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163)화 (163/234)

163화

“혀, 형, 흐윽, 무서, 무서워요. 흐읍, 흐윽.”

앞뒤 잴 수가 없었다. 이 무서운 곳에서 벗어나려면 녀석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밖엔 생각나지 않았다.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거 몰라. 모르겠어. 나는 잘난 게 없는걸. 내가 뭘 해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않는걸. 그러다 나를 또 놓고 갈 거야.

아냐, 그건 싫어. 놓고 가는 건 싫어. 또, 버려지는 건 끔찍해. 그런 외로운 건, 무섭고 비참한 건 다시 겪고 싶지 않아.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황, 평소에 묵혀두었던 것들까지 산발적으로 튀어나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아니야. 저렇게 하면 아니야, 저것도 아니야. 그러다 그 많은 생각들 중에 하나가 반짝 떠오르며 다른 모든 의견들을 내리눌렀다.

붙어 있자, 그냥, 녀석에게 붙어 있자. 나를 버리고 갈 수 없도록, 나도 데려갈 수밖에 없도록. 녀석에게, 최태혁에게 붙어있자.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결정이었지만 이성이 마비된 나에겐 더없이 좋은 방법처럼 느껴졌다. 나는 어느새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거칠게 문질러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아, 형, 아까, 아까처럼, 안아 주세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은 위태롭게 휘청였고, 우느라 거칠어진 숨이 말을 뚝뚝 끊어먹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최태혁의 팔을 허리에 두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낑낑대며 나보다 높이 있는 목이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힘을 주기도 했다.

녀석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박상혁의 날카로운 비명이 커질수록 나의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이젠 숫제 녀석에게 안기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그리고 드디어 최태혁이 움직였다.

“저거 조용히 시켜.”

녀석은 내 등과 무릎 아래를 받쳐 안아 들면서 박상혁을 패고 있던 남자들을 향해 말했다. 원하던 대로 안긴 나는 나 역시 조용히 하지 않으면 또 버려두고 갈까 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울음을 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안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던 녀석은, 날 안은 자세 그대로 푹신한 소파에 앉더니 내 등을 토닥였다.

“입술 깨무는 거 나쁜 버릇이다, 울보 강아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이 찌푸려져 있었지만 분명 나를 강아지라고 칭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입술을 살살 쓸어주는 다정한 손짓에 나는 후다닥 녀석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허어엉- 형, 혀엉. 흐윽, 혀어엉.”

살았다. 나는 산 거다. 두고 가지 않았다. 저 남자들에게 날 넘기지 않았다. 그 문장들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그렇게 나는 정말 ‘살았다’는 것이 실감 날 때까지 한참을 녀석에게 매달려 있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됐나 보군.”

최태혁은 그렇게 말하며 날 꽉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이성은 서서히 돌아왔지만, 그만큼 체력을 다 써버린 나는 약간 몽롱한 정신으로 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그런 거야. 응?”

내 등을 쓸어내리면서 묻는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더라. 그냥 다 무서웠는데.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처럼 한꺼번에 들이닥친 복잡한 생각들과 끔찍한 기억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머리는 텅 빈 것 같았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뇌를 따라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대로 술술 답했다.

“박상혁처럼, 쟤처럼 나를 그렇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아픈 건 싫은데, 혼자 죽는 것도 싫은데. 버려지는 건 더더욱 싫은데. 또 그렇게 될 것 같아서. 그 장면이 자꾸 생각이 나서. 그게 너무 무섭고, 그래서. 형이 또 그럴까 봐.”

“...또?”

그래. 또. 그때처럼. 나는 더듬더듬 배를 쓸다가 고개를 숙여 확인했다. 응, 아직 없어. 안 아파. 피도 안 나.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살았어. 나는 살아있어. 아까 느껴졌던 통증은 역시 거짓이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나는 이제 전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었다. 피해의식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김진호가 아니었다.

나는 열심히 과거를 떠올려내며 내 얼굴을 쓸어주는 최태혁의 커다란 손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하아, 김진호. 진호야.”

이대로 곧 있으면 잠이 들 것 같았던 내 정신은,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뱉어진 이름을 듣고 다시 조금 깨어났다.

“내가 저걸 보여준 이유는, 내가 널 그렇게 하겠다는 경고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라도 너를 노리는 누군가한테 네가 잡혀버리면, 그러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그러니까 바깥이 완전히 안전해질 때까지 여기에, 내 품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어.”

이상하다. 내가 아니라 채예령이었는데. 누군가가 노린다는 것도, 최태혁의 품에 있는 것도. 나는 다시 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봤다. 이상하다. 이상해.

“여기에만 있어. 나 외엔 그 누구도 네게 손끝 하나 댈 수 없도록 지켜주고, 외롭지 않게 옆에 있어 주마.”

좋은 말이었다. 달콤한 말이었다. 최태혁은 손을 댈 거라는 이상한 뉘앙스가 좀 걸렸지만, 외롭지 않게 옆에 있어 준다는 말이 너무 따뜻했다.

그러나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기엔 가장 앞에 나온 말이 걸렸다. 여기에만 있어. 여기에만. 여기.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는 말이었다.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내 이마에 닿는 말캉한 감촉을 느끼면서 또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있잖아요, 근데. 일을 하고 싶어요. 쓸모가 있고 싶어요. 전에처럼, 그때처럼 살면 또 나는 혼자가 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건데. 엄마가, 예령이도. 번듯한 일을 하는 걸 좋아하니까. 그게 좋다고 그랬어요. 근데, 근데 지금 일이 가장. 제가 가졌던 것 중에 가장 그런 일이라서.”

문맥 없이 말을 뱉는데 콧물이 흘렀다. 아니, 눈물인가. 아무튼 정체 모를 액체를 최태혁의 옷에 문질러 닦고 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요, 그리고. 아저씨를, 아니, 가족. 아니, 어.... 아무튼 그 사람을 찾아야 해요. 찾고 싶어요. 후회가요. 후회가 너무 아파서요. 아픈 건 싫으니까. 몸도, 마음도 아픈 건. 그건 너무 힘들고, 또. 또, 그건 안 없어져요. 그렇더라고요.”

“김진호.”

“확인도 하고 싶어요. 내가, 나한테. 나한테 가족이, 그런 비슷한 거라도 있었는지. 근데 시간이 없어서. 그냥, 그래서. 형 진짜 무서워요. 진짜로, 엄청. 엄청 무서워요. 근데, 근데 제가 진짜 시간도 없고요. 또, 어, 달라져야 해서. 그래서 꾹 참고 물어본 건데. 그런 건데.”

형이 막, 무서운 거 보여주고 협박했어요. 갑자기 박상혁 나오고. 쟤가 왜 저기서 나와. 사람 심장 놀라게.

한번 시작된 말은 중얼중얼 중얼중얼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중간에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너무 몽롱해서 그게 꿈인지 진짠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지쳤다. 힘들었다. 어쨌든 나는 지금 살았고, 날 지켜줄 수 있을 만큼 힘이 센 최태혁이 날 안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은 자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스르르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고개를 젖혔다.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한 최태혁의 얼굴이 보였다.

“형. 또 화났어요?”

눈을 끔벅이며 묻자 최태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길게 한숨을 뱉었다. 그게 화가 났다는 건지 괜찮다는 건지 판단이 되지 않아 그냥 조용히 기다렸다. 다시 고개를 내린 최태혁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아니.”

“다행이다.”

나는 한껏 젖혔던 고개를 바로 했다. 몸을 움직여 편한 자세를 잡고 녀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무섭게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안 그래도 진짜 무섭단 말이에요. 그냥, 그냥 바람이에요.”

“...그래.”

“제가요. 나는, 아니 저는. 그러니까 제가 안 예쁜 거 아는데요. 안 소중한 것도 아는데. 근데, 근데 그래도. 그래도 어, 너무 막, 막.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그냥 그것도 바람이에요. 바람.”

바람, 다시 흐르는 콧물을 훌쩍이면서 그 단어만 너덧 번 반복했다. 그러자 최태혁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수건 같은 걸로 내 코를 훔쳐주었다. 엉덩이를 토닥이는 손, 내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는 손.

나는 천근만근이 되어 감당이 안 되는 눈꺼풀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주변의 소리에 묻혀 어쩐지 최태혁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가 졌다. 잘 자라, 내 예쁘고 소중한 강아지.”

근데 그 내용이 너무 말도 안 돼서, 꿈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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