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 (150)화 (150/234)

150화

“그러니까 다음부턴 생각도 하지 마. 어차피 넌 다 보이니까.”

“훌쩍, 무슨 진짜 관심법 쓰는 것도 아니고....”

분함이 좀 가라앉은 나는 씨근덕거리면서 중얼거리고 다 걷어 올려져 있던 옷을 조금 더 잡아당겨 콧물과 눈물을 대충 닦았다. 최태혁은 내가 얼굴을 정리한 뒤 밀려오는 창피함을 해소하기 위해 손가락을 꼼지락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애도 아니고 왜 갑자기 그렇게 터진 거지. 요즘 감정 컨트롤이 잘 안되는 건 알았다만, 그게 이렇게 튈 줄은 나도 몰랐다. 뭔가 정새빈이랑 쌍둥이들이 계속 애 대하듯이 우쭈쭈거려서 그래. 나쁜 버릇이 들어버렸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책임 전가를 하던 나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하도 쳐다봐서 뚫릴 것 같은 뒤통수를 가리면서 중얼중얼 변명했다.

“저 진짜 원래 잘 안 울어요. 이상하게 저번부터 뭔가 자꾸 애처럼 울어버렸는데, 진짜 눈물 없어요, 저.”

“그래.”

쌍둥이들이라면 엄청 놀려댔을 텐데, 역시 최태혁이라 그런지 별 놀림 없이 바로 내 말에 수긍해주었다. 동갑인데 어쩜 이렇게 다르냐, 진짜.

“확실히 눈물보단 콧물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더군.”

뭐 임마? 제법 형 같다고 생각하자마자 들리는 말에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날 향해 코웃음을 날리며 저를 흘겨보는 내 코에 딱밤을 날렸다.

“악!”

솔직히 소리 지를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었지만, 바로 앞을 스치고 지나간 손가락에 놀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버렸다. 얼얼하게 아픈 코를 감싸고 반사적으로 감겼던 눈을 떴을 땐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온 최태혁이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또 무슨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한 나는 몸을 움츠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경계 태세를 취한 것이 무색하게, 녀석은 그저 내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나직하게 질문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왜 잘 못 지냈는지는 말 안 할 건가? 콧물을 그렇게 흘려대며 낑낑거리는 와중에도 그에 대해선 별말이 없으니 오히려 더 궁금해져서 말이야.”

힘들게 하는 놈들 있으면 일러바칠 사람 필요하다면서. 최태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내 머릿속까지 다 들여다보는 것 같은 파란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슬쩍 눈을 옆으로 굴리자마자 녀석의 손이 피하지 말라는 듯 내 턱을 쥐어왔다. 왜 이렇게 집요한 거야. 습관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기 위해 이를 세웠는데 이에 느껴지는 촉감이 영 단단했다. 뭔가 싶어 눈을 아래로 내려 확인하니 내 입술을 꾹 누르고 있는 녀석의 엄지손가락이 보였다.

순간 얄미운 마음에 제 발로 들어온 엄지손가락을 한 번 콱 물어준 후, 녀석의 손목을 잡아 내린 나는 축축해진 상의 밑단을 잡고 늘리며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전부터 좀 곪아있던 문제가 터져서 그래요. 거기다 전에는 없었던 일이 자꾸 생기기도 하고, 또 엊그제는 좀 이상한? 아니, 이상하다기보단 좀 잊고 있었던 일이 꿈에 나와서요. 아무튼 잘 지내지 않은 건 아닌데, 좀 복잡해서 잘 지냈다는 소리가 안 나왔달까.”

문득 저번에 최태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말을 하다 보면 정리가 된다는 말. 혼자 생각만 할 때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짚어보려고 해도 갑자기 저 일이 생각났다가, 이 일이 생각나는 등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원체 딴생각으로 잘 빠지는 성향이기도 하고, 일을 하느라 생각에만 몰두하지 못했던 것도 있어서 하루종일 고민하고 있었음에도 계속 심란하고 복잡스러웠다.

“제가요, 품고 있으면 아픈 걸 알면서도 계속 놓지 못하던 것들이 있었거든요? 전 아픈 걸 되게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그것만은 절 아프게 하는 걸 알면서도 계속, 계속 포기를 못 했어요. 진짜 소중했거든요. 언젠가는 날 안아줄 거라고,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할 거란 희망도 있었고요.”

확실히 말로 하면서 내 머릿속도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집요한 녀석의 강요에 못 이겨 말하는 거란 생각에 퉁명스럽던 말투는 뒤로 갈수록 평소 말투로 돌아왔다. 나는 이제 알아서 술술 나오는 말을 그대로 뱉어내며 내 허리의 붉은 자국 위를 덮고 있는 손 위에 슬며시 손을 올려놓았다.

“근데 그 희망이 깨지는 일이 있었어요. 아아, 이건 계속 아픈 거구나. 나를 앞으로도 아프게 하겠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그게 엄청, 진짜 엄청 버겁고 슬퍼서 정신이 나가더라고요? 제가 그래도 나름 멘탈은 세다고 자부하는데 그땐 진짜, 진짜 힘들었어요.”

마침 정새빈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살려고 별짓을 다 하며 발버둥 친 것도 잊고 삶의 의지를 포기해버릴 수도 있었을 만큼. 나는 그 말을 삼키면서 우물거리던 입을 잠시 다물었다. 삶의 의지. 죽음. 생각만 해도 뒷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생각들 때문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녀석의 손을 잡아 들어 위치를 조정했다. 허리에만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가 이젠 배 중앙에서 느껴졌다.

“근데 또 바보 같은 게, 알면서도 그게 자꾸 안 버려지는 거예요. 제가 이래 봬도 욕심이 많이 없는 편인데요, 근데 그건 진짜 제가 꾸준히, 한평생 갖고 싶어 했던 거라서 그런가. 차마 스스로 포기가 안 되었어요. 그래서 몇 날 며칠 계속 끙끙대면서 고민만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말을 이으면서 나는 최태혁의 손이 핫팩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옮기며, 그 온기로 몸을 데웠다. 이쪽 옆구리, 반대편 옆구리, 다시 허리랑 배. 최태혁은 자기 손으로 뭐 하는 거냐고 따지는 대신 내 등을 받치고 있던 팔로 내 몸을 더 감싸 당겼다.

“추운가 보군.”

“어? 아니, 괜찮은데....”

원래도 붙어있던 몸은 이젠 내 볼이 녀석의 어깨에 반쯤 눌릴 만큼 밀착되었다. 자세가 불편해 놓쳐버린 녀석의 손은 수동에서 자동이 된 것처럼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 내가 짚었던 곳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온기를 전달하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어딘가에 꽉 안겨 약간 답답한 것도 은근히 안정감이 들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원래 하려고 했던 놓아달라는 말 대신 슬쩍 눈을 감았다.

“그래서. 고민은 끝났나?”

녀석이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안겨있던 내 정수리에 턱을 괴고 물었다. 고민. 내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명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어떻게 해야 편해지는지는 너무 명확해서 섣불리 결론짓기 어려웠던 고민. 이게 뭔 개소린가 싶지만 지금 내 마음이 그랬다.

버리고 싶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버려야 하는가 생각하다가도 어떻게 하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뇌한다. 그들이 내게 잘해주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원망하다가도 문득 같이 웃었던 기억들과 그래도 내게 있어 부모였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후회한다. 내 가슴에 생채기를 낸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학대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흉악한 단어로 정의될 정도는 아니었다고 부정하고, 원인을 나의 잘못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용서하고 싶어 했다.

정새빈 덕분에 모든 것을 외면하고 지내면서 잠깐동안 괜찮았고, 쌍둥이들 덕분에 간헐적으로 웃으며 겨우 견뎠지만 내 마음을 한번 무너트린 절망은 착실히 그 덩치를 키워갔다.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고 스스로에게도 몇 번이나 되뇌었지만 결국 결론은 모두 ‘모르겠다.’로 귀결되었다. 그러다 그 꿈을 꾼 것이었다.

“끝난 건 아니에요. 끝난 건 아닌데, 전보단 조금 더 보이는 것 같아요. 그… 음.... 확인… 하고 싶은 것도 생겼고요.”

딱 맞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망설이던 나는 그냥 가장 먼저 떠올랐던 대로 말했다. 확인. 내 감정을 담기엔 다소 딱딱하고 차가운 단어였지만 의미는 맞으니까.

“확인?”

최태혁의 되묻는 말에 나는 입을 오므리고 눈을 굴렸다. 앞으로 내가 할 일들을 말하려니 부연설명할 것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막막했다. 그러나 내가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달칵, 소리가 나더니 차 문이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습니까, 본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진호 씨.”

문손잡이를 잡은 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해온 사람은 종혁 씨였다. 도중에 말이 끊기긴 했으나, 그렇다고 도착했는데 계속 차 안에서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우선 내리고 보자. 나중에도 최태혁이 계속 궁금해하면 이어 말해주고, 아니면 나 혼자 계획 정리하면 되지 뭐.

나는 최태혁을 힐긋 한 번 올려다보고 내 등을 살짝 밀어주는 손길을 따라 차 밖으로 발을 내밀며 종혁 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종혁 씨이이...?”

그리고 예의 바르게 시작한 인사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이상하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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