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형이 왜 여기에 있어요...?”
너무 놀라서 되레 놀랍지 않은, 그런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게 뭔가 싶고, 얘가 여기서 왜 나오나 싶어 질문이 어벙하게 나갔다.
최태혁은 내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나를 담고 있던 눈동자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남궁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핸드폰이 있었다.
- 진호야! 야, 김진호!
“아, 저 잠깐 제가 전화를 건 거라서요. 그, 오랫동안 저를 기다리,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일단 저 전화 좀 받을게요. 여, 여보세요? 형?”
전화를 걸어놓고 아무 말이 없어서인지 남궁후는 내 이름을 매우 다급하게 부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핸드폰만 보고 있는 최태혁에게 왠지 모르게 변명을 하던 나는, 점점 커지는 녀석의 목소리에 냉큼 핸드폰을 귀에 대고 답했다.
- 무슨 일이야? 전화해놓고 왜 말이 없어? 너 잡혀간 줄... 아니, 아무튼. 놀랐잖아!
적잖이 놀랐는지 녀석은 말끝에 안도의 한숨까지 쉬었다. 아무 연락도 없이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래도 기다리게 한 입장으로서 사과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그게요, 저기. 일단 늦어서 죄송해요. 일하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저 지금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는 중인데요. 그, 안에서 좀, 상상도 못한 사람이랑 마주쳐....”
그러나 나는 내 앞에 내밀어지는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말을 멈추고 다시 위를 올려다봤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눈은 또 나를 향해 있었다.
뭐야, 뭔데. 위를 향해 있는 손바닥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손바닥과 최태혁의 얼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던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핸드폰을 든 손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이거요?”
놀랍게도 최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답을 받고 나서 나는 더 혼란에 빠졌다. 왜 갑자기 핸드폰을 달라는 거야. 나 지금 말하고 있는 거 안 보이나? 뭔데. 점점 더 깊어지던 미간의 주름은, 녀석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눈을 크게 뜨느라 쫙 펴졌다.
“이런 유치한 거짓말을 다 하고. 간이 붓다 못해 터졌나 보지, 남궁후.”
내 핸드폰을 채간 녀석은 아주 살벌하게 웃으며 남궁후에게 일갈했다. 남궁후 녀석, 무슨 거짓말을 한 건지는 몰라도 살고 싶으면 도망가야 할 것 같은데 어쩌냐.
“아아, 그건 네가 알 필요가 없고. 되도록 빨리 거기서 꺼지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요즘 신경이 매우 곤두서 있어서, 아무리 너라도 못 참아줄 거 같거든.”
최태혁은 살벌한 미소에서 미소를 지우고 그냥 살벌 그 자체가 된 얼굴로 짓씹듯이 말했다.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다가 녀석이 말한 내용을 뒤늦게 이해하고 급하게 말했다.
“어어? 아니 잠, 형 아마 저랑 같이 가려고 기다리...!”
그러나 나는 이제 살벌한 얼굴에서 사람 죽일 것 같이 살벌한 얼굴로 진화한 최태혁의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함부로 놀리던 주둥이를 얼른 닫았다. 응, 내가 잘못했네. 뭘 잘못한 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잘못한 눈이야, 저건.
나는 눈치껏 말을 하다 말았음에도 여전히 당장 어떻게 할 것처럼 뚫어져라 노려보는 녀석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이미 앙다문 입을 손으로 한 번 더 막았다. 그런 내 정수리 위로 최태혁의 말이 얹어졌다.
“시끄럽다. 남궁후.”
‘시끄럽다’랑 ‘남궁후’ 사이에 미묘하게 간격이 넓은 것 같은데, 이거 피해의식인 건가. 이상하게 나한테도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 느낌에 위를 힐긋 쳐다봤다가, 여전히 싸늘한 눈을 마주한 나는 얼른 다시 시선을 내렸다. 이상하게 최태혁 앞에만 서면 항상 쭈글거리게 된단 말이야. 마찬가지로 존재감 넘치는 정새빈이랑 쌍둥이들에 익숙해져 좀 괜찮아졌을 줄 알았는데, 역시 위압감은 5명 중 가장 압도적인 놈이었다.
나는 놈이 가져간 핸드폰이라도 돌려받기 위해 전화를 끊고 쥐고만 있는 손 쪽으로 조심스레 손바닥을 내밀었다.
“없다.”
뭐가. 네 손에 있는 거 달라는 건데 뭐가 없다는 거야.
“네?”
“사탕.”
뭔 개소리야 이건. 해도 해도 너무 뜬금없는 소리에 표정 관리고 뭐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제가 말해놓고 시침 뚝 떼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터지려고 했다. 아니, 왜 남의 핸드폰을 가져가서 안 주는 건데. 징징 울리는 걸 봐선 남궁후가 연락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저 커다란 손에서 억지로 뺏어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몰래 한숨을 삼키면서 내민 손을 거둬들였다. 왜 하필이면 오늘따라 엘리베이터 타는 사람도 없는 거야. 아무리 구석진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라고 해도 병원 특성상 이렇게까지 없는 건 또 처음이었다.
쫄아서 잔뜩 움츠리고 있으면서도 열심히 층을 힐끔거리던 나는 드디어 내가 누른 층에 다다른 숫자를 보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당연히 바로 튀어 나가기 위함이었다. 아까 그런 협박을 받긴 했어도, 나보단 남궁후가 더 당당히 녀석과 맞설 것이다. 최태혁 협박에 겁먹은 남궁후가 뜨기 전에 찾아내어 도움을 청하기 위해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서.”
내가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들린 단호한 명령만 아니었다면, 정말 그러려고 했다. 문이 열리는 것을 보자마자 땅을 박차고 나가려고 했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내 옆으로 커다란 인영이 지나갔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벗어난 최태혁은 뒤돌아서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나를 내려다봤다.
“내려.”
“넵!”
응, 이대로 얌전히 내리는 척하면서 평소에 남궁후가 차 세워놓는 곳으로 달려가는...!
“혼자 온 거 아니니 헛짓거리는 할 생각 말고.”
“넵.”
나는 주차장에 점점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날 보는 진귀한 경험을 하면서 얌전히 녀석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기백에 쫄아서 벗어나려고 한 거지, 딱히 막 얘한테서 도망갈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문제 될 건 없었다. 남궁후한테 연락이야 핸드폰 받고 나서 해도 될 거야. 최태혁이 나 대신 전화를 받았으니 그쪽도 내가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그래서 지금에서야 생각 난 건데, 나 얘랑 되게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심지어 생신 연회에서 그 일이 있고 정새빈과 보냈을 땐 연락 자체를 하지 않았고, 쌍둥이와 같이 있을 때도 최태혁이 해외 출장을 가 있어서 안부만 주고받는 것이 다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녀석에게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드네.
나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안부를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바닥을 보면서 걷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최태혁은 무표정했지만 아까보단 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앞을 보고 있었다.
“저기, 그, 출장은 잘 다녀오셨어요?”
내가 질문을 던지자마자 녀석의 걸음이 멈췄다. 덕분에 녀석을 올려다보면서 따라 걷고 있던 나도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최태혁은 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왜 보고만 있나 싶어 내 미간에 다시 주름이 생길 즈음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그래.”
녀석은 딱 그 한마디만 하고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걸음까지 멈춰서 날 빤히 보다가 속 터지기 직전에 한단 말이 고작 ‘그래’라니. 어이없고 허탈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그래, 잘 다녀오면 된 거지 뭐. 근데 그 일이라는 게 보통 회사원이 하는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어디 뭐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녀석을 따라 얼른 발을 옮기던 나는 문득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라 녀석의 몸을 훑었다.
“건강은요? 혹시 어디 다치셨다거나 피곤하다거나 그러진 않으시구요?”
아파서 끙끙대던 최태혁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곁눈으로 커다란 몸을 훑었다. 다행히 겉으로 보기에 드러나는 상처는 없었고, 걸음걸이나 행동들에 어색함도 없었다. 음, 확실히 다친 것 같아 보이진 않아. 이번에도 한참 동안 들리지 않는 대답 대신 내가 대충 유추하다 결론을 낼 즈음 답이 들렸다.
“너는.”
아니,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받아치기라니. 말하다 멈추는 것 다음으로 사람 답답하게 만드는 화법인데? 내가 먼저 물었으니 답부터 먼저 하라고 하려다가 너무 유치한 것 같아 관뒀다. 그나저나 저 물음은 뭐에 대한 질문인 걸까.
나는 눈을 한 바퀴 굴리다가, 마침 울리는 진동 소리를 따라 아직도 녀석의 손안에 있는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건강에 대한 걸 물어보신 거면 건강해요. 피곤한 건, 방금 퇴근해서 좀 피곤하고요.”
“그건 잘 지냈다는 뜻인가.”
녀석은 또다시 멈춰 서더니 날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표정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부담스러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답했다.
“저는 뭐....”
분명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하기 위해 입을 열었는데, 말이 목에 턱 걸려 나오지 않았다. 괜히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답하려고 했으나, 아무리 입을 우물거려도 잘 지냈다는 말을 완성할 수가 없었다.
아, 왜 이래. 미친 거야 김진호? 여기서 저놈한테 그동안 있었던 일 일러바치고 싶은 거야 뭐야. 그래서 말하면 뭐. 나는 자책하는 마음을 담아 아랫입술을 한 번 콱 깨물고 표정을 수습했다.
“제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형부터 대답해요! 형은 잘 지내셨어요?”
말을 돌리려고 꺼낸 질문이 끝나자마자 녀석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또다시 찾아온 침묵의 시간. 애써 올린 입꼬리가 부들거릴 때쯤 녀석이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들더니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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