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할 만큼 했다라. 뭐를.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얘는. 나는 이마를 팔에 대고 엎드린 자세 그대로 옆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뭐라는 거야, 갑자기.”
생각보다 더 퉁명스럽게 나온 말에 채예령은 긴 한숨을 쉬더니,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다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그런 미묘한 목소리가 몇 번이고 ‘그, 아니, 그러니까’만 반복하다가, 다시 한번 한숨을 뱉었다.
뭘 말하고 싶길래 이래. 가만히 핸드폰 액정만 보고 있어서 그런가, 급격히 피로감이 밀려왔다.
- 알잖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채예령이 선택한 답은 고민에 든 시간에 비해선 명쾌하지 못했다. 나는 목을 주무르고 있던 손을 멈추고, 피곤한 얼굴을 쓸어올렸다.
“몰라. 모르니까 묻고 있잖아.”
- 그러니까 내 말은! 내 말은, 네가, 아니 너는, 아니, 그러니까...!
아 거참, 엄청 망설이네.
“채예령. 그냥 말해. 네가 뭐 언제부터 나한테 말 가려서 했다고 그래.”
- ...이제는 그냥 다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그 사람들한테 그만 좀! 그만 좀....
이용당했으면 좋겠다고. 말을 이을수록 점점 언성이 높이던 채예령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마지막 한마디를 힘없이 중얼거렸다.
처음이었다. 표정으로 드러내거나 우회적으로 말한 적은 있어도, 녀석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그들에게 적개심을 보이다니. 그것도 예의 바른 녀석의 성정에 맞게 항상 ‘너희 부모님’이라고 깍듯이 대했던 녀석이 ‘그 사람들’이라고 칭했다. 그 범주에 어디까지 포함이 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을 나와 완전히 타인으로 표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냐?”
- 무슨 일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네가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아서 모르지만, 너 분명 무슨 일 있어. 그것도 그때 생신 연회 기점으로 그 사람들이랑 무슨 일 있었어, 너. 그렇지 않고선 지금 네가 하는 행동들이 납득이 안 돼.
말하기 망설여졌던 부분을 뱉어서 그런지 채예령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감싼 김에 관자놀이를 누르며 약간 짜증 섞인 투로 녀석의 말을 받아쳤다.
“뭔데 또 납득이 되고 말고까지 나와.”
- 뭐긴. 너 내가 기숙사 들어가라고, 학점 때문에 안되는 거면 차라리 나랑 같이 자취하자고 했을 때 네가 뭐라 그랬어. 못 떠나겠다며. 그 집에 너마저 없어지면 영영 네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못 떠나겠다고 그랬잖아. 그 집을 떠나는 순간 그나마도 가지고 있던 네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다고, 네가 그랬다고, 김진호.
거기까지 듣고 나는 테이블 아래를 힐긋 확인했다. 도청기가 있나 싶어 살펴봤을 때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나는 스피커폰을 해제하고 핸드폰을 들어 귀에 가져다 댔다. 그 사이에도 채예령의 말은 끊기지 않고 계속되었지만, 워낙 소리치듯 말하고 있어 내용을 놓치는 일은 없었다.
- 근데 지금 너 어디야. 어디 있냐고, 너! 어딘데 한 달이 지나도록 저 집에 불이 꺼져있냐고. 어린애 같다 놀려도, 전기세 때문에 알바를 하나 더 늘릴지언정 집이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싫다면서, 악착같이 불이란 불은 다 켜 놓고 다녔던 집이 지금 한 달이 넘게 방치되고 있는데. 넌 돌아올 생각도 안 하고 있잖아.
“그건.... 그건 다른 일이 있어서 그래. 최근에 일하기 시작한 곳이 지금 있는 데랑 더 가깝기도 하고.”
- 웃기지 마, 김진호. 내가 널 몰라? 내가, 내가 병신같이 구는 널 왜 놔뒀는데. 이젠 아무도 없는 그 집, 그게 뭐라고 혼자 미련 철철 흘리면서 못 벗어나는 꼴 보면서도 왜 아무 말 안 했었는데! 네가 무슨 마음으로 병신을 자처하고 있는지 아니까 그랬던 거 아니야. 그걸 너무 잘 아니까, 답답하고 한심한데! 근데, 그게 무슨 마음인지 아니까!
답답함을 참지 못한 건지 채예령은 결국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그나저나 병신이라니. 멍청이 정도면 받아들이겠는데 병신은 좀 심한 거 같았다. 아닌가. 멍청이라기엔 또 너무 병신같았던 것 같기도 하고.
“....”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집안을 밝게 비추는 햇살이 유난히 눈이 부셨다. 바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크고 넓은 테이블 너머 전면창으로 들어오는 빛이었다.
이상했다. 나는 지금 이렇게나 하늘과 가까이 있고, 지금 앉아있는 의자도 바의 높이에 맞추기 위해 높게 제작된 의자이므로 분명 나는 ‘높은’ 곳에 있을 텐데. 왜 자꾸만 저 밑바닥, 어둡고 추운 지하에 있는 기분이 드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높이 있는 내 몸뚱어리와는 다르게, 내 기분은 추가 달린 것처럼 빠른 속도로 어둡고 더러운 물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이런 건 좋지 않았다. 이건 나를 망가트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메어 오는 목을 풀기 위해 침을 한 번 삼키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크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보고 다시 긴 숨을 내뱉었다. 눈이 뜨거웠다.
- 진호야.
응. 씁쓸함이 가득 담긴 부름을 듣고 겨우 뱉은 대답은 내 귀에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채예령에게도 당연히 닿았을 리 없을 텐데 녀석은 나를 다시 부르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문득 창 앞에 놓인 커다란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부엌에 있는 것보다 커다란 저 테이블은 너무 크기도 하고, 굳이 음식을 저기까지 가져가야 하는 수고가 번거로워 잘 사용하지 않았다. 저기에 앉아 밥을 먹었던 것은 손에 꼽았다.
그리고 나는 그럴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꼈다. 좋으면서 불편했고, 거북하면서도 좋았다.
전에도 생각했던 적이 있지만, 쌍둥이와 함께 있다 보면 이상하게 옛날 일들이 오버랩되곤 했다. 그때도 나는 내 앞에 앉아있는 녀석들에게서 언젠가 똑같은 위치에서 나를 보고 있었던 아버지와 그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가 엄마 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이 못내 싫어서 식사 시간 내내 뚱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가득한 식탁을 보고도 좋아하지 않았고, 숟가락 위에 놓아주는 반찬들에도 웃지 않았다. 그 자리가 언젠가 봤던 가족들이 모여 식사하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지나가듯 부럽다고 말한 것을 듣고, 그가 부러 만든 자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내가 원했던 것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모여 먹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장면은, 한창 부부를 연기하던 그 순간에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버지는 일이 바빠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사람이었고, 엄마는 그걸 기다릴 정도로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어린 나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집은 식사를 각자 하거나 엄마와 나, 혹은 아버지와 나만이 앉아 먹었었다. 당연하게도 아버지와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숟가락 위에 반찬을 놓아준 적이 없었다.
“훌쩍.”
뜨거워진 것은 눈인데, 정작 뭔가 흐르기 시작한 것은 콧물이었다. 내 콧물은 정말 눈치라곤 하나도 없구나. 지금의 나라면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처연하고 가련해 보이려나 싶었던 나의 기대는, 코를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와장창 깨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분위기를 깨트린 김에 입을 열었다.
“엄마는 여전히 예쁘시더라. 정말 1년. 아니, 사실 체감상으론 1년이 넘게 못 봤다가 보는 거거든? 근데도 변함없는 모습이었어. 조금 초조해졌다는 것 빼고는.”
- ...야.
“아버지는 나이가 드셨더라. 마음고생을 하셔서 그런가, 조금 지쳐 보이기도 하고 나이가 든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멋있으시긴 했는데, 그래도 힘들어 보이셨어.”
- 야.
“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았어. 1년인데 10년은 나이가 드신 것 같더라고. 어제 회사에서 봤을 땐 조금 나아 보이시긴 했는데, 그래도 얼굴색은 계속 어두우셨어. 표정도 안 좋고.”
- 야, 김진호. 너 지금 무슨 소리를...!
“그러니까. 내가 그만하고 말고가 없다고, 채예령. 그런 게 없더라고, 예령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손바닥에 물기가 묻었으나 상관없었다. 이번에도 어째 눈물보다 더 많이 흐르는 콧물을 훌쩍이며 피식 웃자, 전화기 너머 채예령은 이를 갈았다. 연관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말을 그냥 뱉어냈지만, 녀석이라면 대충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든 결국 나를 집어삼키고 있는 이 우울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었기에, 나는 그걸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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