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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 (149)화 (149/234)

149화

“대답.”

“느, 네!”

귀에 바로 속삭이는 명령조에 겨우 대답은 했지만, 놈의 팔이 점점 허리를 부러트릴 것 같이 조여오고 있어 신경이 자꾸 그쪽으로 쏠렸다. 아파, 아프다고. 순식간에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워진 녀석의 말투와 표정이 아니었다면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녀석은 그런 내 귀에 뭐라고 또 속삭였다.

“말고.”

“...네?”

뭐, 뭔데. 너 나한테 뭐 물어봤었어? 아무튼 뭔지 몰라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까진 계속 이 상태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방금 했던 대화를 되짚어봤다. 설마 그건가? 생각? 무슨 생각을 했길래 딸꾹질 멈췄냐고? 미친, 그거 대답 안 했다고 사람 허리를 부러트린다고? 아니, 하다 하다 이제 생각도 마음대로 못하는 건가 싶어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급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했다.

“별, 별거 아니고요. 그냥, 그거요. 그거! 아니, 씨발, 아프, 아파!”

“욕.”

“죄, 죄송, 아니 저 그거요, 약속! 우리 약속 생각했어요! 갑자기 그게 생각나서 놀라서, 그래서 딸꾹질 멈춘 거 같아요!”

하, 살았다. 아파서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온 답이었지만 다행히 녀석의 마음에 들었는지 허리를 옥죄고 있던 팔 힘이 약해졌다. 숨이 턱 막힐 만큼 조였던지라 거친 숨을 쉬면서 얼른 옷을 들춰봤다. 역시 예상대로 팔이 둘러진 자리가 붉었다. 이게 뭐야. 멍들 것같이 붉잖아. 생각보다 더 엉망인 살갗 색깔을 보고 나니 속에서 울컥 짜증과 서러움이 치솟았다.

내가 뭐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생각만 한 건데. 갑자기 이게 무슨 봉변이야, 씨발. 지켜주고 뭐고 한다더니 지가 젤 크게 상처 내고. 나는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 나름 반가웠는데. 먼저 안부도 묻고 그랬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가라앉았던 숨이 다시 가빠지고 눈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톡,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남궁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진짜 꺼져라. 내가 씨발, 우리 곰돌이 몸 함부로 하지 말라고 아까부터 몇 버읍! 읍!”

그래! 꺼져라! 내 편을 들어주는 남궁후의 말에 힘을 얻는 나는 나도 한마디 하기 위해 팔로 눈을 대충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어느새 뒤에서 다가와 다시 남궁후의 입에 천을 쑤셔 넣고 테이프를 붙이고 있는 사람을 보고 한마디는커녕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읍읍! 읍!”

“김진호.”

요 며칠간 같이 지내면서 얼마나 건장한지 몸소 느껴봤던 나로선, 내가 절대 이길 수 없었던 남궁후가 속절없이 끌려가는 모습이 적잖이 무섭게 다가왔다. 거기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전에 없이 차가워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도망은 없다고.”

몸부림치면서도 점점 멀어지는 남궁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돌려세운 최태혁은 커다란 손으로 내 목과 턱을 그러쥐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금방이라도 내 목을 조를 것 같은 손을 애써 무시하며, 녀석을 진정시키기 위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 채 말했다.

“언, 제가 언제 도망갔어요. 저는, 저는 그런 적 없는데.”

“김진호.”

더듬더듬 변명하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최태혁은 천천히 손을 올려 부들거리는 입꼬리를 문지르며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불렀다.

“네, 네?”

“다시 한번 말할 테니 잘 들어. 아주 잠깐이라도, 찰나라도 ‘도망’은 네 머릿속에 없어. 그런 단어 자체가 아예 없어야 할 거야.”

눈을 피하지도 못하게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말하는 녀석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없이 바로 나간 대답 속도가 만족스러웠는지 녀석은 이내 내 볼을 톡 치며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 멀어지는 녀석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몸을 완전히 떨어트린 최태혁은 그런 내 얼굴을 얼마간 관찰하더니, 앞머리를 넘겨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진호야.”

아까와 달리 성이 붙지 않은 이름은 퍽 다정한 어감으로 불렸으나, 잔뜩 겁먹고 있던 나는 흠칫 몸을 떨며 대답했다.

“네, 네. 제, 제가 도망 절대 안 가는 진호입니다!”

바짝 긴장한 모습이 웃겼는지, 아니면 겁먹은 것이 분명한데도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하는 내가 웃긴 건지, 최태혁은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나는 아까 남궁후가 끌려가는 모습이 자꾸 떠올라, 아직도 무서워 죽을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녀석을 따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해 다시 손을 뻗는 최태혁을 보고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맞을 수도 있어. 맞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싶어 몸에 힘을 잔뜩 주는데, 예상과 달리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겁먹은 게 불쌍해서 마음을 바꾼 건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조심스레 실눈을 뜬 나는 바로 눈앞에 있는 최태혁의 얼굴을 보고 흡, 숨을 들이마셨다.

녀석은 놀라서 휘둥그레진 내 눈가에 입을 맞추더니 내 팔을 들어 자기 목에 감았다. 그러더니 내 엉덩이를 받힌 채 그대로 나를 들어 올렸다.

“어어?!”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붕 들리는 몸이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녀석의 목에 엉성하게 둘러져 있던 팔에 힘을 주고 매달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녀석에게 앞으로 안긴 아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다리 감아.”

얼떨떨한 얼굴로 자기만 보고 있는 나에게 최태혁은 자기 허리에 다리를 감으라면서 엉덩이를 토닥였다. 놀라긴 했어도 무서운 감정은 그대로라 녀석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자세가 안정된 것이 느껴졌는지 녀석은 나를 들고 있으면서도 전혀 힘들지 않은 기색으로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겁먹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내게 훨씬 다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겁먹고 무서워할 거, 왜 하지 말라는 짓을 자꾸 하려고 해. 아픈 것도 싫다면서. 응?”

녀석은 언제 그렇게 화를 냈냐는 듯이 마치 아이를 어르는 듯이 말하면서 엉덩이를 토닥였다.

“지켜주겠다는 약속이 뭐라고 내가 얼마나 바쁘게 지내는지 모르겠지, 내 똥강아지는. 그러니까 오랜만에 만나서 화부터 나게 하는 걸 거야. 그지?”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것이, 방금 전까지 찍소리도 못할 정도로 겁을 먹어놓고 다시 다정해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긴장이 살살 풀렸다. 그리고 긴장이 풀리면서 아까 꾹 눌러 참았던 억울함과 서러움이 슬슬 차고 올라왔다. 나는 답을 기다리듯 말을 잇지 않는 최태혁을 향해 몇 번 입을 우물거리다가 코를 훌쩍이면서 변명했다.

“화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래, 정말로 그러려고 했으면 이 정도로는 안 끝났을 거다.”

최태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어떤 차 앞에 내려놓았다. 녀석은 문을 열고 자기가 먼저 타더니 내게 손을 내밀더니 천천히 잡아당겼다. 나를 자기 다리 사이에 비스듬히 앉힌 최태혁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내 옷을 들춰보는 것이었다. 녀석의 시선을 따라 눈을 내리니 아까보다 더 붉어진 것 같은 피부가 보였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아픈 곳을 꼼꼼히 살펴보던 최태혁은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아주 어이가 없어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멍들겠군. 많이 아픈가?”

“이씨, 내가 그러니까 아까 아프다고, 아프다고 했잖아요! 이게 뭐야. 흐어어엉- 아프게 하는 거 싫어한다고 내가, 훌쩍, 내가 형한테는 말했는데! 내가 씨발, 크흥, 도망을 간 것도 아니고 그거 잠깐 무서워서, 훌쩍, 그래서 그냥 생각만 한 건데!”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해 죽겠는데. 갑자기 나타나선 남궁후를 그렇게 잡아가지 않나, 나 아프게 하지 않나. 진짜 정신 하나도 없는 하루가 다 최태혁 탓 같고 존나 억울한데 또 서러워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까 그렇게 살벌하게 굴던 최태혁은 이번엔 묵묵히 내 한풀이를 들어주며, 눈물을 닦아주고 엉덩이를 토닥이며 나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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