 고맙다고 속삭였다. 최태혁은 작게 웃으면서 내가 진정할 때까지 마주 안아주었다. 그리고 내가 잠이 들 때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