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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48화 (148/234)

148화

“데리고 와.”

그 의미 모를 명령이 무슨 뜻인지는, 녀석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차 뒤편에서 덩치가 커다란 사람에게 양팔이 잡힌 남궁후가 끌려 나오고 있었다. 분노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입에 둘러져 있는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정새빈보단 나을 거라고 장담하더니.”

“읍, 읍읍!”

남궁후는 자기 나름대로는 뭔가 열심히 소리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당최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다만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지지대 삼아 최태혁 쪽으로 공중 발차기를 날릴 정도로 지금 상황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 남궁후의 혼신의 일격을 최태혁은 딱 반걸음만 물러서 아슬아슬하게 피한 후 피식 웃어 보였다. 제 3자인 내가 보기에도 너무 얄미운 얼굴이었다. 와, 내가 남궁후였으면 발차기 한 번 더 하고 싶겠는데.

그러나 녀석에겐 안타깝게도, 졸지에 자기 상관에게 발차기하는 걸 도운 꼴이 되어버린 덩치들이 최태혁의 눈치를 보며 각자 한 발씩 녀석의 발을 꽉 밟아버렸다. 그리고 최태혁의 턱짓 한 번에 입에 붙어있던 청테이프를 아주 가차 없이 떼버렸다.

“악!”

어후, 저 빨개진 것 좀 봐. 그동안 쌓인 정이 뭔지 살이 뜯어져 나가는 것 아닌가 하는 소리에 걱정이 되었던 나는 슬금슬금 남궁후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움직이자마자 나를 향하는 덩치들의 눈초리가 무서워 완전히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으나, 그나마 가까이서 살펴본 결과 다행히 피 나는 곳은 없어 보였다. 내가 다가오는 것을 힐긋 쳐다본 남궁후는 다시 최태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평소와는 달리 아무 표정 없는 낯을 하고 있었다.

“분명 온전히 자기 힘만 쓰기로 한 거 아니었나? 이렇게 사람 쓰기 있는 거야? 그럼 나도 부를 사람이 적진 않은데.”

“안타깝게도 그건 내게 별로 위협이 될 만한 소리가 아닌 걸 네가 더 잘 알 텐데.”

차분한 목소리로 빈정거리는 남궁후에게 최태혁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며 앞으로 나가 있던 내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겨 다시 자기 옆으로 세웠다. 그리고 갑작스레 뒷걸음질을 하게 된 내가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질 뻔한 것을 손가락 힘만으로 지탱해주었다.

이럴 땐 갑자기 잡아당기지 말고 말로 하라고 뭐라 해야 하는 거야, 아님 잡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순간적으로 고민에 빠져 아무 반응을 못하고 있는 새, 남궁후가 먼저 이를 으득 갈며 최태혁을 향해 일갈했다.

“애 함부로 다루지 마.”

최태혁은 자기를 보고 있는 남궁후에게 보란 듯이 내 허리를 잡아 자기 쪽으로 바짝 붙여 세웠다.

“잘 지냈냐는 질문에도 답하지 못할 만큼 형편없이 돌보고 있던 네 놈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그건...!”

졸지에 최태혁의 몸에 뭉개지듯 찰싹 붙게 된 나는 이게 도대체 뭔 소용인가 싶었으나, 내 예상과는 달리 효과가 탁월했다. 내 허리에 손이 감기자마자 남궁후의 무표정했던 얼굴이 확 일그러졌던 것이었다. 거기다 최태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녀석의 분노어린 눈빛에 당황이 섞이기 시작했다.

내가 잘 지내고 말고 하는 일이 얘네들이 이렇게 싸울 정도로 중요한 일일 줄은 몰랐는데. 좀 당황스러운걸. 아무튼 내가 잘 지냈다고 말하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였으므로 남궁후에 대한 오해는 풀어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허리에 둘려져 있는 녀석의 팔을 두 손으로 밀어내면서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아니, 저 나름 잘지냈....”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가만히.”

“악! 잠, 잠깐만요! 허리 끊어져요!”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몰라도 최태혁이 아주 허리 끊어먹을 기세로 팔을 조여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녀석의 팔을 밀치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고, 심지어 꼬집기도 했으나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나는 결국 자진해서 녀석의 몸통을 끌어안으면서 소리 질렀다.

“가만히 있을게요. 얌전히 있을 테니까 이거 좀 놔줘요, 좀! 아프다고요!”

그제야 조금 느슨해진 팔에 나는 울상을 하고 아픈 부근 주변을 문질렀다. 아직 팔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어서 그 부근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붉은 자국이 남아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정면만 보고 있는 최태혁의 옆얼굴을 째려보면서 입을 비죽였다. 개새끼, 진짜. 맨날 제멋대로 하는 새끼.

“함부로 다루지 말라고. 귀 막혔냐? 아니면 너무 처맞아서 방금 한 말도 기억 못할 정도로 지능이 떨어진 거야?”

“충분히 살살 다루고 있는 중인데.”

아닌데. 살살 아닌데! 나는 맞는 말하는 남궁후에게 얄밉게 받아치는 최태혁의 행태에 결국 못 참고 한마디 해주기 위해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사자후처럼 어디서 구라를 치냐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내 이마에 내려앉은 부드러운 감촉에 헉, 소리를 내며 동작을 멈췄다.

“사실 살살 다루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예뻐도 해주고 있긴 하지.”

이마 다음으로 눈가에도 입을 맞춘 최태혁은 허리에 두른 팔을 조금 풀어내더니, 아직도 욱신거리는 부근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안에 들어온 손가락은 아주 조심스레 피부를 살살 쓸기 시작했다.

“...딸꾹.”

그리고 너무 놀라서 딸꾹질을 시작한 나를 향해 피식 웃으면서 나머지 손으로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가자. 데리러 왔다.”

“딸꾹.”

갑작스러운 주제 변화 뭐야. 방금 전까지 남궁후와 대치하던 최태혁은 손바닥 뒤집듯 분위기를 바꾸더니 자꾸 내 허리를 지분거렸다. 방금 전까진 욱신거리던 곳을 만진 터라 살짝 쓰라리기만 했었는데, 어느새 아프지 않은 곳까지 올라온 손가락이 예민한 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손, 딸꾹, 빼요.”

“싫다.”

그래, 내 말을 한 번에 들어주면 최태혁이 아니긴 한데, 이상한 소리가 나오는 걸 참는 것도 한계라는 것이 있으니 진짜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도대체 무슨 흐름인가 싶었는지 벙찐 남궁후와, 안 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는 덩치 두 명을 보며 나는 자꾸 더 올라오고 있는 최태혁의 손을 잡아 내렸다. 다행히 순순히 잡혀 나온 손은 다시 옷 위로 내 허리를 감싸며 조금 떨어져 있던 틈을 없애버렸다.

“뭐하냐, 최태혁. 뭘 데리러 와. 내가 순순히 보낼 거 같아?”

최태혁이 지랄하는 사이 남궁후가 정신을 차렸는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최태혁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한 채, 사지가 잡혀 있는 남궁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맞받아쳤다. 진짜 너무 얄미워서 남궁후 대신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그 꼴을 하고도 입은 살았군, 남궁후.”

“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네게 맡겨두었으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당연히 내가 데려가는 거다. 그게 가장 최선이기도 하고.”

최태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이 격하게 몸부림치는 남궁후 쪽은 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곁눈질로 녀석을 보는 내 시야를 손으로 가리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굴러가는 상황을 보자니 이번에 나는 이 녀석에게 돌봄을 당할 예정인 것 같았다. 정새빈 다음엔 쌍둥이, 그다음은 너구나.

나는 습관적으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 그럼, 딸꾹. 이번엔 저 형, 딸꾹. 형이랑 사는 거예요?”

“..음. 생각보다 납득이 빠르군.”

납득을 안 한다고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개인적으로 아직 집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고. 새로운 환경은 별로인 데다 적응한 현실에 안주하고 말아버리는 아주 게으른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대로 지내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쌍둥이를 따라올 때 깨달은 상태였다. 내가 뭘 어쩌든 결국 녀석들이 원하는 대로 된다는 진리를.

그러므로 괜한 반항을 해서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다 떠나서 나 하나 데리고 가겠다고 사람을 이렇게 데리고 온 놈한테서 어떻게 도망가. 그나마 유일하게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남궁후도 저렇게 묶여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자기랑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최태혁의 말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경험상 따라가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막 때리고 밥 안 주고 그러진 않을 것 같으니까. 혼자 집에 가거나 툭하면 쌍둥이 두 명한테 덮쳐지느니 차라리 따라가는 쪽이 낫....

“아.”

잠깐. 나는 갑작스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과거의 기억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잖아. 내가 자진해서 새끼손가락 내걸면서 했던 빌어먹을 약속. 방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박스 안 내용물도 주르륵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 일 이후로 혼자 온갖 각오를 했지만, 녀석이 바빠져서 나 혼자 이불킥한 거 빼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었다. 하지만 같이 산다면 얘기가 달랐다. 분명 전화로 약속을 지키라고 했던 최태혁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듬뿍 담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딸꾹질이 멈췄을까.”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은 원래 포기가 빠르면 좋지 않은 법이었다. 한번 떠올리고 나니 아까부터 계속 말도 안 되는 굵기와 길이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정새빈이랑 쌍둥이도 꽤나 큰 편이었으나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컸던 최태혁의, 놈의, 그, 그! 안돼! 도망가야 해! 내 힘만으로는 금방 잡힐 테니까 남궁후를 풀어줘야겠어.

나는 일단 내 허리에 풀린 손을 풀어낸 후 재빨리 튀어 나가 덩치들의 거시기를 차서 남궁후를 풀어줄 계획을 세웠다. 그럼 내가 도망갈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 또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논리적인 생각은 일단 제쳐두었다. 지금 벗어나면 내일은 또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결심한 나는 최태혁의 팔을 살살 달래듯 쓰다듬었다.

“저기, 형. 저 허리가 자꾸 너무 아파서요, 저기 잠깐만 이거 좀 풀어주시면....”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최태혁은 결코 내 뻔히 보이는 수작에 속아 넘어가 주지 않았다. 녀석은 힘을 빼주었던 팔에 다시 힘을 주고 꽉 조이면서 내 이름을 한 자 한 자 씹어뱉었다.

“김진호.”

고개 들어. 최태혁의 단호한 명령에 나는 삐꺽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돌려 최태혁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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