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일을 하겠다고 한 데엔 큰 이유는 없었다. 처음엔 하도 밤에 괴롭혀서 낮에 자느라 몰랐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나니 혼자 있는 시간이 못 견디게 힘들었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샤워하려고 들어갔다가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에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엉엉 소리내어 운 적도 있었다. 그때 마침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이 갑자기 집에 들이닥친 남궁후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퇴근 시간까지 그러고 있을 뻔했다.
내가 싫어하는 공간인 병원에서 하는 일이었지만, 그들의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홀려 하겠다고 할 만큼,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싫었다.
“잘 다녀와.”
“형들도요.”
나는 차례로 내 볼에 입 맞추고 나서야 보내주는 녀석들에게 손을 흔들며 마주 인사했다. 처음엔 이걸로도 꽤나 실랑이를 했었는데, 그러다 지각할 뻔했던 날 이후로 그런 쓸데없는 짓은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도 여전히 기껍지는 않지만. 자기네 병원 지하 주차장인데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쌍둥이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지원한 아르바이트는 지원서를 내고 나서 몇 시간 뒤, 다음 날로 면접 일정을 잡아도 되냐고 연락이 오더니 면접을 보자마자 바로 채용되었다.
이렇게 보면 내 서류가 화려하거나 면접을 매우 잘 봤을 것 같은데, 그건 절대 아니었다. 서류는 솔직히 내가 봐도 별 내용 없었고, 면접은 좀... 이상했다. 면접 때의 팀장님이나 후에 내가 주로 보조하게 될 사업 담당 대리님의 표정이 면접관이라기보단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을 맞이하는 감격스러운 표정이었으니까.
아무튼 나는 그날 당일부터 일하게 되어 벌써 두 번째 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 눈이 마주치는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먼저 출근하신 대리님께도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최근 들어온 거액의 후원금에 맞춰 후원자가 원하는 방향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느라 매일 야근하셔서 그런지, 아침부터 눈 밑이 퀭해 보였다.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 사무직 일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일용직보다 사무직이 더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죄다 안 좋은 기억밖에 없었다. 툭하면 인격 모독에 하인 부리듯이 대하고 반말, 욕설, 은근한 왕따까지. 운 나쁘게도 나를 담당하던 사람은 그 사무실에서도 모두가 피하는 진상 오브 진상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 대리님은 천사 그 자체라 그런지 뭐 하나라도 더 도와주고 싶었다. 비타500이라도 좀 가져다드려야 하나. 저번에 들어온 거 아직 탕비실 냉장고에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대리님 자리를 슥 스캔하는데, 이미 가장자리에 비타500 병들과 커피 컵들이 진을 이루고 있었다.
하하, 여기서 더 드리면 카페인 중독으로 죽을 수도 있겠는데?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고 있자니, 서류에 고개를 파묻듯 숙이고 읽던 대리님의 허리가 확 펴졌다.
“됐다. 진호 씨, 이거 파일 보낼 테니까 오타만 한 번 더 체크 해주고, 10부 인쇄해서 회의실에 세팅 좀 부탁해요.”
“아, 맞다. 오늘이셨구나. 대회의실 말씀하시는 거 맞으시죠?”
건네주는 자료를 받으면서 확인차 되물으니 이 대리님이 해탈한 것 같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가볍게 대답하고 막 켜진 화면에서 인터넷 창을 열었다. 어쩐지, 아침엔 항상 시간 맞춰 출근하시는 분인데 벌써 계신다고 했다. 오늘은 대리님을 이번 달 내내 괴롭혔다던 후원자께서 최종 컨펌을 위해 사무실로 직접 행차하시는 날이었다.
“이번 사업 후원자 오늘이야? 드디어? 아니, 무슨 회사랬지?”
“중소기업인데, 화학제품 같은 거 다루는 회사라 저도 이번에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워후- 그런 거치곤 웬만한 대기업만큼 후원하셨던데?”
“하... 그래서 죽을 뻔했어요. 팀장님은 왜 이걸 저한테 주셔서는. 지원 대상이랑 항목이 너무 적다고 금액 올려줄 테니까 다시 기획해달라는 말 두 번째 들었을 땐 위경련도 왔었다니까요, 저?”
컴퓨터가 켜지자마자 메일에 들어가 파일을 열고, 마지막 맞춤법 체크를 하는 사이 맞은편 과장님이 파티션 위로 눈을 빼꼼 들고 말을 걸었다. 중요한 회의 들어가기 전에 잡담으로 긴장을 풀어주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다행히 그 의도가 잘 작용했는지 내가 하는 행동을 눈으로 좇으며 다리를 떨던 대리님은 하소연을 하며 초조함을 덜어내시는 듯했다.
“그래, 들었어. 보통 그냥 후원금이랑 후원 대상 연령대만 정해주는데 이번 후원자는 프로그램 내용까지 최대한 본인 원하는 대로 하길 바라셨다며? 후원도 보통 세금 인정 비율 때문에 모금회 통해서 하는데 그러시지도 않고.”
“맞아요. 그게 유일한 좋은 점이었죠, 뭐. 모금회를 거칠 필요가 없어서 피드백이 훨씬 빠르긴 하더라고요. 대뜸 뉴스나 크게 내달라는 분들보단 인간적으로도 백번 나은 것도 맞고.”
음, 일단 오타는 없는 것 같네. 글자체나 간격 같은 사소한 것들까지 체크 한 후 인쇄를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소하고 계셨는지 병들을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나를 올려다보는 대리님을 향해 입 모양으로 ‘인쇄요’라고 말하자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10시 30분이라고 했었나.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 막 9시가 조금 넘었다. 인쇄하고, 인쇄한 거 확인하고, 파일에 정리해서 대회의실에 세팅하기에 시간은 충분했다. 과자는 직원회의 때처럼 있는 과자 대충 예쁘게 세팅해서 가져다 놓으면 되는 건가. 나는 인쇄기 옆에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옆에 있는 탕비실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안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어서 이 거리에서도 뭐가 있는지 대충 보였다. 흐음.... 종류가 없지는 않은데, 대리님께 확인은 받아야 할 것 같다.
마침 인쇄도 끝났는지 기계음이 멈췄다. 나는 종이 뭉치를 들어 탁탁 열을 맞춘 후 자리로 갔다. 그리고 잘 인쇄됐는지 확인하면서 페이지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리님이 아직 과장님과 얘기 중이어서 끼어들기보단, 서류 준비부터 다 하고 대회의실에 가기 직전에 물어볼 심산이었다.
“그래서 오늘 오시는 거예요. 그래도 최종 결정은 담당자랑 얼굴 맞대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이도 꽤 있으신 것 같은데, 직접 사무실까지 와서 컨펌한다는 거 보면 되게 열정적이신 분이신가 봐. 아무튼 이번 달 고생했네, 이 대리! 이제 오늘 최종 컨펌 받으면 한숨 돌리는 거잖아.”
“하아.... 한숨 돌리자마자 사업 진행해야 해요. 뭐가 그렇게 급하신지 후원자님께서 사업 시작 시기를 아주 빠르게 잡아 놓으셔서. 하하, 아무튼 이제 저 팀장님께서 좀 이따 부르실 것 같아서요. 준비 마저 끝내야겠어요.”
나이스 타이밍. 마침 서류 준비를 끝내고 막 일어나려던 참인데 대화를 마무리하는 분위기였다. 건투를 빈다며 손을 휘젓는 과장님과 죽을상을 지으며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대리님을 번갈아 보며 말을 걸 틈을 찾고 있는데, 고개를 돌린 대리님과 딱 눈이 마주쳤다.
“응? 왜요, 진호 씨?”
“대리님, 회의실 세팅할 때 간식들도 놓을까요?”
“아, 아아. 간식. 으으음.... 일단 그쪽에다 커피 메뉴는 받아놓긴 했거든요? 그거 사 오는 김에 밑에서 따뜻한 빵이랑 샌드위치 종류들도 사 와줘요. 오전 회의니까 브런치 느낌으로. 혹시 모르니까 쿠키들도 좀 사 오고요.”
이왕이면 고급지고 예쁜 걸로. 대리님은 마지막 말을 강조하면서 본인 법인카드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역시 중요한 회의라 탕비실 과자를 쓰진 않는구나.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한 부씩 파일에 꽂아 정리한 자료들과 법인카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곧장 회의실로 가서 에어컨을 켜서 온도를 맞추고, 미리 대리님께 들었던 대로 자리 배치를 조금 수정하고, 자리마다 준비한 파일을 하나씩 각 맞춰서 놔두니 제법 그럴싸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시간도 음료를 바로 사기엔 이르지만,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기다릴 걸 계산하면 여유 있게 돌아올 수 있었다. 좋아, 완벽해. 나는 대리님이 아까 보내준 음료 주문을 보면서 회의실 세팅 마치고 카페로 간다고 문자로 보고했다.
병원 1층은 사무실이 많은 내가 있던 층에 비해 훨씬 사람이 많았다. 맨날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하는 층으로 바로 가서 그런지, 북적북적한 병원 분위기가 좀 어색했다. 어릴 적 병원 다녔을 때를 생각해보면 원래 이게 평범한 병원 풍경인데. 이 풍경을 맨날 볼까 봐 지원서류 내자마자 다시 철회할까, 고민했을 정도로 나는 병원이 싫었다. 쌍둥이들 차로 출퇴근하는 바람에 병원보단 그냥 사무실 다니는 것 같은 동선인 걸 알게 된 지금으로선, 괜한 고민이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나는 슬금슬금 떠오르는 옛 기억을 애써 외면하고 빵집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봤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베이커리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사람들 속에 섞여 지나가는 사람이 눈에 밟혔다.
“어...?”
그가 왜 여깄지? 찰나였지만 사람들 사이로 선명하게 보인 얼굴은 분명 그 사람이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로. 아니, 고등학생이 된 후로 마주친 적은 없어도 워낙 강렬하게 남아있는 그 사람의 얼굴을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당황스러움 반, 왜인지 모르게 밀려오는 조급한 마음 반으로 발을 움직여 그가 섞여 있던 사람들 무리를 따라갔다.
저 사람인가, 아닌데. 이 사람인가? 걸음을 빨리하여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들을 사이에 섞여 들어간 나는 실례인 걸 알면서도 얼굴을 기웃거렸다. 없어, 이 사람도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야, 분명히 봤어. 그였어. 전보다 더 말라보였고, 야위었지만 ‘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잡는 심정으로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뛰듯이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뭐예요?”
“아,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어요.”
남자인 줄 알았던 숏컷의 여자는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봤다는 얼굴로 보더니 다시 가려던 곳으로 돌아갔다. 허탈한 감정과 함께 이성이 조금 돌아왔다. 그러자마자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를 봤으면 뭐. 네가 뭐 어쩔 건데. 회귀 전 그땐 그런 연락을 받고도 결국 가지 않아놓고서 왜 지금은 잘못 본 걸 수도 있는 사람을 이렇게 찾아 헤매는 거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럴수록 방금 전까지의 스스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자꾸 입으로 가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이마를 가볍게 쳤다. 정신 차려, 김진호. 너 지금 일하는 중이야. 반대편 손으로 쥐고 있던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새 회의 시간과 가까워져 있었다. 이젠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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