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151)화 (151/234)

151화

이거 집인 거지? 계단 위에 있는 커다란 대문에 그 사이로 보이는 정원과 적어도 3층은 되어 보이는 저택은 민선우네를 드나들며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다른 의미의 웅장함이었다.

가장 다른 것은 열려있는 문이 아니면 감히 집 안을 조금도 보여줄 생각이 없다는 듯 굉장히 높고 두꺼운 벽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거기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높고 높은 벽 위에는 창살같이 뾰족한 장식물이 얹어져 있고, 드문드문 설치된 기둥 위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설사 도둑이 들더라도 바로 잡힐 것 같아 보이는 집이었다.

하지만 날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양옆으로 뻗어져 있는 벽을 따라 죽 늘어서 있는 색색깔 셔츠의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뭔가, 그거 같았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조폭 집. 근데 우리나라 조폭은 저렇게 컬러풀하지 않지 않나. 마피아...도 아닌 것 같고. 삼합회는 상체 탈의하고 다닌다던데. 굳이 따지자면 야쿠자.....

너무 현실감 없는 현실에 무심코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헛기침 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흠흠. 본부장님께서 경비를 철저히 하시는 편이라서요.”

아무래도 너무 넋을 놓고 그들을 둘러보고 있던 내 모습에 좀 민망했던지, 종혁 씨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순한 얼굴로 수줍게 말해봤자 지금 내 눈엔 순하고 수줍어하는 조폭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와, 잠깐. 지금 제3자 입장에서 이렇게 딴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지금부터 이 요새이자 감옥 같은 곳에 들어가야 할 사람이 나인 거잖아.

왠지 여기 한번 들어가면 당분간 바깥세상은 보지 못할 것 같은 촉이 돋았다. 불안한 마음을 무시하지 못하고 반걸음 정도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어느새 허리에 감겨있던 팔에 퇴로가 막혔다. 최태혁은 의지와는 달리 오히려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뎌버린 나에게 다시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걸어.”

매우 간단명료한 명령에 나는 삐걱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몇 개의 계단을 오르고, 활짝 열려있는 대문을 지나 들어간 곳에는 밖에 있던 사람들과 달리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더 건장한 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설마, 이건 그건가. 순간 언젠가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고, 그들은 거짓말처럼 내 상상 그대로 뒤에 있는 최태혁을 향해 우렁찬 인사와 함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본부장님.”

“흡.”

충격과 감격 사이의 감정에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몸을 굳혔다. 최태혁이 조폭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내 평생 이런 광경을 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인사를 마친 사람들은 순식간에 정원과 집 주변으로 흩어졌다. 정해진 자리가 있는 듯 망설임 없이 걸어가 자리 잡고 선 그들은 바깥에 있던 사람들처럼 뒷짐을 지고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종혁 씨가 말한 경비의 일환이라고 할 건가 싶어 입을 벌린 채 종혁 씨와 최태혁을 번갈아서 보고 있자니 이번엔 최태혁이 입을 뗐다.

“...우리 회사 직원들이다.”

구라치지 마. 호칭만 형님 아니고 본부장이면 다인 줄 알아? 전부터 하는 거 보면 자기 직업을 숨길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굳이 또 정확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단 말이지. 그런 상황에서 먼저 아는 척하기도 뭐해서 모르는 척, 눈치채지 못한 척하면서 장단을 맞춰주고는 있었으나 이건 뭐 모른 척하면 멍청이가 되어버리는 수준이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허공만 보고 있는 최태혁을 힐긋대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자.

“우리 계속 여기 서 있어요?”

“아, 네. 들어가셔야죠. 저는 애들...이 아니라 경호원분들이랑 할 일이 좀 있어서요. 두 분 먼저 들어가시죠.”

저 건장한 사람들이 종혁 씨한테는 그냥 애들이구나. 키가 나보다 좀 크긴 했지만 딱히 조폭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사람도 확실히 그쪽 일을 하는 사람이긴 한가 보다. 어쨌든 나는 자연스레 나를 앞으로 미는 최태혁을 따라 드디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도 또 사람들이 있을까 했는데, 다행히도 넓은 내부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했는지도 몰랐던 긴장이 좀 풀려 작게 숨을 뱉었다. 그리고 작은 소리를 들은 건지 바로 뒤에 바싹 붙어있던 최태혁이 날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새 또 겁을 먹은 건가?”

“그런 거 아니거, 어, 어어억?”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몸을 돌려세운 녀석은 아까처럼 내 엉덩이를 받치더니 그대로 쑥 들어올렸다. 나는 뒤로 넘어질까 봐 얼른 녀석의 목에 팔을 두르고 피식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내는 얄미운 녀석을 째려봤다.

“좀! 왜 자꾸 사람을 막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그래요! 무슨 힘자랑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저 겁먹었던 거 아니거든요? 그냥 좀 놀란 거거든요?”

최태혁은 내가 그를 향해 따지든 말든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집 안으로 걸어가며 대꾸했다.

“네가 행동이 너무 굼뜬 탓이다.”

“제가요? 제가 행동이 굼뜨다고요?”

아니 방금 한 행동이라고 해봤자 집에 들어온 게 다인데, 굼뜨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맥락 없는 비난에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녀석은 몇 걸음 가지 않아 넓어 보이는 거실을 통과해 위층으로 이어진 계단까지 도달했다.

“혀, 형. 아무리 그래도 계단은 제가 올라가는 게...!”

“팔 다시 감아. 뒤로 넘어가면 다친다.”

그래, 내 말을 들으면 네가 최태혁이겠냐. 내려달라고 녀석의 어깨를 밀면서 상체를 뒤로 젖히자마자 잠시 멈춰선 녀석은 내가 다시 녀석의 목을 끌어안자마자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근데 원래 집에 들어오자마자 침실로 직행하나? 나 여기 처음인데? 보통은 거실부터 천천히 둘러본 다음에 앞으로 여기서 지내면 된다면서 지낼 곳을 보여준다거나,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이층에 올라와서도 별다른 말 없이 한 곳을 향해 직진하는 최태혁의 모습이 영 찜찜했다.

그렇게 아이처럼 달랑 들려서 도착한 곳은 아주, 매우, 엄청나게 큰 검은색 침대가 떡하니 자리한 커다란 방이었다. 이젠 찜찜함을 넘어 등골이 서늘했다. 최태혁, 너 왜 걸음걸이가 여유로워졌냐? 방문은 왜 그렇게 꽉 닫아. 나는 왜 또 침대에 내려놓는 거지. 뭔지 모르겠지만 침대와 멀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드는 녀석을 향해 변명하듯 말하면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혀, 형. 저 그, 옷 밖에서 입던 거라 이대로 침대에 앉는 건 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돌린 최태혁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침대를 향해 턱짓했다.

“앉아.”

“넵.”

젠장.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냉큼 앉아버리고 말다니. 거기다 한술 더 떠 녀석은 내가 앉는 걸 보고 강아지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전화 너머의 사람에게 ‘멍 연고’를 가지고 오라고 말하더니, 핸드폰을 침대 저편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침만 꼴깍 삼키고 있는 나를 향해 말했다.

“옷 벗어.”

내가 뭘 들은 거지.

“..에, 네?”

너무 태연한 얼굴과 내 귀에 들어온 내용이 매치가 되지 않아 어벙하게 되물었다. 멍 연고를 가지고 오라 그랬는데 왜 옷을 벗어야 하는 거야.

“허리 부근이니까 바지까지 벗는 게 좋겠군.”

아닌데. 바지도 윗옷도 벗을 필요 없이 그냥 좀 들춰서 바르면 되는데?! 나는 나를 향해 뻗어오는 녀석의 손을 피하면서 냉큼 외쳤다.

“아니, 아니요! 그, 연고 주시면 제가 발라도 되거든요? 저는 옷 안 벗고도 잘 바를 수 있거든요?!”

그러나 아무리 민첩하게 피해도 침대 위였다. 녀석은 나랑 놀아준다는 표정으로 몇 번 헛손질을 하더니, 이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팔을 뻗어 날 낚아챘다. 나는 상체가 묶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발버둥을 쳐 봤지만, 날 옥죄고 있는 팔은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녀석은 내 발버둥은 아랑곳하지 않고 남은 손으로 내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위험해! 연고고 뭐고 이건 위험하다고!

“잠깐만요! 이상하잖아요! 연고는 허리에 바르는데 왜 바지를 벗냐고요! 저기요, 형! 혀,”

똑똑.

말로라도 반항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던 내 입을 막은 것은 노크 소리였다. 내 바지를 벗기는데 열중하던 최태혁도 노크 소리를 들었는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

“왁! 왁! 왁! 잠깐! 잠깐만요!”

나는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보다가 기겁하며 소리 질렀다. 발버둥을 치며 최대한 반항하긴 했지만, 내 바지는 이미 거의 다 벗겨진 상태였다. 심지어 무슨 심보인지 몰라도 팬티까지 같이 내리는 바람에 팬티도 내 무릎에 걸쳐져 있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뭐? 들어오라고? 야 너 진짜 미쳤냐?!

나는 뻔뻔하게 왜 부르냐는 얼굴을 하고 날 보는 최태혁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형, 지금, 제 꼴을 좀 보고 말을 하시죠.”

행여나 밖에 있는 사람에게 들릴까 봐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느라, 이를 꽉 악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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