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호야. 김진호.”
빌어먹을 최태혁. 더 자고 싶은데 어제 질리도록 들었던 목소리가 자꾸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나는 이 소리에 눈을 떠 봤자 좋을 것이 하등 없다는 것을 알기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내 다시 찾아온 잠으로 인해 흐려지던 정신은 무의식의 경계를 넘기 바로 직전에 들린 소리를 듣고 다시 깨어나고 말았다.
“흐음.... 어젯밤처럼 넣어줘야 눈을 떠주려나?”
싫어. 그만해. 이제 진짜 못한단 말이야. 너무 힘들어 정신을 놔 버렸다가 깨어나도 여전히 내 안에서 나를 힘들게 하던 무서운 몽둥이가 생각이 나 겁이 났다. 이러다 또 들어오면 어떡하지? 도망, 도망가야 해. 그러나 입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데, 내 몸에 감긴 팔을 뿌리치고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싫은데. 나 진짜 이제 못하는데.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단단한 팔이 내 엉덩이를 받치고 몸을 들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또 시작하려나 봐. 나는 저 단단한 손이 내 몸을 움직이고 난 후에, 머지않아 그 무서운 살덩어리가 내 몸을 꿰뚫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떡해. 어떡하냐고. 다가올 고문과도 같은 커다란 쾌감이 무서웠다.
몸아, 좀 움직여라, 좀! 열심히 힘을 줘봐도 내 쓸모없는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내 처지가 서럽고 억울해 절로 울음이 터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울음소리를 낼 만한 기력도 남지 않아 그저 눈을 감고 있는 상태로 눈물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쉬- 왜 또 울어. 응?”
너 때문이잖아, 이 씨발놈아. 달래주려는 심산인지 굳은살 박인 손바닥이 내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눈물을 닦아줬으나 내 심기는 오히려 더 불편해졌다.
내가 울음을 터트릴 때만 다정한 척 구는 저 빌어먹을 손은, 밤새도록 내 몸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자세를 잡게 하고,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누르고, 다리를 끌어올리던 손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휙 돌려 그 손을 피해버렸다. 녀석의 품에 안겨 있을 내가 고개를 돌려 봤자 소용 있겠냐마는, 어쨌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이었다.
“귀엽기는. 삐지지 마라, 강아지. 이제 정말 안 할 거니까 눈물도 그치고.”
안 믿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이젠 안 한다는 말을 네가 얼마나 많이 한 줄 알아? 내가 제발 그만해달라고 빌 때도,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찰 때도 한 말이잖아. 짜증이 치밀어 뭔가를 하고 싶었던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자 질끈 감은 눈꺼풀 위로 녀석의 어깨로 추정되는 단단한 것이 닿았다.
“그래서 우는 게 아닌가? 아파서 우는 거야?”
내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려서 그런지 되묻는 녀석의 어조가 심각해졌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네가 넣을까 봐 그런다고 이 망할 놈아. 마음 같아선 얼굴 바로 옆에 있을 놈의 귀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내 허리를 주무르고 있는 손이 또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짜증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아파? 어디가. 응? 여기? 아니면 여긴가?”
더 진지해진 최태혁이 허리를 안마해주던 것을 멈추고 몸 이곳저곳에 손을 댔다. 뭔가 불안한 흐름에 흠칫 몸을 굳히고 긴장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허리와 옆구리, 허벅지 순으로 주물거리던 손이 기어코 엉덩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아직도 화끈거리는 구멍에 녀석의 손가락이 닿아오는 느낌에 놀란 나는 파드득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아, 크흠, 흠, 아니. 아니야!”
쇠로 긁는 것같이 아픈 목을 울리면서 나온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불쌍할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중간에 헛기침을 해봐도 나아지는 게 전혀 없을 만큼 쉬어버렸다. 나는 더듬더듬 손으로 목을 감싸며 무릎으로 선 채 녀석의 얼굴이 있을 곳을 향해 눈을 굴렸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나와 눈이 마주친 최태혁은 한쪽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다. 뭐야. 또 뭔데.
“아니야?”
정색을 하고 되묻는 걸로 봐선 내 반말이 어지간히도 거슬린 모양이었다. 이 와중에 너는 그게 신경 쓰이는 거지, 이 치사한 새끼야. 나는 절로 삐죽여지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분한 마음을 가득 담아 녀석을 노려봤다. 자기가 한 짓이 있어 이렇게 하면 꼬리 내리는 시늉 정도는 해줄 줄 알았던 최태혁은, 끝까지 표정을 풀지 않고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눈싸움에서 진 것은 당연하게도 나였다.
“요. 아, 니, 에, 요! 요! 요!”
녀석이 원하는 말을 해준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괜히 어깃장을 부리면서 안 그래도 아픈 목을 혹사시켰다. 주먹을 옹골차게 쥐고 어깨를 내려치면서 소리를 지르려니 얼마 안 가 입에 피 맛이 느껴졌다. 최태혁은 씩씩거리는 나를 보면서 피식 웃고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기 다리 사이로 끌어당겼다. 어차피 계속 무릎으로 서 있기엔 허리가 아팠던지라 입을 비죽이면서도 얌전히 이끄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녀석은 칭찬해주듯 볼에 입술을 맞춰주었다. 내 눈에는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은 그 모습이 너무 가증스러워서 획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런데도 녀석은 굴하지 않고 따라와 눈물 자국이 남았을 눈가에 입을 대더니 그대로 말했다. 나는 입술이 움직이면서 닿아있는 피부를 간질이는 바람에 몸이 움찔 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고 녀석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 지르지 마. 목 상한다.”
“그건 형이...!”
“쉬- 착하지. 소리 지르지 말라고 방금 전에 말했을 텐데, 김진호.”
내 입술을 지그시 누르는 손가락과 단호한 어조에 나는 하던 말을 멈췄다. 저렇게 나오는 최태혁에게 반항하면 힘들어진다는 것을 학습한 몸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눈만 도르륵 굴려 녀석의 눈치를 봤다. 내 얼굴 여기저기 입을 맞추느라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그 얼굴에, 아주 희미하지만 미소가 걸쳐진 것이 보였다. 다행히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최태혁은 꽤 오랫동안 뽀뽀 세례를 퍼붓다가 지루함에 긴장 풀린 내 몸이 흐물거릴 때 즈음이 되어서야 얼굴을 뗐다. 그리고 축 늘어지는 내 몸을 다부진 팔로 감아 끌어당기더니 힘의 반동으로 자기 가슴팍에 떨궈진 내 머리 아래로 손을 넣어 턱을 쥐었다. 이내 고개가 젖혀지도록 턱을 들어 올린 녀석이 내 눈을 보면서 물었다.
“어디가 아파.”
잔잔한 미소가 곁들여진 다정한 물음이었다. 나는 퉁명스레 답했다.
“다요.”
“다 어디.”
집요한 자식. 저거 분명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거다. 막상 말하려고 보니 입 밖으로 내기 부끄러운 곳들만 떠올라 입만 우물거리는 날 보면서 슬슬 올라가는 저 입꼬리가 그 증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녀석은 계속 응? 응? 하면서 답을 재촉했다. 아 왜 저래, 진짜. 에이 씨발. 몰라! 말하긴 싫고, 말 안 하면 뭔가 또 자기 꼴리는 대로 할 것 같은데 그건 더 싫었던 나는 꾀를 부렸다.
“다 아파요. 다. 막 다 욱신거리고, 화끈거리고, 쓰라려요. 사실은 움직이지도 못하겠단 말이에요. 형이 이렇게 만들어놓고 왜 자꾸만 괴롭혀요. 잘해줘야지!”
필살 냅다 안겨 애교부리기 작전이었다. 흐물흐물한 내가 팍 움직일 줄 몰랐던 건지 방심한 손이 턱을 놓쳤고,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얼른 녀석의 품에 폭 안긴 나는 뻔뻔하게 굴었다. 하다 보니 이게 애굔지 그냥 투정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 어리광을 부렸다.
마지막으로 그만 좀 지랄하라는 내 사심을 가득 담아 잘해달라는 소리까지 곁들인 나는 온 힘을 다해 녀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최태혁 너 새끼도 이김에 허리 좀 아파봐라. 끊어질 것 같은 허리의 애환을 담아 녀석의 가슴에 내 볼이 짜부라질 정도로 힘껏 끌어안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작 녀석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오히려 목을 울리며 웃더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진호야. 형이 강아지한테 더 잘해줬으면 좋겠어?”
이거 진짜 양심 없는 놈 아니야. ‘더’를 왜 붙여, ‘더’를. 그럼 지금까지 잘해주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하지만 천하의 쫄보인 나는 감히 그걸 지적하는 대신 그냥 원하는 바만 이루기로 했다.
“네. 더더더더더 잘해줬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잘해준 것이 이 정도라면, 내가 원하는 정도가 되려면 이 정도 ‘더’를 붙이면 되지 않을까.
“구체적으로?”
최태혁은 나와의 실랑이가 재밌는지 계속 대답을 유도했다. 나는 녀석이 입에 대고 기울여주는 물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뭘 말해야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유리잔이 입술에서 떨어지자마자 제일 중요한 것부터 말했다.
“어제처럼 막, 기절한 사람한테 하는 건 안 좋아요.”
“그럼 기절을 하지 말았어야지.”
그러나 첫 질문부터 아주 어이없게 디펜스 당한 나는 순간 말문을 잃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오는 개소리에 벙찐 내가 멀거니 올려보자, 최태혁이 얄밉게 웃었다. 그게 너무 약 올라서 미처 수습할 새도 없이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이상한 말이나 질문도 좀 하지 말아요.”
“어떤 걸 말하는 거지?”
평소엔 과묵한 척하는 최태혁이 사실은 이렇게 능글거리는 사람인 줄 다른 사람들은 알까? 살짝 모로 기울어진 고개와 그린 듯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사람 성질을 살살 긁는 느낌이었다.
“이런 거요, 이런 거! 기절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게 도대체 말이에요, 방귀예요? 아니, 살려달라는 사람 실컷 괴롭혀서 기절시킨 게 누군...!”
울컥해서인지 내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녀석의 검지가 다시 한번 내 입술을 가로질렀다. 움찔 몸을 굳히고 눈동자만 굴려 확인한 녀석의 얼굴은 역시나 차갑게 굳어 있었다.
“김진호.”
최태혁은 침대 옆 협탁에 놨던 유리컵을 다시 집어 들면서 살벌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뇌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