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152)화 (152/234)

152화

최태혁의 눈이 나를 위아래로 훑는 것이 느껴졌다. 자기가 이렇게 만들어 놓고 뭘 또 훑어봐, 보기는. 잔말 말고 얼른 다시 바지랑 팬티 올려놔라, 진짜.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녀석을 노려봤다. 그러나 드디어 움직인 최태혁은 다시 옷을 입히는 대신 침대 위 이불로 나를 꽁꽁 싸매버렸다.

“이게 무슨, 악! 형!”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져서 당황한 내가 녀석에게 따지려고 소리를 높이자마자 엉덩이에 둔탁한 따가움이 느껴졌다. 이 새끼 방금 내 엉덩이 때렸어! 다시 소리를 지르면서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섣불리 소리 냈다가 녀석이 또 이상한 짓을 할 것 같아 나는 부들대며 입을 다물었다. 최태혁은 그 틈을 타 바깥의 노크한 사람에게 말했다.

“들어와라.”

달칵.

문소리가 들린 것을 보면 누군가 들어온 것 같은데, 최태혁은 그저 가만히 나를 안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어온 사람이 무슨 말을 할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는 아주 미세하게 들리는 발소리와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멍 연고만 두고 나간 것 같았다. 방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고, 뭘 하는 건지 이불을 씌운 채 가만히 있는 녀석에게 안겨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된 거, 그냥 그놈의 연고 얼른 발라버리자. 그러고 나서 재빠르게 옷을 입으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그날 그렇게 말해놓고 그 뒤에 만나면서는 단 한 번도 약속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래, 잊었을 수도 있어. 아니, 그것도 그런 게, 세상에 예쁘고 멋있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는데 내가 뭐라고 그런 약속을 기억하고 있겠냐고. 그때야 어쩌다 보니 우연찮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거고, 사실 나는 얘 취향도 아니잖아. 태연하게, 태연하게 나가자. 경계해서 더 이상하게 굴수록 얘를 자극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아주 태연하게 멍 연고만 바르고 자연스럽게 팬티와 바지를 입는 거야.

최대한 긍정적으로 결론을 낸 나는 녀석이 이불을 걷어내길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최태혁은 나를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뭔가를 하는 건지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뭔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잠깐 들리고, 이내 똑바로 앉은 녀석이 이불을 걷어냈다. 다시 환해진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멍 연고 뚜껑을 입으로 열고 있는 최태혁이었다.

참, 사서 고생한다, 너도. 경계를 푼 채로 보니 다 큰 성인들끼리 이게 무슨 꼴인가 싶은 한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녀석에게 말했다.

“이제 안 움직일 테니까 그냥 두 손으로 열어요.”

그 말을 들은 최태혁은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날 내려보더니 내가 한숨을 쉬며 눈썹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팔에서 힘을 뺐다. 나는 그거 잠깐 묶여 있었다고 그새 뻐근한 팔을 주무르며 정작 허리 부근을 덮고 있는 윗옷을 적당히 위로 걷었다. 그리고 손 위에 연고를 짠 후, 내게 다가오는 손가락을 보다가 문득 아까 몸이 기울어졌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태혁 뒤편에 놓인 작은 상자. 아, 아까 저기서 연고 꺼내느라 몸을 기울였던 건가 보네. 근데 연고 하나만 가져오면 될 걸 뭐하러 구급상자 채 들고 왔.... 잠깐. 저거 뭐야. 별생각 없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살펴보던 나는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물건들을 보고 멈칫, 몸을 굳혔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꼼꼼히 연고를 바르는 최태혁의 몸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가렸다가 보였다가 하는 저 물건들은 분명 본 적이 있는 것들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잘못 본 걸 거야. 그래야 해. 나는 겨우 풀었던 경계가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덤덤하게 녀석을 불렀다.

“...형.”

“거의 다 발랐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아니다. 아니 그것도 중요한데요. 그게 가장 중요하죠. 일단 연고 바르던 거 마저 발라주세요.”

자극하지 않겠다고 덤덤히 불러놓고 뻔뻔한 녀석의 말에 울컥해서 한마디 할 뻔했던 나는 하던 말을 억지로 삼키고 웃었다. 그리고 멈춰버린 최태혁의 손을 잡고 상대적으로 연고가 덜 발린 곳을 향해 쓱쓱 문질렀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던 녀석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으나, 다행히 손가락을 다시 내 몸에 문대자마자 시선을 내렸다. 나는 남몰래 안도의 숨을 뱉고 턱을 들어 상자 안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며 지나가는 투로 질문을 뱉었다.

“그, 연고 다 바르고요. 여기를, 그러니까 집을요. 집 소개 한번 해주실 거죠?”

“소개?”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저 여기서 지내야 하는 거잖아요. 그죠? 그래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나, 해서요.”

“흐음. 그건 그렇군. 그래, 소개라.”

좋아, 거의 다 됐어. 당황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한 보람이 있는지 최태혁은 갑작스러운 주제 변화에 대한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기뻐서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면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최태혁을 향해 쐐기를 박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얼른 나가자는 말을 뱉기도 전에 녀석이 선수를 쳤다.

“그런데 진호야.”

최태혁은 연고 뚜껑을 돌려 닫으면서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느, 네, 네?”

바닥에 휙 던져진 연고가 퉁, 하는 소리를 냈으나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최태혁의 손이 내 턱을 잡고 자기를 보도록 고정시켜 놨기 때문이었다. 또 나를 꿰뚫어버릴 것 같은 파란 눈. 시야 끝으로 어렴풋이 최태혁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뒤로 팔을 뻗은 모양이었다. 상자가 있는 방향이었다. 조금 있다가 녀석의 팔이 한 번 더 격하게 움직이더니 또 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뭘 던진 거지. 상자 안에 있는 것들 중 하나를 던졌다기엔 소리가 너무 가벼운데. 뭐지, 뭐야. 눈동자만 겨우 돌려 곁눈질을 해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전혀 아쉬울 틈도 없이 답을 알 수 있었다. 내 턱을 놓은 녀석이 나를 들어 자기 무릎 위로 올려놓는 바람에, 그 뒤에 있던 물건들을 그대로 볼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 전에 해야 할 걸 먼저 해야지.”

상자가 놓여있던 자리에는 그 안에 들어있던 러브젤과 콘돔들만이 어지러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점점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단단해져 가는 엉덩이 밑의 무언가. 최태혁은 놀라서 얼른 무릎으로 일어나려는 내 골반을 잡아 누르더니 한 손으로 내 윗옷을 잡고 한 번에 벗겨버렸다. 진짜 좆됐다.

“혀, 형. 형 저 지금, 지금 왔는데요. 저희 방금 집에 왔는데. 씻지도 못하고 아니, 저 연고 방금 발랐고요...!”

“김진호.”

“네, 네.”

습관처럼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벗어나 보겠다고 횡설수설을 시작했으나 어느새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차가운 최태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은 저절로 다물려졌다. 녀석은 잔뜩 긴장해서 더듬더듬 대답하는 나를 보면서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전에 분명히 말했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거라고. 네 입으로 직접 뱉은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었나?”

똑같은 무표정인 것 같으면서도 최태혁이 봐줄 때와 봐주지 않을 때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눈 깜박할 새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섭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며 나는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 맞아요. 제가, 제가 약속했어요.”

조금이라도 이 무서운 분위기가 풀리길 바라면서 순순히 대답했으나 녀석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저 그래, 하고 대답하면서 내 옆구리를 쓸었을 뿐이었다.

“흐읏-”

아까 아프지 말라고 문질러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손길에 몸이 저절로 흠칫 반응했다. 몸이 뒤로 움츠러들면서 무게 중심이 엉덩이로 쏠리게 되었고, 옷으로도 차마 숨겨지지 않는 최태혁의 페니스가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제 와서 못 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뭐, 내 똥강아지가 그 정도로 겁대가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녀석은 뒤로 물러난 내 몸을 다시 자기 앞으로 끌어온 후 내 팔을 자기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내 눈을 마주 보고 협박 같은 말을 늘어놓으면서 옆구리를 쓸어내리던 손을 슬슬 올렸다.

“아, 잠, 아아-!”

나는 유두를 잡고 당기는 손길에 파드득 놀라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내려가는 최태혁의 머리와, 곧이어 느껴지는 뜨겁고 축축한 감각.

“흐, 잠깐, 흐읏, 잠깐만요.”

예민한 꼭지를 빨고 깨무는 아찔한 감각에 나는 녀석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저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쪽만 집요하게 괴롭히던 최태혁은 너무 괴롭힘당해 아릿할 정도가 될 때쯤에야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떼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만 올리면서 웃더니 세상 얄밉게 속삭였다.

“자, 이제 어떻게 해줄까.”

긴 밤의 시작을 알리는 질문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