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어? 일어났어?”
잠에서 깬 내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반짝이는 눈이었다. 나를 안아 든 채로 멈춰 서서 깼느냐고 묻는 말에 아직 정신이 덜 깬 나는 눈만 깜박였다. 얼마간 그렇게 마주 보고 있었을까. 녀석은 피식 웃더니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우리 진호. 그래도 발가벗고 거실에 자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발가벗진 않았는데. 혹시 자면서 바지까지 벗어버린 건가. 만약 그랬다면 제대로 흑역사를 만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배에 올려져 있던 손을 움직였다. 고개를 들어서 직접 봐도 되었지만, 그러기엔 머리가 너무 무거웠다. 그리고 눈도 자꾸 감기는 게 뭔가를 본다는 행위가 영 귀찮게 느껴졌다.
느릿느릿 내린 손에 다행히 바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바지 잘 입고 있는데 어디서 구라야, 이 구라쟁이가.
“푸흡- 그걸 또 확인했어? 진짜 갈수록 귀여워지네, 너.”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웃는 소리와 함께 닿아 있는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놈이야, 진짜. 잠결에 그게 조금 웃겨서 피식 가벼운 콧바람을 뿜으며 따라 웃었다. 그러고 나서 순간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침실 안에 있었다. 뭐야, 순간이동인가?
“잠이 영 안 깨나 보네. 그냥 더 자, 억지로 깨려고 하지 말고.”
아니, 그래도 대낮부터 자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아닌가. 천장에 드리워진 붉은 빛을 보아 벌써 노을 질 시간이 되었나 보다. 그래도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는 팔을 움직여 이리저리 눈을 비벼보는데, 눈꺼풀이 가벼워지긴커녕 점점 더 무거워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잠이 쏟아질 일인가.
스스로를 자책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닿아오는 시트가 기분 좋은 몸은 착실히 옆으로 돌아누워 볼을 비비적거렸다. 그 순간 침대에 내려놓자마자 혼자 꼼지락대는 내가 웃겼는지 또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내가 돌아누운 쪽 침대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코를 톡톡 얄밉게 건드리는 느낌으로 보아 내 앞에 나를 마주 보는 자세로 누운 모양이었다.
사람 체온에서 오는 제법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있으려니, 잠에서 깨자마자 흐릿해졌던 꿈의 장면 하나가 선명해졌다.
“오, 눈 떴다.”
잠기운이 조금 가시자마자 가벼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꿈에서와는 달리 내 앞에는 자기 팔을 베고 누운 남궁호가 있었다. 그건 진짜 있었던 일인 걸까. 그가 정말 그런 말들을 해준 거라면, 그런 말을 들었다면 내가 그걸 잊을 리 없는데.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명확히 확신을 가질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
아니면, 내가 일부러 지워버린 건가. 그때의 나라면 그랬을 수도 있긴 해. 싱글 침대였던 그 침대에 왜소하다지만 그래도 성인 남자와 같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덩치인 거면, 난 아마 초등학생이었을 테니까. 그 시기의 나는 엄마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엄청났고, 그만큼 그를 더 싫어하고 배척했으니 달콤한 말에 마음이 약해질까 봐 일부러 잊기 위해 노력했을 수도 있다.
“눈은 떴는데, 정신은 여전히 딴 데 가 있네. 조는 거야, 아니면 생각하는 거야?”
아, 맞다. 이 녀석이 있었지. 볼을 약하게 꼬집은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올려다본 남궁호는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녀석을 보다가 반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형은, 가족이 뭐라고 생각해요?”
“응? 가족?”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녀석은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가늘게 뜨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인가 가늠해보려는 듯했다. 어느 정도는 잠결을 빌려 아무 생각 없이 질문했던 나는 그 눈초리를 덤덤하게 받아내었다. 결국 포기했다는 양 한숨을 푹 내쉰 녀석은 씨익 웃으면서 가볍게 말했다.
“가족을 뭐라고 생각하기는.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아니, 그렇긴 한데요. 제가 물어본 건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지, 가족의 정의가 뭔.... 아니, 아니에요. 질문이 이상했네요.”
잠이 덜 깼나 봐요. 나는 말하다 말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생각보다 더 간단한 답에 당황해서 이것저것 설명하려다 보니 어울리지 않게 철학적인 질문을 한 모양새가 되어 민망했다. 가족의 정의가 뭔 말이냐 오그라들게 진짜. 빨리 잠이나 다시 자야지. 나머지는 일어나서.... 아, 일어나면 일 가야 하는구나. 내일도 평일이니까. 그럼 일부터 먼저 갔다가 끝나고 혼자서 좀 더 생각해보자.
사실 뭘 생각하고 싶은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창피한 마음에 나는 이것저것 되는대로 떠올리며 이미 감은 눈을 더 힘껏 감았다. 이대로 조용히 못 들은 척 잠을 자주면 참 좋겠다, 생각하는데 한껏 웅크린 내 몸을 안아 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거 기억해? 우리 집 괴물 말이야.”
“그... 누나분이요?”
“나는 진호야. 괴물을 누나라고 부를 때는 진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싫어했었어. 농담이 아니라 진짜 죽일까 진지하게 생각했다니까. 그게 아니면 분하고 짜증 나서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았거든.”
녀석은 내 뒷목에 입술을 붙인 채 이야기를 시작했다. 안 그래도 예민한 부위에 입김이 닿아 간지러웠지만, 어딘가 씁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아무 소리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좀 많이 똑똑하신 편이라, 나도 나름 괜찮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서 남한테 한번 져본 적이 없는데. 꼭 그 괴물이랑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단 말이지? 원래도 분한 마음이 있었는데, 어느 날 사용인이 숙덕대는 걸 듣고 나서는 그게 참을 수가 없는 거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에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조심스레 손으로 녀석의 얼굴을 떼어내고 몸을 폈다. 몸을 떨어트린 것이 불만스러운지 남궁호는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내가 팔을 베고 녀석을 마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들을 준비를 하자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진짜 엄마 아빠 자식도 아닌 게 친자식인 나보다 더 똑똑하고 잘나서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 참을 수가 없었어. 거기다 이길 건 다 이겨놓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혼자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그렇게 꼴 보기가 싫더라고.”
친자식. 낯설고도 어색한 단어에 몸을 일순 굳었다. 그러나 정작 말하고 있던 남궁호는 아무런 감흥 없이 계속 이야기했다. 잘못 들은 건 아닌데. 뭔가 반응하기엔 타이밍을 놓쳐버린 나는 일단 덤덤해 보이기 위해 표정을 다잡았다.
“어느 날, 또 병원에서 눈을 떴는데 그럴 때면 항상 옆에 계시던 엄마가 안 계시고 걔만 있는 거야.”
“아. 형 어렸을 때 기절 할 정도로 공부 많이 했었다고 그때....”
“오, 기억하네. 맞아. 기억은 정확히 안 나는데, 아마 또 밥 거르고 잠도 안 자면서 공부하다 기절해서 실려 갔었을 거야. 아무튼 누나만 있더라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세상 다 달관한 표정을 하고 한다는 말이,”
나를 보면서 얘기하던 남궁호의 시선이 조금 빗겨나갔다. 그 당시를 회상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잠시 말이 없던 남궁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렇게 아등바등할 것 없어. 넌 내가 언제나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런 문제가 아니거든. 내가 쥔 게 아무리 많아 보여도, 결국은 네가 이길 거야. 왜냐면 내가 쥔 건 원래는 내 것이 아니었던 것들이지만, 네가 쥔 것은 원래부터 네 것이니까.”
기절했다가 막 깬 초등학생한테 대뜸 그러더라니까? 녀석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콧방귀를 꼈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그러더니 또 그러더라. 네가 정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그냥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라고. 날 무서워하진 않는 것 같지만 너도 날 괴물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대신 어머니랑 아버지가 속상하실 만한 일은 더 이상 만들지 말아 달라면서 고개를 숙였어. 완전 깍듯하게. 마치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아버지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아....”
“난 그때까지 내가 엄청 어른스럽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 얘기를 딱 들으니까, 내가 유치하고 고집 센 어린애처럼 느껴져서 자존심 상하더라. 부끄럽기도 하고.”
옆으로 팔을 괴고 누워있던 녀석이 한숨을 쉬며 바로 눕더니 천장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 뒤는 그때 말한 대로야. 이기진 못하겠는데 짜증 나고, 이기고 싶어서 죽어라 공부하던 것도 되레 유치해 보이고. 뭐든 적당히 하자 주의가 된 거지. 누나 하나만 괴물로 만들면 적당히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으로서 자존심 챙기고 사는 게 가능할 것 같았거든.”
스스로의 말에 긍정하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남궁호가 고개만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빙그레 웃은 녀석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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