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어스름한 주황빛의 무드등이 보였다. 침실인 것 같았다. 규칙적으로 등을 토닥이던 것이 멈췄다.
나는 그제야 볼을 대고 있던 따뜻하고 단단하던 것이 뭔지 깨달았다. 눈꺼풀이 퉁퉁 부어 감았다 뜨기 더럽게 불편하게 만든 장본인. 나는 최태혁의 몸 위에 엎드린 자세로 누워서 자고 있던 모양이었다.
내가 깬 건 어떻게 알았는지 녀석은 침대에 바르게 누워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자연히 자세가 불편해져서 꾸물꾸물 일어나려다 커다란 손에 잡혔다. 나는 순식간에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녀석의 품에 옆으로 안긴 자세가 되었다. 거기가 너무 적나라하게 닿아오는데. 어느새 알몸이 된 몸으로 똑같이 알몸인 녀석에게 안겨 있자니 새삼 좀 남사스러웠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기엔, 아까 일어나기 위해 남은 힘을 모조리 써 버린 참이었다.
응, 포기하자. 포기하면 편해. 목을 가누던 힘까지 빼고 축 몸을 늘어트리자, 최태혁의 팔이 내 몸을 고쳐 안았다.
“마셔라.”
입술에 닿는 차가운 물체. 부대끼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기 귀찮았던 나는 그냥 눈을 감은 채 입술로 잔을 물었다. 천천히 흘러들어오는 물을 꼴깍꼴깍 소리를 내어 마셨다. 달다. 아픈 줄 몰랐던 목이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제 그만 마실래. 더 기울여지려는 컵을 입술에 힘을 주어 저지하고 머리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돌아온 힘으로 상체를 세우고 최태혁의 얼굴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협탁에 물컵을 올려놓느라 옆을 보고 있었다.
“...화난 거 풀렸어요?”
멈칫, 유리잔을 놓고 다시 돌아오던 녀석의 팔이 허공에서 굳었다. 얼굴도 옆을 향한 채 잠깐 굳었다가 움직였다.
“화난 적 없다.”
거짓말. 나는 하! 하고 소리 내고 싶은 걸 겨우 삼키고 입술을 삐죽였다. 최태혁은 거짓말을 하고서도 걸리는 것이 없었는지, 태연한 낯으로 나와 눈을 맞췄다. 짜증 나.
얼마간 아무 말 없이 이어지던 우리의 눈싸움은 내가 먼저 시선을 피함으로써 끝이 났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잠들기 전의 난리가 더 선명해져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차마 그 눈을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입을 말아 물며 눈을 내리깐 나는 마침 상체를 지탱하던 힘이 바닥난 것을 느끼고 스러지듯 녀석에게 몸을 기댔다.
그러면서 나를 바투 안는 녀석에게 툭, 가벼운 투정을 던졌다.
“힘이 없어요.”
반쯤은 충동적으로, 반쯤은 지금 녀석의 기분 상태가 어떤가 확인하기 위해 한 말이었으므로, 나는 아닌 척 시치미를 떼며 반응을 기다렸다. 최태혁은 무슨 말을 하는 대신 저만치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다가 내 몸 위에 덮어주었다. 이걸로는 모르겠는데. 나는 내친김에 어리광도 한 번 부려보기로 했다.
“형, 저요. 아까 엄청 무서웠어요.”
말해놓고 이게 어리광인가 그냥 사실적시인가 헷갈리긴 했으나, 내가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어리광스러운 말이었다. 이번에 최태혁은 눈을 치뜨고 자기를 힐끔거리고 있던 내 볼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그래, 안다.”
아, 애매한데. 볼에 입을 맞추는 태도를 봐선 확실히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으나, 말의 내용도 그렇고 어조도 그렇고,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입술을 오므리고 고민을 하던 나는 마지막으로 녀석을 가볍게 책망해보기로 했다.
“든든한 형이 되어준다고 그랬으면서.”
그러자 녀석은 내 머리를 자기 팔에 비스듬히 기대게 만들어 눈을 맞추고 말했다.
“화내지 않을 테니 눈치 그만 보고 하고 싶은 말 해라.”
들켰다. 눈을 크게 뜨자마자 최태혁의 얼굴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코끝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왜 깨물어요!”
얼른 손을 들어 코를 감싸 쥐고 묻는 날 보며 녀석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예뻐서.”
뭐래. 미쳤나 봐. 나는 이상한 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코를 문지르면서 우물쭈물, 하고 싶었던 말 중에 가장 녀석을 자극하지 않을 만한 질문을 했다.
“그, 있잖아요. 박상혁이요. 걔가 왜, 여기에 그런 모습으로 있는지....”
최태혁은 자기를 말끝을 흐리는 나를 토닥이며 무덤덤한 어조로 답했다.
“얼마 전에 우리 애들이 술 취해서 도로에 자다가 트럭에 다리가 깔린 놈 하나를 발견해서 데려왔는데, 돌아갈 곳도, 병원에 갈 돈도 없다길래 여기서 돌봐주고 있다.”
“돌본...다고요?”
“음. 그 녀석의 집에도 연락해서 데려갈까 물어봤더니 필요 없다 그러고.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라 돈도 한 푼 없다고 하니 친절한 우리 애들이 특별히 거둬준 모양이야. 가정교육을 잘못 받은 건지 입을 열 때마다 매를 벌어서 그 꼴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죽지 않도록 잘. 아주 잘 보살피는 중이다.”
녀석은 말을 하는 내내 내 배를 살살 쓸었다. 무서운 일이 아니니 겁먹지 말라는 듯한 제스처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관자놀이에 몰캉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럼 걔도 계속 여기 있는 거예요?”
“우리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아무리 불쌍하다고 해도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 수는 없어. 지금껏 쌓은 업보 청산하고 예의를 좀 배우게 되면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다. 지금 하는 걸로 봐선 언제 돌려보낼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업...보요. 어, 음. 그렇구나.”
최태혁은 초등학생을 데려다 놓고 말해도 속지 않을 것 같은 소릴 하면서 계속 내 옆얼굴에 입을 맞췄다. 뭔가 더 따져야 하나 어물거리던 내 입을 막은 것은 박상혁이 그동안 내게 했던 만행들이었다.
솔직히 그걸 다 합해도 지금 그놈이 당하고 있는 짓이 훨씬 심하고 끔찍한 것 같긴 했으나, 그렇다고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면서까지 나서주고 싶지는 않았다. 몇 번 입 근처에서 그래도 아까 그건 좀 심해 보인다는 말이 맴도는 정도. 딱 그 정도의 동정심밖에 들지 않았기에 나는 어물쩍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어, 그. 흠. 걔를 저한테 보여준 이유요. 저를 노린다는 게, 무슨. 크흠. 무슨 말이에요?”
“그건....”
이번 질문에 최태혁은 조금 뜸을 들였다. 그게 목이 막힌 내 입에 물컵을 갖다 대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말을 정리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녀석이 다시 말을 이은 것은 내가 물을 몇 모금 들이킨 후였다.
“올해 갑작스럽게 정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는데, 그 과정에 좀 문제가 생겼다. 본래라면 빨리 끝났어야 할 일들이 생각보다 지지부진 이어지고 있고, 얽힌 것들도 그만큼 다 지저분한 것들이라서. 지금 현 상태에서 가장 내 약점으로 보일 넌, 그다지 안전한 상태가 아니야.”
“왜요? 왜 제가 형의 약점으로 보이는 건데요?”
“진호야. 나는 아무한테나 경호원을 붙여주지 않아. 직접 연락하고 시간을 쪼개 만나러 가지도 않고, 사람 하나 보호하겠다고 집을 마련하는 짓은 더더욱 하지 않아. 네가 내 강아지니까 그렇게 했던 거야.”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고개 숙여 내 목에 입을 맞췄다. 도장 찍듯 꾹 입술을 누르고 떼더니 조금 옆으로 옮겨가 똑같이 눌렀다 떼고, 또 조금 옆으로 옮겨가 눌렀다 떼고. 목에서 턱으로, 턱에서 볼에 도착할 때까지 녀석은 쪽쪽 부산스러운 소리를 냈다.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 닫기를 반복하다 그냥 일자로 다물어 버렸다. 최태혁의 말이 신빙성 있게 다가와서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녀석이 나에게 하는 행동이 특별하다면, 나는 그를 적대시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노려질 수 있었다. 회귀 전의 나였다면 그게 무슨 드라마 같은 상황이냐 싶었겠지만, 실제로 납치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네가 보이는 곳에서만 있길 바라는 건 분명 내 욕심이 포함된 게 맞아. 하지만 내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 그렇게 지내는 것이 지내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네가 만에 하나 그중 한 놈에게라도 잡혔다간, 아까 그 버러지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할 수도 있어.”
그 새끼들은 그런 놈들이니까. 마지막 말을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의외로 욕을 잘 쓰지 않는 최태혁이라서 그런지 가끔 된소리 발음이 나올 때마다 괜히 더 살벌하게 느껴졌다.
나는 박상혁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꼴은 정말 당하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회귀 전 내가 겪었던 꼴도. 생각할수록 무서웠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최태혁의 팔을 붙잡고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자 최태혁이 나를 더 단단히 옭아매더니 내 이마에 볼을 비비며 말했다.
“걱정돼서 그런다. 내 소중한 강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 내 예쁜 강아지는 아픈 것도, 무서운 것도, 외로운 것도 싫어하잖아, 응? 형이 옆에서 지켜줄 테니 얌전히 여기 있어.”
혼란스러울 때 달콤하게 들렸던 말을 맨정신일 때 들으니 더 달콤하게 들렸다. 제대로 된 설명에 더해 날 안심시키기 위해 꽉 끌어안아 오는 팔의 감촉이 퍽 마음에 들어서 그런지 그래도 난 할 일이 있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냥 가타부타 토 달지 말고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네가 궁극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걸 생각해. 모르는 사람들한테 끌려가는 일. 아무도 구해주러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어둡고 습한 곳에서 가해지는 일방적인 폭력. 아무 가치도 없다는 듯이 외면당해 죽는 결말. 그것에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거 아니야? 그걸 바꾸고 싶어서 아등바등한 거잖아.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김진호가 계속 속삭였다.
여기 있으면, 내년 봄이 올 때까지 여기에만 있으면. 나는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거야.
이미 돌아가기 싫은 곳이 되어버린 집에 대한 미련은 전과 같지 않았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괴로운 짓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여기 머무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일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나가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못 하게 되는 것도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의 저울이 요동쳤다. 심신이 지쳐서 그런가, 자꾸 편한 선택을 내리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골똘히 고민하던 나는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로 내 볼을 세게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