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실컷 이성적으로 생각해놓고도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한 번 더 크게 주변을 돌아봤다. 역시나 그는커녕 그와 비슷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완전히 포기가 된 나는 급하게 베이커리 샵으로 뛰어가 샌드위치와 빵 워밍을 주문하고 음료를 사기 위해 다른 카페로 향했다. 생각보다 줄이 긴 것을 보고 인턴 선생님에게 전화해 음식 픽업을 부탁하지 않았다면 시간에 맞추지 못할 뻔했다.
회의실에 도착했을 땐 후원자를 맞이하러 간 대리님과 팀장님을 제외한 회의 참석 인원이 모두 착석해 있는 상태였다.
“이 대리가 요즘 너무 착하게 대해주나? 중요한 회의 세팅이 이렇게 늦어서야 되겠어?”
“하하하, 죄송해요. 얼른 할게요.”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과장님을 향해 웃으면서 손을 더 빨리 움직였다. 경험상 저 눈은 농담 반, 진담 반의 의미를 띄고 있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후원자가 예정보다 더 빨리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다는 소식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서둘러 준비하던 우리는, 다행히 후원자 일행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에 세팅을 완성할 수 있었다.
회의록 작성을 맡은 인턴분은 미리 가져다 놓은 본인의 노트북이 있는 자리에 앉고, 나는 포장지들을 모아 넣은 봉투를 들고 회의실 뒷문을 통해 나가려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대로 나가려던 나는, 앞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예상치 못한 인물과 눈을 딱 마주치고 말았다.
“...할,”
아버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삼키며 바라본 곳에서 할아버지는 약간 커진 눈 외엔 들어설 때와 변함없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오늘 왜 이래, 진짜. 무슨 날인가? 그에 이어서 바로 할아버지의 출연이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연속이냐고.
“회장님.”
그렇게 서로 마주 본 채 대치하던 상황은 할아버지의 뒤편에서 들려온 소리로 인해 할아버지가 걸음을 옮기면서 겨우 깨졌다. 그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무슨 일인가 회의실을 둘러봤다. 뒤따라 들어오던 대리님도 날 발견하시고는 멍하니 서 있는 내게 수고했다고, 이제 내려가 봐도 된다며 작게 속삭였다. 얼음처럼 굳어버려 가만히 있던 나도 그 말에 ‘땡!’이라도 된 듯 몸이 움직여졌다.
그래, 가야지. 내 역할은 모두 끝났다. 대리님께 눈으로 인사를 하고 가려고 몸을 돌리면서 힐긋 할아버지를 확인하는데, 어느새 상석에 앉은 할아버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나는 돌아서려던 자세 그대로 또다시 얼어버렸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던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눈이 향하는 곳을 찾다가 이윽고 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몇 번 마주친 기억이 있던 할아버지의 비서분을 제외하고 모두 ‘이게 무슨 소리냐’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하지만 처음 겪는 상황이라 나 역시도 매우 혼란스러웠기에,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한마디 말 뒤로 나만 쳐다보고 있는 할아버지와 침묵하는 비서 아저씨, 가만히 얼어 있기만 한 내가 답답했는지 결국 우리를 번갈아 보던 팀장님이 할아버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어, 혹시 아는 사이신가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입에서 무슨 답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회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당연했다. 나의 생활과 할아버지의 생활은 조금도 접점이 없었다.
우리는 내가 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의 저택에 방문하거나, 공식적인 가족 모임이나 생신 연회에 참석했을 때가 아니면 볼 일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찾아온 적도 없었고, 내가 할아버지를 찾아간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럴 필요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는 사이였다. 나는 할아버지를 위한 인형극의 조연이었고, 할아버지는 내 몸에 연결된 줄을 알면서도 인형극을 보고 있는 관찰자였다.
그 결과 나는 할아버지의 입으로 내 소개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들을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내겐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언젠가는 할아버지도 나를 손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한 번도 그의 입으로 내가 손자라고 하는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이 손자라고 하는 말에 부정한 적도 없으므로 나름의 암묵적인 긍정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발표된 유언장의 내용을 듣고 나는 그게 아님을 깨달아야 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유언장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이름까지 언급된 종이에 내 이름 석 자는 누락 되어 있었다. 장례식 내내 나지 않던 눈물이 그제야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같이 있던 친척 중 일부는 속물이라면서 속닥거렸다.
그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퍽 얄궂은 타이밍에 울기 시작한 것은 맞았다. 그러나 정말 맹세컨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돈 때문에 울었던 것이 아니었다. 유형의 유산 따위가 아니라 내가 내심 바라왔던 무형의 유산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슬펐다.
마지막으로 종이 위에서라도, 단지 글로라도 가족으로 묶여 있고 싶었던 내 바람이 깨진 순간 나는 ‘가족’에 대한 모든 희망을 놓아버렸었다. 그래, 유일한 관객이 없어졌는데 이 인형극이 계속 유지가 되겠어? 심지어 그 역시 마지막까지 인정하지 않은 나를 이제 자유가 된 엄마와 아버지가 가족으로 대해줄 리 없잖아.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내가, 감히 뭘 더 바랄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그 후로 납치가 되어 죽을 때까지 엄마와 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고 살았다. 그들이 싫었다기보다 내가 용기가 없었다.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으나 답장이 없을까 봐, 혹은 이제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까 봐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들에게서도 아무 연락은 없었다.
“안... 녕하세요. 근데 저, 저는 이만 나가봐야 해서요. 그.... 회의! 회의하셔야 하잖아요. 먼저 나가볼게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 맞다. 저, 그, 앞에 샌드위치에 땅콩 들어있어요. 저기 옆에 다른 거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이제 진짜 가볼게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나는 할아버지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마자 급하게 입을 열어 아무 말이나 뱉었다. 이런 내 행동이 매우 이상해 보일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종이로 당한 부정도 그렇게 비참했으므로, 직접 눈을 마주하고 부정당하는 것은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건 매우 아플 것이 분명했다. 굳은살이 생긴 마음은 금방 또 괜찮아질 테지만 아픈 것은 아픈 거니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역시나 회의실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반쯤 열린 할아버지의 입이 다시 굳게 다물어졌다는 점이다.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면서 뒷걸음질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유리문으로 내 모습이 비칠까 봐 나오고 나서도 숨을 들이켠 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제일 마지막 칸에 들어가 변기 뚜껑 위에 힘없이 앉고 나서야, 한껏 참았던 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오늘 진짜 무슨 일인 건데....”
내 인생을 가장 강하게 흔들어 놓은 두 존재를 하루에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회귀 전엔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을 보면 매우 낮을 터였다.
거기다 그도 그지만, 할아버지와 만난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을 벗어나 매우 곤란하기까지 했다. 나를 보고 못 본 척할 리가 없는 ‘그’의 특성상 그는 나를 보지 못했음이 분명했고, 나 역시 끝내 찾지 못했으니 잘못 봤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경우는 그럴 수 없었다. 둘이 서로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했음은 물론이요,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누가 봐도 궁금증을 일으킬만한 행동을 하고 말았다.
하아... 할아버지가 뭐라고 말했으려나. 내 입으로는 차마 손자라는 뻔뻔한 소리를 할 수 없어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막 뱉고 나오긴 했는데, 뒤가 걱정됐다. 후우- 모르겠다. 뭐가 됐든 회의 끝나고 사람들이 돌아오면 알게 되겠지. 그때 할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듣고 맞장구를 치자.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다짐하며 마른세수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고민하고 있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에겐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차라리 일에 집중하다 보면 잠깐은 이 복잡한 생각을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사무실에 도착한 나는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대리님이 내 어깨를 치기 전까지 오로지 일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진호 씨, 바빠요?”
“에, 예? 아, 대리님. 회의 끝나셨어요?”
내 형식적인 질문에 대리님은 조금 석연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긴장으로 젖어오는 손을 무릎에 닦았다. 입안 쪽을 깨물며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입을 모으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대리님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이마를 치며 민망한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 미안요. 사람 불러놓고 딴생각에 빠져서 이러고 있었네. 하하하, 이거 진짜 나쁜 습관인데, 그죠? 미안해요. 그, 회의가 뭐랄까. 잘 끝났다면 잘 끝났는데, 뒤에 일이 좀 많아져서요. 근데 진호 씨 부른 건 그거 때문이 아니라 이거요. 이거 주려고 불렀어요.”
그렇게 말하며 내밀어진 대리님 손에 있는 것은 명함이었다. TH 바이오 글자 아래 써진 김.... 아.
“이거....”
“응, 아는 것 같네. 아까 회의실에서 뵀던 회장님 명함이에요. 진호 씨한테 전해주면서 나중에 연락하라고 전하면 될 거라고 하시던데, 그.... 혹시 회장님이랑 무슨 사이인지 물어봐도 돼요?”
아까 진호 씨는 그렇게 내려가 버렸지, 회장님 시간 없다고 바로 회의 시작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돼버려서 우리 내려오면서 궁금해 죽는 줄 알았거든요. 명함을 보던 시선을 올려 바라본 대리님은 겸연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리님 뒤편으로 보이는 팀장님 자리에 회의실에 참여했던 직원들이 모여 이쪽을 흘깃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구나. 목 안쪽이 까끌거렸다. 나는 불편하면 굳이 얘기 안 해줘도 된다면서도 계속 내 눈치를 보는 대리님을 한 번 더 보고, 다시 고개를 숙여 명함에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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