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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43화 (143/234)

143화

꿈을 꿨다. 중학생처럼 보이는 내가 예령이네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꿈인 것을 알았다. 아무래도 그날인 것 같아 보기 싫었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나는 어느새 예령이네 거실에 서 있었다.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로는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예령이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인해 내 발걸음은 어느새 조심스러워져 있었다.

대화 내용이 들릴 정도로 가까워지자 말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채예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걸 듣자마자 내가 있어선 안 된다는 것을 직감하고 바로 뒤를 돌았다. 걸음을 옮기려던 내 발을 붙잡은 것은, 녀석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이었다.

‘제발요, 엄마. 진호, 진호는 좋은 애잖아요. 걔도 말 잘 들을 거예요. 제가, 제가 옆에서 공부도 봐주고, 습관도, 좋은 습관만 들게 해주고. 완벽하게, 완벽한 아이가 되도록 같이 노력할게요. 네?’

‘예령아 그게 아니라.... 어휴, 이를 어쩌면 좋아. 일단 여기 물 한 모금만 마셔. 응?’

채예령은 오열하는 와중에도 날 위해 빌고 있었다.

‘예령아, 엄마 아빠는 우리 예령이가 민지 동생 생긴 걸 많이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동생을 데려올까 물어본 건데-’

‘그러니까요, 엄마. 다른 아이가 오는 거면, 새로운 아이 말고요. 동생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진호를 구해주세요, 엄마. 제가 쌍둥이처럼 잘 지낼게요. 형처럼 보살피면서 그렇게, 귀찮은 일 없게 잘 지낼게요.’

민지는 얼마 전에 나도 같이 놀았던 채예령의 사촌이었다. 민지에게는 갓난아기인 동생이 있었는데, 보육원에서도 그 정도로 갓 태어난 아기는 볼일이 없었으므로 너무 조그만 것이 신기해 우리 둘은 한참 동안 아기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채예령은 은연중에 동생이 있는 형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불임인 것을 알기에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동생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아주머니가 말하는 것을 보면 결국 동생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들킨 모양인데, 왜 그 대화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거기다 녀석은 그렇게 바라던 동생을 포기할 테니 나를 구해달라고 빌고 있었다.

‘진호한테는 이미 부모님이 계시잖니.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엄마 아빠도 아시잖아요. 다는 아니어도 아시잖아요. 아저씨 아줌마는, 진호를 하나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자꾸 진호랑 이상한 사람이랑 만나게 하고, 아픈데도 같이 병원도 안 가잖아요. 그게 무슨 부모야.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엄마, 아빠냐고요!’

‘채예령!’

처음 듣는 아저씨의 커다란 호통에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른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가족들은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야. 우리도 진호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니. 우리가 널 마음으로 낳을 때도 많은 시간과 절차를 지나야 했듯이, 원한다고 데리고 올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아저씨는 도중에 한숨을 쉬면서도 끝까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호통에 놀라서인지 잠시 멎었던 채예령의 울음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번엔 아주머니의 안타까움에 젖은 목소리가 들렸다.

‘예령아. 가족이 되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 우리 예령이도 잘 알잖아.’

‘그럼, 그럼 진호 어떡해요. 내 친구, 내 친구 맨날 운단 말이에요. 얼마나 불안하고 슬픈데요. 그게 얼마나 죽을 것같이 초조하고 힘든데, 그걸 걔는 맨날. 맨날 그걸 느끼면서 살고 있단 말이에요.’

‘그건 엄마도 너무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걸 우리가 다 해결해줄 수는 없어, 예령아. 그래도 다행히 가까이 살고 있으니까 많이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우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 엄마랑 아빠도 최선을 다할게. 그러니까 그만 울고 물 마시자, 응? 우리 아들 이러다 탈진하겠어.’

내 이름이 나오는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채예령이 떼써서 죄송하다고, 내일부터 다시 착한 아들이 될 테니 자기 미워하지 말라고 비는 것을 들으면서 조용히 거실을 벗어나 현관을 나섰다. 곧이어 눈앞이 까매지더니 나이 든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진호야, 나는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아, 이건 그날이구나. 내가 처음으로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을 마신 날. 그걸 자각하자마자 꿈속의 내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엄마 아니시잖아요. 왜 자꾸 엄마라 그러시냐고! 왜! 나 아들로 받아줄 생각도 없으면서, 아들이라고 생각 안 하시면서 왜 말로만 엄마라 그러고, 엄마라고 불러도 된다고 그러시냐고요. 내가! 내가, 무슨 마음으로 그걸 거절하는지 알아요? 그 말이 나를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아시냔 말이에요!’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폭언에 아주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희게 질린 얼굴이 지금 상황에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나타내주었다. 그러나 술에 취해 뵈는 것이 없었던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엄마라고 불러도 아주머니는 옆집에 사는 친절한 아주머니고, 내 친구 채예령의 엄마잖아요. 내가 친구 아들이고, 옆집 사는 불쌍한 애라 잘해주는 거잖아요. 지금 엄마라고 부르면 뭐 해요. 더 이상 옆집이 아니게 되면 볼 일도 없고, 남이 되는 사이에 엄마라고 불러 뭐하냐고요.’

‘김진호! 너 그만 안 해?!’

어디선가 나타난 채예령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내 멱살을 잡고 아주머니에게서 떨어트려 놨다. 녀석에게 가려 아주머니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험악한 표정의 채예령을 향해 울분을 터트렸다.

‘맞잖아! 너는 알잖아. 나한테 엄마라는 게 어떤 의민지 알잖아! 내가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존재인지, 아직도 매일 빌고 빌 정도로 원하고 그리워하는 존재인지 넌 알잖아. 나도, 나도 너희 어머니 같은 엄마를 얼마나 바랐는지, 그래서 그 말이 날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거 너는 알잖아!’

‘몰라, 이 새끼야! 몰라!’

‘어머, 진호야!’

채예령은 그렇게 말하며 나를 뒤로 밀었다. 안 그래도 휘청거리던 내 몸은 뒤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울고 계시던 아주머니가 황급히 내 쪽으로 와 나를 부축했다. 나는 어지러운 머리를 아주머니 어깨에 기대며 눈물을 흘렸다.

‘아주머니, 죄송해요. 사실은요, 저도 진짜 엄마라고 부르고 싶어요. 근데 아니잖아요. 아주머니가 엄마라고 부르라고 할 때마다 그게 너무 느껴져서, 그게 너무 비참하고 힘들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하시란 말이에요.’

그 뒤로 몇 번 더 그만하시라는 말이 들리더니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제야 나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정말이지, 최악의 꿈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그만 깼으면 좋겠는데.

다행히 이번엔 다른 장면이 바로 시작될 기색은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잠이 깨기만을 기다리며 멍하니 있었을까. 따뜻하고 밝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더니 점점 선명해졌다. 진호야, 진호야.

이 목소리는, 그였다.

‘진호야! 침대 마음에 들어? 괜찮아? 편해?’

이건 언제지. 이런 적이 있었나. 나는 나를 향해 밝게 웃으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그를 보며 이것 또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꿈이 지어낸 장면인지 고민했다. 그러는 새 꿈속의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나는 가구 중에서 침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사람이 제일 편하게 쉬는 곳이잖아. 건강에는 숙면이 무엇보다 중요하기도 하고. 엇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얼른 자야 키 쑥쑥 크지. 얼른 누워. 불은 내가 꺼줄게,’

‘...불, 불은 놔둬도 돼요.’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말한 경우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그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날 보고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혹시 어두운 게 무서워?’

나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불을 켜고 자면 눈에 좋지 않다며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그 말이 익숙했던 나는 이불을 꾹 말아쥐었다. 그도 결국 다른 어른들처럼 불을 끄는 것이 좋다며 끄고 나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불이 꺼졌다. 나는 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다시 불을 켤 요량으로 눈을 꽉 감고 문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리던 문소리는 나지 않고, 침대 한쪽이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서 눈을 떠보니 그가 내 옆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비밀인데, 나도 사실 어두운 거 되게 무서워하거든. 근데 누군가가 같이 있으면 괜찮더라고. 내가 어른들 중에는 좀 약한 편이긴 한데, 그래도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그럭저럭 다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괴물이든, 나쁜 생각이든.’

그는 말을 하면서 나를 향해 팔을 뻗더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진호만 괜찮으면 진호가 여기서 잘 때는 내가 항상 옆에 있어줄게. 혼자 불 켜고 자면 눈도 아프고, 잠도 금방 못 자잖아. 적어도 나는 그렇더라고. 내가 겁쟁이라서 그런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도 그의 개구쟁이 같은 웃음은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어쩐지 눈을 뗄 수 없는 그 모습을 가만히 올려다보다 항상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왜 나한테 잘해줘요?’

그에게만은 단 한순간도 착한 아이였던 적이 없는데, 왜 계속 나에게 잘해줄까. 참으로 그 당시 나다운 질문이었다. 그는 내 앞머리를 쓸어올려 눈을 한 번 맞추더니 품속에 끌어안았다.

‘우리는, 아니, 내가. 나는, 진호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니까. 나에게 진호는 가족이라서. 비록 피도, 호적도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아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지만, 나는 진호를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내가 진호한테 잘하는 건 당연한 거야.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나를 더 꽉 끌어안는 장면을 끝으로 길고 길었던 나의 꿈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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