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나는 눈치를 보느라 녀석이 내 입에 대고 컵을 기울일 때까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흘러들어오는 물을 얌전히 받아 마시고 나자 녀석은 내 볼을 톡톡 쳤다. 확실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충 하던 말을 마저 하라는 신호인 것 같아 나는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저 진짜 거기 찢어지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리고, 막 몸도 여기저기 아프고요. 아무래도 어디 하나는 망가진 것 같아요.”
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꾸미며 최태혁의 커다란 손을 잡고 끌어다 허리 부근에 갖다 댔다. 그러면서 슬쩍 가슴을 내밀고 핏기까지 보이는 유두를 손으로 가리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조금만 세게 나가려고 하면 무섭게 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으므로, 아예 약한 척을 해본 것이었다.
과연 새로운 전략이 먹히는 것인지 녀석은 별다른 제재 없이 내가 이끄는 대로 허리에 손을 얹더니 억지로 울먹이는 내 눈가에 입을 맞췄다. 또 아까처럼 뽀뽀 세례를 할까 싶었으나 도장 찍듯 한 번만 하고 떨어진 녀석은 이내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녀석의 눈길이 유두를 지나 자기 손이 얹어진 허리로 옮겨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면 이렇게까지 아프다는데 미안함을 느껴야 정상 아니겠냐. 제발 이대로 ‘많이 아팠겠구나.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 하고 말해라, 제발. 나는 상체를 숙이면서까지 세심히 내 허리와 엉덩이께를 살피는 녀석을 보며 드디어 내 말이 먹히나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최태혁이 내 허리를 안마하며 뱉은 말은 내가 원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아까 의사 다녀갔어. 좀 붓고 까진 것 빼곤 딱히 문제는 없다고 했으니 걱정 마. 안 망가졌다.”
의사라니. 의사라니! 상상도 못 한 존재에 앞으로 안 그러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팽팽 돌아가던 사고가 정지했다. 누군가 이 꼴을 봤다고? 심지어 진찰을 했다고? 그러니까, 여기고 저기고 다 봤다고? 그러고 보니 아까 잠결에 녀석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미쳤다. 미쳤네. 그거였구나. 그때도 나는 내 정신이 조금이라도 돌아온 것을 알면 또 무시무시한 것을 집어넣을까 무서워 다시 자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미 다 지나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너무 창피했다. 몸 여기저기가 불긋하고 평소엔 아무도 보여줄 일 없는 곳이 퉁퉁 부은 채 기절한 남자 한 명과 그 사람을 진찰하고 있는 의사, 그리고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최태혁이라니.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상상이 되는 수치스러운 자태에 모습에 내 얼굴은 속수무책으로 붉어졌다. 날 뭐라고 생각했을 거야. 와 씨, 내가 못 살아 정말!
“왜, 왜 말도 없이 의사를....”
“네가 너무 안 일어나서 불렀다. 겉으로 보기엔 별문제 없는 것 같은데 계속 잠만 자니까. 거기다 일어나면 진료 못 받겠다고 또 울어댈 것 같아서 말이야. 지금 얼굴 터질 것 같은 걸 보니 잘한 것 같군.”
맞다. 눈 뜬 상태에선 진료고 뭐고 절대 못 받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진료 같은 것 자체가 필요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녀석은 겉으로 보기에 별문제 없어 보인다는 망발을 했지만, 당사자인 내가 느끼기엔 지금 내 몸 상태는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었다.
뭐라도 따지고 싶어 말을 뱉던 나는 너무 맞는 말만 하는 최태혁에게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옹졸하게 입을 오므렸다. 근데 내가 뭐 얼마나 못 일어났길래 의사를 부르기까지 했대? 보통은 그냥 응급실을 가거나 병원을 가지 않.... 잠깐. 어? 병원? 그러고 보니 오늘 평일인데?
“혀, 형! 형 저 일! 일이요! 지금 몇 시지? 지금 몇 시예요? 내 핸드폰! 아씨 큰일 났다!”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선득함에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몸을 움직였다. 시간을 모를 정도로 어두컴컴한 실내환경과 충격적인 기억으로 인해 ‘출근’이라는 단어가 이제야 떠오른 탓이었다. 쌍둥이들 때문에 아침에 급작스러운 병가를 낸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하루를 통으로 쉴 수는 없었다. 잡일만 하는 단기 알바라지만 그래도 나름 맡은 일들이 있었었고, 그걸 하지 않으면 다른 분들이 일하는데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생각에 미치자 초조함은 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초조함은 머지않아 최태혁의 답을 듣고 한순간에 절망으로 바뀌었다.
“5시.”
“...네?”
“5시.”
“...오전...?”
“아니. 17시.”
녀석은 오전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아주 작은 희망마저 무참히 짓밟은 채 침대를 벗어나기 위해 기어가던 자세 그대로 얼어버린 내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침대를 벗어난 녀석은 어둠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뭔가를 들고 왔다. 녀석이 가져온 것은 비싸 보이는 가운이었다. 녀석은 커다란 가운을 대충 걸치더니 망연자실한 채 앉아있는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려 무릎으로 서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가운을 입느라 침대 위로 던져두었던 다른 천을 들어서 내게 입혔다. 보는 것보다 제법 두껍고 넉넉한 가운을 아주 꼼꼼히 여민 것으로도 모자라 기다란 가운 끈을 두 번이나 두르고 묶었다. 다 한 후에 이리저리 둘러보고 난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엔 엉덩이를 받쳐 앞으로 안아 들었다. 몸이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느낌에 반사적으로 목에 팔을 두르자 녀석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회사엔 오전에 연락해 뒀다. 중간에 무슨 자료 필요하다고 컴퓨터 비밀번호 관련해서 연락이 왔었는데, 애들 시켜서 해결해뒀으니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날 안은 채 걷기 시작한 최태혁은, 컴퓨터 비밀번호 같은 문제를 어떻게 애들 시켜서 해결해뒀다는 건지 의문에 빠질 새도 없이 더 어이없는 말을 했다.
“몸도 안 좋은 녀석이 어차피 그만둘 곳 하루 빠진 걸로 뭐 하러 이리 열을 내. 아무리 의사가 괜찮다고 했다지만 근육통이 심한 상태에서 그렇게 막 움직이면 더 아파질 수 있으니까 괜히 까불지 마라.”
내 강아지는 아픈 걸 제일 싫어하잖아. 그지? 최태혁이 귓가에 속삭이며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토닥였다.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왜 거길 그만둬?
“그게 무슨, 아니, 그만둘 곳이라뇨?”
“아. 그만두겠다는 말은 네가 직접 하고 싶어 할 것 같아서 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따 봐서 메일 하나 보내놔. 혹시 통화까지 해야 하면 월요일에 하든가. 아니면 이것저것 귀찮을 필요 없이 그냥 쌍둥이들 시켜.”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진심인가 확인하고 싶어진 나는 최태혁의 얼굴을 보기 위해 어깻죽지를 그러쥐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그렇게 해서 본 녀석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대한 의문은 있을지언정,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는 건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는 거잖아, 저거.
“잠깐, 잠깐만요. 제가 일을 왜 그만둬요?”
당황이 듬뿍 밴 목소리로 질문하자마자 내 행동에 대한 의문이 풀렸는지, 최태혁은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대답이 없는 녀석이 답답한 마음에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올려 녀석의 얼굴을 잡고 나를 보게 만들었다.
“형!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저 일 계속 다닐 거예요. 아니, 멀쩡히 잘 다니고 있었는데 그걸 왜 그만둬요, 제가!”
언성이 높아지면 또 정색할까 무서워 최대한 조곤조곤 말했으나 끝에 가선 결국 참지 못하고 약간 소리 지르듯 말해버렸다. 내 귀로 듣기에도 심하게 갈라져서 나온 목소리에 흠칫 자동으로 몸이 긴장했다.
최태혁은 질러놓고 눈치를 살살 보는 나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더니 별안간 쾅, 소리를 내며 뒤에 있는지도 몰랐던 문을 찼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큰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른 녀석의 목에 팔을 두르고 얼굴을 묻어버렸다.
“진호야.”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또 차가워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부름에 답하는 대신 등을 끌어안으며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근에 볼을 비볐다.
“고개 들어.”
나름의 애교 작전이 조금은 통했는지 목소리가 아주 약간 부드러워졌다.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든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당연히 최태혁이었다. 어느새 열린 문밖에서 쏟아져 들어온 환한 빛이 최태혁의 잘생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녀석은 내가 저를 보는 걸 알면서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고 천천히 문밖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싫어도 일은 그만둬야 할 거야.”
분명히 발로 차기만 했는데 어떻게 열렸나 싶었던 문밖에는 하얀색 셔츠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자신을 향해 허리를 반으로 접어 인사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최태혁은 덩달아 그 남자를 보고 있던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맞춘 채 보란 듯이 말했다.
“위치로.”
그 말 한마디에 남자는 짧은 대답과 함께 우리가 방금 나왔던 문 바로 옆으로 가서 섰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듯 정면을 보고 꼿꼿이 선 남자를 확인한 최태혁은 몸을 돌려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남자를 등지고 걷는 녀석으로 인해 마주한 자세로 안긴 나는 당연히 남자가 있는 복도를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내 착한 강아지는 여기에만 있을 거거든.”
최태혁은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이 말했다. 일부러 고개를 들게 해서 방문 앞을 지키고 선 남자를 보여줘 놓고 다정한 척 굴었다. 미동도 없이 문을 지키고 선 남자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던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용기 내서 계속 생각하던 질문을 던졌다.
“여, 여기에만 있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그러나 호기롭던 시작과 달리 말은 끝을 맺지도 못했다. 최태혁을 발견하고 허리를 접어 인사하는 남자들이 집안 여기저기에서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남자들의 머릿수를 세면서 애꿎은 아랫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말 그대로다. 여기에만 있는 거야. 여기, 이 집에만.”
녀석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답했으나 듣는 내 심장은 당황스러움과 무서움으로 인해 점점 더 빨리 뛰었다. 혹여나 밀착한 녀석에게도 이런 내 심장박동이 느껴질까 최대한 다른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감금 예고를 덮을 수 있는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넓은 집을 성큼성큼 걷던 최태혁이 드디어 멈춘 곳은 다양한 음식이 차려져 있는 테이블 앞이었다. 녀석은 도넛 방석이 두 개나 깔린 의자 위로 날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다시 말해서 진호 너는 앞으로 내 허락 없인 이 집에서 단 한 발짝도 못 나간다는 말이다.”
알겠지? 최태혁은 모르는 척의 대가인 나도 정해진 답을 모른 척할 수는 없을 정도로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