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좆됐다. 진짜 망했다. 갑자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은 현실이 진짜 현실이라는 사실이 너무 어이없고 막막했다.
퇴근 후에 납치되듯 끌려온 집에서 진짜 죽기 직전까지 그 짓을 당하고, 해가 넘어갈 즈음이나 되어서 울면서 깼더니 나도 모르게 감금 생활이 시작되어 있었다. 쌍둥이들과 있을 때도 온 집안에 카메라며 추측이긴 하지만 도청 장치가 있어 내내 감시당하는 기분이긴 했어도 이렇게 대놓고 ‘감금’이진 않았다.
나는 알겠다는 대답을 기다리며 날 빤히 내려다보는 최태혁을 향해 입을 달싹였다. 분위기로 봐선 원하는 답을 해주지 않았을 시 뭔가 엄청난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순순히 알겠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일까. 말이 안 나오면 고개를 끄덕이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목을 움직이려고도 해봤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 목도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그래, 몸도 여기 감금당하기는 싫은 거야. 그런 거야. 나는 결국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며 고개를 돌렸다.
“우, 우와. 이게 다 뭐래요? 엄청 맛있겠다.”
“김진호.”
빌어먹을. 나는 연기에도 소질이 없는 것인지 어색한 감탄과 함께 누가 봐도 말을 돌리는 게 티가 나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당연히 최태혁도 속아 넘어가지 않고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고 말을 이었다.
“그, 크흠, 그러고 보니까 저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지 뭐예요? 어쩐지 배가 막 엄청 고프더라니! 24시간 굶은 거잖아요, 저!”
“김진호.”
나를 뚫어버릴 듯이 보는 눈빛을 모른 척하면서 말하자니 목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도 꿋꿋이 말을 이으면 좀 넘어가 주려나 싶었는데 녀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세차게 머리를 굴리던 나는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이름만 연거푸 부르던 최태혁의 얼굴을 잡고 끌어당기자 녀석은 의외로 별 저항 없이 내 손을 따라 상체를 굽혀주었다.
나는 지척으로 다가온 녀석의 얼굴을 잠시 힐긋대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일자로 굳게 닫힌 녀석의 입술에 아주 짧은 입맞춤을 한 뒤에, 더듬더듬 애교로 보일 것 같은 말을 막 뱉었다.
“혀, 형. 제가 진짜 배고파서 그래요. 그, 강, 강아지 진짜 너무 배고파요. 네? 혀엉.”
진심 쪽팔려서 기절할 것 같아. 나는 붉어지는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눈을 내리깐 채 녀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넘어가 주면 진짜 사람이냐. 아니, 이런 걸로 넘어가 주면 그것도 그것대로 이상할 거 같긴 한데. 내가 뭐라고 뽀, 뽀뽀하고 강아지 어쩌고 한 걸로 귀엽다고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한 거지, 나. 어제 이 비슷한 거 했다가 오히려 더 혼쭐나지 않았나. 더 격하게 당했던 것 같은데.
아무 말 없이 정수리에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최태혁은 녀석의 얼굴을 잡느라 위로 뻗은 팔이 아파질 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다가, 내가 손을 떼려고 하자 푹 한숨을 쉬더니 내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든 내 이마를 향해 딱밤을 날렸다.
“악! 왜 그래요?!”
눈앞에 별이 보일 정도로 세게 맞은 나는 상황도 잊고 이마를 감싸며 녀석에게 소리를 빽 질렀다.
“시끄러. 소리 지르지 말라고 했다.”
“아니, 갑자기 사람을 때리니까....”
“조용.”
최태혁은 딱밤을 날리자마자 테이블을 빙 둘러 내 맞은편으로 갔다. 그러면서도 잔소리를 잊지 않는 녀석을 향해 변명을 중얼거리자 자리에 앉은 녀석이 눈을 빛내며 내 말을 끊었다.
“어제 보니 많이 전보다 너무 말랐어.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이니 다 먹어라. 이야기는 다 먹은 후에 이어 하도록 하지.”
믿기지 않았지만, 나의 비 맞은 강아지 작전이 통한 모양이었다. 불쌍해 보이는 얼굴로 애교 비스무리한 걸 흉내 내면 넘어가 준다는 것에 확신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이걸 자주 써먹기엔 내 자존심과 수치심이 용서치 않았지만, 정말 급할 때는 유용하게 쓸 필살기가 생긴 셈이었다. 물론, 어제처럼 그런 상황에서는 역효과가 나는 것 같으므로 절대 사용하지 않을 거다.
어쨌든 나는 새롭게 얻은 정보를 곱씹으며 최태혁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녀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서도 내가 있는 쪽으로 고기 요리들을 밀어주고 있었다. 어쩌면 여기서 조금 더 나가도 받아 들여주지 않을까. 방금의 성공으로 용기를 얻은 나는 숟가락을 집어 들면서 녀석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되도록이면 답정너가 아닌 방향으로 해주....”
“먼저 먹으라고 했다. 김진호.”
“넵.”
나는 더 이상 까불면 밥도 못 먹게 할 것 같은 기운에 얼른 대답하고 얼른 밥을 펐다. 밥을 푸자마자 위에 올라오는 고기반찬. 나는 힐긋 젓가락을 물리고 있는 최태혁을 곁눈질하고 한껏 입을 벌려 밥을 먹었다.
“마, 마이떠!”
고슬고슬한 밥과 간장소스가 잘 밴 야들야들한 고기의 조합은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잘 어울렸다. 아까 대답을 회피하고자 했던 말처럼 거의 24시간을 굶어서 그런지, 진짜 눈물이 날 만큼 맛있었다. 이미 씹고 있는데도 입에 더 넣고 싶을 만큼 허기가 밀려왔다. 인간의 3대 욕구 중 식욕에 지배되어버린 나는 감금이고 뭐고 잊은 채 상위를 젓가락으로 종횡무진을 하며 아주 야무지게 배를 채웠다.
내 정신이 돌아온 것은 밥을 고봉으로 두 그릇이나 비우고 나서였다. 윗배가 볼록할 정도로 많이 먹은 나는 민망함에 괜히 배를 문지르면서 슬그머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안 보는 척 힐끔 맞은편을 확인하니 최태혁은 허겁지겁 뚝딱 먹어버린 나와 달리 아주 바른 자세로 정갈하게 먹는 중이었다.
나는 최태혁의 수저질을 보면서 밥 먹느라 잠시 생각하기를 미뤄둔 현 상황 타파에 대해 곰곰이 고민하다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먹기에 가장 맛있었던 요리 하나를 집어 녀석에게 내밀었다.
“그, 저기, 형. 제 입엔 이게 제일 맛있더라고요. 이것도 하나 더 드세요.”
밥에 올려줄까 하다가 밥그릇 더러워지는 걸 싫어할 수도 있어 그냥 허공에 내민 반찬을 확인한 최태혁은 날 한 번 보더니 다시 반찬을 보며 입을 벌렸다. 먹여달라는 거겠지, 저건. 테이블이 넓어 앉아있는 상태로는 입에 넣어줄 수 없어 보였다. 숟가락을 내밀어주면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할 테지만, 그래도 일단 지금 약자는 나니까 해달라는 대로 해드려야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숙여 녀석의 입에 쏙 집어넣어 준 나는 녀석의 표정을 꼼꼼히 살폈다. 좋아.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어. 사람은 자고로 등 따습고 배부르면 관대해지기 마련. 맛있는 것을 먹고 있는 지금이 바로 녀석을 공략할 기회였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고 작게 파이팅을 외친 다음, 최대한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형. 형도 아시다시피 제가요. 아주 집돌이예요.”
내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최태혁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일부러 반찬을 집는 척하면서 다른 쪽을 보고 있음에도 녀석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것이 옆눈으로 보였다. 하지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라는 말을 따라 여기서 굴할 수는 없었다.
“원래 제가 어딜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보통 일, 집, 일, 집이거든요. 그, 뭐냐. 그, 동선! 동선도 맨날 똑같이 다녀요. 새로운 길 개척하고 이러는 것도 별로 성격에 안 맞아서 한 번 굳어지면 맨날 다니는 길로만 다니거든요. 형도 아시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내 피하던 최태혁의 눈을 맞추고 동의를 구하듯 질문했다. 내가 뭐라고 하는지 지켜볼 심산인지 녀석은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을 하고 나를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긴커녕 고갯짓도 하지 않는 녀석을 보고 침을 한번 삼킨 나는, 입꼬리를 더 끌어올리면서 말을 마저 이었다.
“그러, 흠흠.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일, 일하느라 나가는 건 허락해주시면 안, 안 될까요? 그리고 저기, 저. 제가 어제 차에서도 잠깐 얘기한 것 같은데. 제가 찾,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사람 찾는 거랑, 찾은 후에 만나는 시간도 허락해주셨으면 좋겠어서....”
최태혁 손에 쥐어져 있던 젓가락이 탁, 소리를 내며 테이블에 놓였다. 안 그래도 점점 서늘해지는 분위기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가던 나는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혀를 씹어버렸다.
최태혁은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나를 어떻게 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무서운 거지. 그저 아무 말 안 하고 나를 빤히 보고 있을 뿐인데도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래도 차마 집에만 있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우선 괜찮은 척을 하기 위해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올리면서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최태혁은 그런 나를 보면서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진호. 김진호. 내 겁 많고 눈물 많은 강아지는 참 이상하게 결정적인 순간에 대담해진단 말이지.”
나를 똑바로 쳐다보던 최태혁은 이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래, 내 강아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겪어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퍽 자조적인 어투로 중얼거린 녀석은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하하, 하고 웃는 소리를 내면서 몇 번이고 그래서 이러는 모양이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진호는 형이 하나도 무섭지 않겠구나. 그렇지? 하긴. 이렇게 귀여워해 주기만 하는데 뭐가 무섭겠어. 응?”
절대 아니다. 저걸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면 쟤는 정말 큰 오해를 하는 거다. 나는 방금 전까지도 스스로 되물을 만큼 최태혁이 무서웠다. 딱히 맞은 적이 없는 것치곤 지나치게 무서워하고 있었다. 지금도 폭발하기 직전처럼 보이는 녀석이 무서워 그게 아니라는 간단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태혁은 이런 내 상태를 알아줄 맘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마를 문지르던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웃고 있는 녀석에게 내 도리질이 보일 리가 없었다. 손에 흥건한 땀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는데, 웃기를 멈춘 최태혁이 테이블 위에 있던 손을 들어 허공에서 검지를 까닥였다. 그러자 저편에 서 있던 남자가 재빠르게 다가와 녀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기척을 느낀 건지 최태혁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시리도록 무감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간결하게 지시했다.
“지하에서 그거 들고 와.”
녀석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짧은 대답과 함께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곧이어 들려오는 여러 명의 발소리. 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믿기지 않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설마. 설마.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점점 더 짙어지는 이 냄새가 내가 생각하는 그 냄새가 아니기를 온 세상 신들에게 빌었다. 그러다 시야에 간신히 걸쳐 있던 최태혁의 형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여 얼른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아까 저 자리에 가기 위해 그랬던 것처럼 테이블을 빙 둘러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당장 뭐라도 할 것처럼 기백 있게 내 옆까지 걸어온 녀석은 막상 내 옆에 서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곧이어 이쪽을 향해 오던 발소리가 멈추고, 최태혁은 내 뒤로 가서 섰다. 의자를 아주 가볍게 옆으로 돌려버리는 커다란 손. 그 뒤에 내가 마주한 것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하고 기괴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