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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42화 (142/234)

142화

얼마간 눈을 누르고 있던 나는 티셔츠를 들어 올려 얼굴을 대충 닦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반이 넘게 남아있는 죽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조금 이따가 치우기로 하고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전화기 너머에서 콧김을 뿜고 있는 채예령에게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그 생각은 했었어. 청소년기에 깽판 한 번은 쳐 볼걸, 나는 왜 다 그렇게 꾹꾹 참고 삼켰을까. 그때라면 그래도 지금처럼 연결이 약하지 않았으니까, 반항 한번 했더라도 어느 정도는 받아주지 않았을까.”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가 그런 생각까지 해? 너 혹시 맞았어? 이젠 때리기까지 해?

이 감 좋은 녀석. 정확히 말하면 맞지 않았지만, 육체를 강제한 것은 회귀 전까지 통틀어봐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충격받기도 했고. 하지만 괜히 비슷한 거라고 말했다간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들을 걸 알기에,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머리가 커서 그런가, 숙덕대는 사람들 사이에 멍청이처럼 서 있으려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뭐 하나 변하지 않은 상황에 우리를 묶고 있는 선만 삭아 들어가는 꼴이 좀, 분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때 뭐라도 해볼 걸 하는 마음에, 그냥. 그냥....”

비록 거짓말로 시작했으나 뒤에 이어진 말은 진심이었다. 정말 요 며칠간 매일 하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특히 어제 할아버지를 만나고 받은 가방 속 명함을 떠올릴 때면, 아쉬움은 더 강하게 들었다.

“지금은 하면 끝이잖아. 끝이 너무 보여서 이번에도 나는 참았어, 예령아. 이게 다 부질없는 짓인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래도. 그래도 내 손으로는 못 끊겠더라. 툭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러질 게 보이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건드리냐. 불기만 해도 날아갈 것 같은데.”

- ...근데 왜 안 와. 결국 그렇게 참은 거면 너 아직 붙잡고 있단 소린데, 그러고 싶단 소릴 텐데 왜 안 와.

그 질문에 겨우 가라앉았던 목이 다시 따끔거리고 눈이 뜨거워졌다. 뭔가 북받쳐 올라 일부러 침을 삼켰지만 소용없었다. 울렁이는 감각에 머리까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창밖을 내려다보던 것을 관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숨을 쉬듯 중얼거렸다.

“힘들어서. 그냥 다 너무 힘들어져서. 조금만, 잠깐만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서.”

투둑.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무렇게나 앉은 다리 사이로 투둑투둑, 비가 오는 것처럼 눈물이 떨어졌다. 한심한 소리다. 병신 같은 짓인 걸 알면서도 차마 내가 끝내고 싶지 않았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고, 그것조차 없으면 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속에 다시 돌아가기엔 내가 너무 힘들었다. 이번 일은 나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다. 좋은 엄마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엄마 노릇을 하려는 노력 정도는 보이던 엄마였는데, 내게 끝을 이야기했다. 자유를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장례식 후에 혹여나 듣게 될까 봐 연락 한 번 할 수 없게 만들었던 단어를, 나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듣고야 말았다.

다친 몸보다 그 말에 난도질당한 마음이 더 아팠던 그날. 현실을 외면하고 열심히 합리화하여 만들어낸 세상이 반절 정도 무너져버렸다.

거기다 보름이나 지나 확인한 연락이 고작 문자 한 통이라는 사실은 내 숨통을 조였다. 엄마는 원래 감정적인 사람이니까.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쑥스럽고 자존심 상해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이니까. 자존감이 낮아 남들 눈에 비치는 자신에 대해 강박적으로 신경 쓰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데려와 준, 나를 구원해준 사람이니까.

마음에 생채기가 날 때마다 외웠던 주문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 ...진호야.

가족을 원했다.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엄마의 마음을 얻고 싶어 정말 무던히도 노력했다. 엄마라면 나를 정말 가족으로 생각해줄지도 모른다고 꿋꿋이도 믿고 믿었다. 아버지의 마음엔 틈이 없었으나 엄마의 상처 가득한 마음엔 내가 들어갈 틈이 있을 거라고, 나를 필요로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으로 어리고 영악한 마음에 희망을 품었다. 언젠가는 서로 끌어안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어리석게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견뎠다.

회귀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나는 은연중에 기대했다. 언젠가 또 엄마를 힘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엄마는 돌아올 거야. 이 집에 와서 내게 물을 달라고 하고, 이야기를 늘어놓고, 위로를 받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먼저 귀찮게 하지 말자. 엄마는, 그런 부담감을 싫어하니까. 혹시 내 연락이 엄마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도착해버리면, 이번엔 정말 끝일 수도 있으니까.

단 하나 걸렸던 것은 딱 한 번 말하지 않고 찾아왔을 때 엄마가 원하던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또 그런 상태일 거라는 생각에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 걱정을 기억했기에 이번엔 채예령까지 불러 청소를 했던 거였다.

그러지 않았다면 전처럼 약간만 비참하다 끝났을까? 아니, 아니었다. 그 사단이 일어난 것은 회장에 있던 그 남자를 보고 발작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그저 전에 없던 극한의 상황이 일어난 탓에 나는 그동안 외면해왔던 엄마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들었던 거다.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 버거워서 나는 도망쳤다. 타의로 얽매인 것에 어느 정도 위안을 얻고 있었지만, 사실 자의로도 나는 여기 매여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 그럼 너 계속 거기 있을 거야? 그건 아니잖아. 어떻게 하다 형들이랑 지내는지 잘은 모르지만, 어쨌든 계속 그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

나는 또 티셔츠로 얼굴을 대충 훔쳤다. 아까보다 더 많은 눈물과 콧물이 묻어 옷 하단이 아예 축축해져 버렸다.

“그지.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지.”

그 말을 하면서 유리창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젖혔다. 그걸 하는 바람에 우정이라고 말하기엔 관계가 이상해지고 말았으나, 그들과 나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지금은 마치 나를 영원히 여기 묶어두고 싶은 듯이 굴어도 그게 정말 영원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갑자기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눈물을 흘려서 그런가, 정신이 멍했다.

- 진호야.

“왜.”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본 김에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찾던 나는 채예령의 부름에도 힘없이 대답했다. 한바탕 울고 나니 좀 지치는데, 그만 생각하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는 나에게 녀석은 결심한 듯이 말했다.

- 우리 집에 와.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 집으로 오면 되잖아. 그냥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자.

제법 귀가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래, 맞다. 내가 그 집을 떠나지 않기로 한 것에는 예령이네도 큰 영향을 미쳤었다. 엉망진창인 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따뜻하고 친절한 이웃집’ 역할을 맡아주고 있는 그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항상 미소로 맞아주는 아주머니와 무뚝뚝하지만 살갑게 챙겨주는 아저씨, 모든 면에서 참 다르지만 유일한 이해자인 채예령 또한 내 손으로는 절대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갈 곳이 없어지거나 기댈 곳이 없을 때 기꺼이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소중한 사람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집의 대안이 너희 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내가 언제쯤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질지 아직은 가늠할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있을 줄 알고.”

- 오래 있어도 돼. 아니, 이참에 아예 방 하나 너 써. 그래, 차라리 그러자. 어차피 자주 들락거렸었고 앞으로도 왔다 갔다 할 거, 그러는 편이 훨씬 편하고 좋을 것 같아. 이참에 내 옆 방을-

한껏 가라앉았던 채예령이 방 얘기에 다시 기운을 차렸다. 급격히 수다스러워지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아예 기정사실화하는 녀석에게 코를 훌쩍이며 심드렁하게 질문했다.

“너, 아주머니랑 아저씨한테 허락받는 게 먼저 아니야?”

- 어.... 그건 그렇...지?

그래, 방을 내주고 말고는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옷의 축축한 부분을 쥐어짜면서 그런 거 멋대로 막 정하다가 나중에 혼나고 싶냐고 채예령을 타박했다. 그러자 녀석은 철없는 소리를 했다.

- 그래도 진호 넌 우리한테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그 정도는 엄마 아빠도 당연히 허락해주시지 않을까?

“...그건 모르는 거야. 아무리 자주라지만 놀러 가는 거랑 아예 거기서 사는 건 다르잖아.”

아들 친구랑 아들은 다르듯이.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지, 가족이 아니니까. 나는 뒷말을 삼키면서 쥐어짜던 티셔츠를 죽 늘렸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엄연히 선은 있었다. 사람은 보통 자신과 타인일수록 박해지고, 가까울수록 관대해진다. 보통은 그 관대함은 가족에게 가장 많이 발휘될 테다.

반대로 말하면, 가족이 아닌 사람은 아무리 친하고 가까워도 가족과 같은 대우를 받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그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그렇게 가족이 생기기를 열망했던 거니까.

“됐어. 어차피 여기 좀 더 있어야 하기도 하고, 그 뒤에 또 어디 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 괜히 아주머니랑 아저씨 심란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있어.”

- 또 어딜 가는데? 그냥 내가 잘 말할 테니까 우리 집으로 오라니까?

“됐다고.”

뭐에 꽂힌 건지 내 딴엔 기껏 생각해서 거절하는 말에도 채예령은 계속 똥고집을 부렸다. 사정이 있다는 말은 아예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잔소리를 흘려들을 겸 핸드폰을 내려놓고 찝찝한 티셔츠를 벗어서 옆에 두었다. 그리고 스르르 쓰러지듯 옆으로 누웠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 덕분에 춥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허전한 마음이 공허해 몸을 한껏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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