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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165)화 (165/234)

165화

“윽.”

작정하고 꼬집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힘을 주었는지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래도 덕분에 나약한 생각이 수그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 차려, 김진호.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것만큼은 발전하기로 했잖아. 똑같은 후회는 남기지 않기로, 그렇게 약속했잖아.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던 걸 잊지 말자. 그걸 위해선 내가 죽었던 시점 그 이후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나는 날 내려다보고 있던 최태혁과 눈을 맞추고 꿀꺽 침을 삼켰다.

“화, 화내지 말아요. 이건 그러니까,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선전포고가 아니고 그냥 제 의견은 이렇다고 전하는 거니까요. 알겠죠?”

“...그래.”

눈썹이 갈매기처럼 휜 것에 반해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나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 나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병원 일은 원래 6개월 계약이었어요. 지금 두 달 정도 됐으니까 이제 반 조금 더 남았네요. 그, 제가 사무직을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어요. 그것도 이렇게 제대로 업무를 배울 수 있는 일을 한 적이 없어서요. 특히나 전공, 아. 제 전공은 사회복지예요.”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말을 할수록 밑으로 내려가던 시선을 들어 눈을 맞추자 최태혁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나는 물음표가 떠 있는 얼굴을 보며 작게 모르실까 봐서,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고개를 바로 한 녀석은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어, 내가 말한 적이 있던가. 그러고 보니 녀석과 지낼 때 말했던 것도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저 말을 이었다.

“아무튼 큰 기업의 사회공헌 파트 일을 경험해 볼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있더라도 이렇게 사업기획팀 일을 배울 수 있는 인턴 자리는 진짜 거의 없어요. 정말 운이 좋았던 거예요. 남궁후랑 호 형 덕분에요. 솔직히 나중에 경력으로 쓰기엔 좀 짧은 기간이긴 한데, 그래도. 그래도 제가 지금까지 했던 일 중엔 진짜 제일.... 음.”

번듯한 일. 그럴싸한 직업.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그 말이 영 어색하고 껄끄러웠다. 단어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뱉는 순간 자연스레 내가 과거에 했던 모든 일들이 가치 없어질 것 같았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조심스레 말의 방향을 바꿨다.

“저는 사실 저 먹고살게만 해주면 무슨 일이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근데 사회복지학을 선택한 건 정말 그 일에 관심이 있어서였거든요. 이제 와서 이러는 것도 좀 웃긴 거 아는데, 그래도 이왕 이런 좋은 기회가 생긴 거, 이거는. 이건 좀 놓치기 싫어서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뒤로 갈수록 몸은 저절로 움츠러들고, 목소리는 작아졌다. 발음마저 뭉개져서 마지막에 ‘그래서 계약이 끝날 때까지 계속 다니고 싶다.’라는 말을 할 때쯤엔 내가 말하고 나서도 말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하찮은 웅얼거림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말할 용기까진 나지 않았기에 나는 녀석의 반응을 기다리며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얼마 가지 않아 정수리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최태혁이 한숨을 쉰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작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에, 예?”

간결하게 뱉어진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 퍼뜩 고개를 들며 되묻자 녀석이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누굴 찾아야 한다면서.”

“아....”

바로 이해되지 않는 답변에 나는 잠시 멍하니 녀석을 올려다봤다. 최태혁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을 가져가 끝마디를 살짝 깨물었다.

“어차피 그것도 말하려던 것 아니었나? 말해봐. 누굴 찾고 싶은지, 왜 찾고 싶은지.”

하나만 깨물면 나머지 손가락들이 아쉬워하기라도 할까 봐 그런지 녀석은 하나하나 정성스레 깨물었다. 이러다 수틀리면 확 힘주어 깨무는 것 아닌가, 잠시 긴장하고 보는데 그러긴커녕 간지러울 정도로 살살 잘근거렸다. 어쩌다 보니 녀석이 새끼손가락까지 깨물고 입을 뗄 때까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재촉하듯 눈을 치뜨는 녀석의 시선을 받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맞, 맞아요. 맞아요. 음, 사람을. 큼, 흠.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잠깐이지만 그래도 넋을 놓고 있느라 입을 벌리고 있어서 그런가, 다시 말을 시작하려니 입안이 마른 느낌이 들었다. 헛기침을 하자마자 몸을 기울인 최태혁이 물컵을 입에 대주었다. 어쩌다 보니 계속 녀석이 물을 먹여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진 내가 물컵을 건네받으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나는 얌전히 먹여주는 대로 물을 마셨다. 내 입가로 흐르는 물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슥, 쓸어준 녀석이 물었다.

“누군데. 찾고 싶은 사람이.”

“아. 그게 누구냐면요-”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사람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가장 적나라한 단어는 아마도 ‘아버지의 남자애인’이 될 테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그 사람은 내게 그 이상의 존재였다. 누가 들어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호칭으로 그를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는 아저씨처럼 완전히 타인 같은 칭호도, 삼촌 등의 그와 전혀 상관없는 명칭도 뭔가 우리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았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속으로는 아는 지칭 명사를 다 꺼냈다가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점점 길어지는 내 까탈스러운 고민을 멈춘 것은 최태혁이었다.

“풀어 말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알아서 걸러 들을 테니.”

녀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입을 꾹 눌러 잘근거리는 걸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대로 입 안으로 들어오려는 엄지를 피해 머리를 뒤로 물리자마자 작게 혀를 차더니, 침대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버렸다. 그동안 내 등을 받쳐주던 팔이 물러가고 대신 무릎을 세워 기대게 해주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들으려는 듯 자리를 잡는 녀석을 보면서 나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난 후,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누구냐면. 누구냐면요. 그걸 말하려면 좀 긴데. 일단 가장 먼저 아셔야 할 게 있어요. 저희 가족이요. 제가, 제가 입양아거든요? 근데 그 입양을 한 이유가 좀 복잡한데요. 아무튼 좀, 평범한 이유로 입양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어.... 음. 평범한 가정이 아니었어요.”

큰 결심을 하고 시작했음에도 말을 매끄럽게 이어가기가 참 쉽지 않았다. 중간중간 뭔가가 자꾸 목구멍을 턱턱 막기도 하고,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망설이다 보니 문장이 뚝뚝 끊겼다. 그런 내가 답답할 법도 한데 최태혁은 아무 재촉도 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도 정확히 설명을 들은 건 아니고 그, 어렸을 때 간략하게 들은 설명이랑 여기저기서 몇 마디 주워들은 것이 다라서 내막은 잘 모르는데요. 아버지가. 아니, 할아버지가 좀 많이 부자에다 엄격하신데, 아버지가 그. 어, 남자... 를 좋아해요.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연인도 있었고요. 당연... 히라고 하긴 좀 뭐한데, 할아버지는 그걸 엄청 싫어하셨고요.”

기분이 이상했다.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는 날이 오다니.

“안 그래도 아버지가 장남이고 또, 자타공인 엄친아라고 불릴 만큼 엄청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나 봐요. 그러던 아들이 유독 그 일만 관련해선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더니, 입학 확정된 아이비리그 대학을 내팽개치고 한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버린 거죠.”

나는 최태혁에게 잡혀 있던 손을 그대로 말아 쥐었다. 녀석의 손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크고, 내 손은 덩치에 비해 많이 작은 편이라 그런지 옹골차게 쥐어진 주먹 끝으로 손가락 마디가 빼꼼 튀어나왔다.

“그걸 보고 할아버지가 선포하셨대요. 결혼해서 가정을 차리지 않는 사내놈한텐 동전 한 푼 쥐여주지 않을 거라고요. 정신 차리고 사람답게 살라고요. 그래서, 아버지는 결혼을 할 상대를 찾으셨어요. 아버지의 상황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요. 그리고 그때 마침 바로 옆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저희 엄마예요. 그 말을 할 때 즈음 내 손은 부들거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최태혁은 불평은커녕 평온한 낯으로 주먹 쥔 손을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엄마가. 엄마는 불임이세요. 그래서 결혼생활에 대한 로망이 따로 없으셨대요. 그리고, 음. 사정을 따로 설명할 필요 없는 친구였고요. 그렇게 이래저래 사정이 맞다고 판단한 둘은, 훗날 이혼할 때 물려받은 재산을 일부 나눠주는 걸로 합의를 보고 친구... 로서. 친구로서 약속을 하고 결혼을 했어요.”

내가 들은 이야기는 그랬지만, 엄마를 지켜봐 온 입장에선 그게 아닌 걸 알았다. 직접 말한 적은 없어도 엄마는 분명 아버지를 사랑했다. 그 사랑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진 몰라도, 분명 ‘약속’을 할 때도 어느 정도의 감정은 있었을 터였다. 함께 지내 온 사람의 감이 그렇게 말했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절로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손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도 풀려 있었다.

“근데 할아버지가 말했던 ‘가정’에는 아이도 포함이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둘은 입양을 하기로 한 거죠. 아무리 고민해봐도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더래요. 아이에게 평범한 가정은 줄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시설에서 자라는 것보단 훨씬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겠다고 다짐하면서.”

자기 딴엔 최선을 다해 돌봐주겠노라고 다짐했던 것이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말 지독히도 아이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그게 다가 아닌데. 어렸고, 절박했고, 자기중심적이었던 그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런 엄마가 보육원에 방문하여 내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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