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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26화 (126/234)

126화

“눈 감아!”

나는 남궁후가 외치는 소리에 얼른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곧이어 샤워기가 틀어지고, 물과 샴푸 거품이 섞여 내 손 위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남궁호가 조금 식어버린 물 온도를 다시 맞추는 동안 몸에 묻은 밀가루도 씻어낼 겸, 샤워를 먼저 하기로 하고 머리가 감겨졌다. 스스로 씻겠다고 실랑이를 벌인 것이 무안하게 두피까지 야무지게 문지르며 머리를 감겨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자아, 다 됐다. 이제 눈 떠도 돼.”

물을 끄고 내 손을 잡아 내린 녀석은 수건으로 눈 부근을 두드려 물기를 제거해주었다. 씩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고 있자니 오래된 기억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아주 어렸을 적 언젠가, 그러니까 집에 오기도 훨씬 전 그곳에 있었을 땐 가끔 선생님이 이렇게 씻겨 줬었다.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때 들었던 말은 기억한다. 오랜만에 받는 오롯한 관심이 못내 아쉬워 미적거리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크게 외쳤던 말.

“다음....”

기관엔 많은 아이들이 있었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내 마음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등을 토닥이고 내보냈다.

“응? 다음?”

“아, 아뇨, 그.... 다음, 다음은 제가 형 해준다고요.”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갸웃거리며 되묻는 남궁후에게 급하게 둘러대며 샴푸를 집어 들었다. 누가 들어도 아주 허술한 수습이었으나 녀석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알았다며 머리를 숙였다. 아까 물을 같이 맞아서 충분히 젖어있는 머리카락 위로 샴푸를 쭉 잤다. 이상하게 이 녀석들이랑 있으면 옛날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것 같았다. 호와 있을 땐 학창 시절을, 후와 있을 땐 아버지와 그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오늘은 하다 하다 기관에 있었던 일까지 떠올릴 줄이야.

“어? 야! 나도! 나도 해줘!”

내가 받았던 대로 손끝을 이용해 열심히 두피 마사지를 하고 있으려니 옆에 똑같이 생긴 머리가 하나 더 생겼다. 덕분에 매우 건장한 남성 두 명이 발가벗고 허리를 접고 있는 정말 희귀한 장면이 펼쳐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호의 머리 위에도 샴푸를 쭉 짜고 열심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후 형은 다 됐으니까 헹궈요.”

“나 벌써 끝난 거야? 아, 진짜 저 방해꾼 새끼!”

샤워기를 틀어주며 말하지 남궁후는 투덜거리면서 머리를 헹궜다. 나는 남궁호의 머리를 조금 더 문질러주었다. 그러나 후를 약올리기 위함인지 일부러 소리 내어 하하하 웃는 녀석의 뒤통수에 꿀밤을 한 대 먹여주고, 형도 얼른 가서 헹구라며 보내버렸다.

마침 다 헹구고 물을 닦아내면서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지 않는 남궁후와, 눈 따가우니 지랄하지 말고 얼른 비키라며 이 악물고 말하는 남궁호를 보고 있자니 또 웃음이 났다. 그러나 녀석들은 호가 다 헹굴 때까지도 서로를 발로 차고, 손으로 밀면서 계속 투닥거려 결국 잔소리를 하게 만들었다.

“다 큰 어른들이 유치하게 싸우지 말아요, 좀! 애들도 아니고 왜 그래요?”

“얘가 짜증 나게 굴잖아!”

적잖이 억울했는지 웃음기 어린 타박에도 녀석들은 서로를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새빈 힘센 거 아니까 여차하면 힘을 합치기로 했던 거라 어쩔 수 없었지만, 너랑 있을 때 얘랑 같이 있어야 한다는 건 진짜 짜증 나!”

“나도거든? 내 평생 너랑 공통으로 싫어해 본 건 있어도, 좋아하는 게 겹칠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거든? 진짜 김진호를 둘로 나눌 수도 없고!”

한 번 떠오른 기억이라 그런지 투닥거리는 두 사람 위로 한정된 애정을 서로 더 받으려고 괜히 투닥거렸던 아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은 성격이라 쟁취할 용기도 없어 구석에 가만히 서 있다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아이였으나 사실은 속으론 나도 몇 명과 싸웠는지 몰랐다.

그런 은밀한 경쟁의식과 소심한 성격으로 인해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던 나는 그날도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봉사자들이 오는 날이라 들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돋보일 자신이 없는 스스로가 싫어서 입술을 삐죽이며, 저번 봉사자가 놔두고 갔던 색칠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어? 아니지, 아니지! 얘랑 나누는 것도 싫은데 거기다 다른 생각까지 하는 건 좀 아니지!”

“네? 어, 어? 잠! 억!”

갑자기 복부에 전해지는 압박에 이상한 소리를 내는 새 시야가 훅 내려갔다. 눈앞에 탱실한 엉덩이가 보이는 걸로 보아 쌍둥이 중 한 명이 날 어깨에 들쳐 맨 것 같았다.

“미끄러운 데서 이러면 위험하잖아요! 형, 내려, 끄아앗!”

갑자기 사람 엉덩이를 꼬집어버리는 게 어딨어!

“푸핫- 방금 그거 뭐야? 꺄악이라고 한 거야, 방금?”

“아니거든요!”

너무 놀라서 지른 단발마가 꺄악하는 소리로 들린 건지 녀석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얄미워서 눈앞에 보이는 엉덩이를 찰싹하고 때렸다가 다시 한 번 더 꼬집혔다.

“하지 말라고요!”

“너 풉, 엉덩이 빨개졌다 한쪽만.”

“형이 꼬집어서 그렇잖아요!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그만 쓰다듬고 얼른 내려 줘요, 얼른!”

넘어질 걸 감수하고 발버둥을 치며 말하자 그제야 날 내려놓은 녀석은 씩씩대는 내 양 볼을 꼬집어 당겼다.

“진호야, 나 누구게?”

아까 옷 벗으면서 가르마 다른 쪽으로 타고 누가 누군지 알려줘서 알았던 건데, 아까 머리 감으면서 그런 건 다 없어졌다. 나는 내 볼을 꼬집고 있는 얼굴과 옆에서 삐딱하게 서 있는 얼굴을 힐긋 보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믈라여.”

“어어? 요게! 이젠 맞춰볼 시도도 안 하네?”

사실 뭔가 감으로 알 것도 같았지만, 세게도 꼬집었는지 얼얼한 엉덩이가 아파서라도 맞추고 싶지 않았다. 나는 빨개졌다고 들은 엉덩이를 손으로 꾹 눌러 문질렀다. 문지르기만 했는데도 얼얼한 통증이 올라오는 게 못마땅해서 반항의 의미로 퉤, 하고 침 뱉는 시늉을 하며 혀를 내밀었다. 진짜 침을 뱉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바로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던 녀석의 얼굴은 멀어지지 않았다.

“아닌데. 눈 굴리는 거 보니까 너, 좀 아는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은 얼굴을 더 가까이 하며 내 눈을 빤히 마주 봤다. 그대로 보고 있다간 눈이 몰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조금 보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믈른드그여. 그그브다 블 아프그드읍..!”

훅 들어오는 말캉한 혀의 감촉에 놀라 다시 눈을 치켜뜬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기다란 속눈썹이었다. 꼬집고 있던 손은 어느새 풀려 한쪽은 부드럽게 볼을 감싸고 내 얼굴을 젖히고 있었고, 하나는 뒤로 젖혀지느라 꺾이는 허리를 받치고 있었다. 입 안을 가볍게 쓸고 입술을 한 번 쪽 빨고 떨어진 녀석은 나를 내려다보며 씩 웃고 있었다.

“하아, 이, 이게 무슨.”

“내가 호야.”

“에, 예?”

상황에 안 맞는 상큼한 자기소개가 어이없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자 녀석은 내게 윙크를 해보였다. 코웃음이 절로 나오는 모습에 화를 버럭 내려던 나는 뒤에서 쑥 잡아당기는 힘에 깜짝 놀라 턱 말문이 막혔다.

“힛, 잠, 하으으!”

귓바퀴를 한번 잘근 깨물더니 진득하게 핥아 올리는 혀의 자극에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는 것을 지탱해준 팔을 잡고 혀를 피해 고개를 비틀었다. 다행히 오싹한 느낌을 주던 혀는 금방 떨어져 나갔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숨을 몰아쉬는 귀에 웃음기 어린 속삭임이 들렸다.

“내가 후야.”

나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뒤를 째려봤다. 그냥 정상적으로 말해주면 어디 덧나냐?

“우리가 말이야, 생각해 봤는데.”

“네가 우리 못 알아보는 거, 그게 다 강렬한 인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

“...네?”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이상한 소리를 하는 후에게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진지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잊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기억을 새겨주면, 진호도 우리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아닌데요.”

후가 말하는 강렬한 기억이 뭔지 알 것 같아 빠르게 부정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내가 하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녀석답게 혼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가슴에 두른 팔에 힘을 주더니 나를 질질 끌고 커다란 욕조 쪽으로 다가갔다. 발버둥을 쳐야 할까, 그럼 얘가 날 놓쳐서 엉덩방아 찧는 거 아닌가, 하며 잠깐 고민하는 새 뒤에 쫓아오던 호에게 발이 들렸다.

“일단 우리 진호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시작해볼까?”

“뭐, 뭐를요?”

둘은 나를 마치 나무에 걸린 해먹 같은 모양새로 들고 욕조로 들어가면서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괜히 발버둥 쳤다가 녀석들이 놓치면 크게 다칠 것 같아 어쩌지도 못하고 들려있던 내 엉덩이에 따뜻한 물이 닿았다. 천천히 몸이 잠기는 나를 보면서 호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욕조에 가만히 몸만 담그는 건 재미 없으니까, 간단한 게임이나 하나 하려고.”

“아니, 그게 왜 재미가 없어요? 너무 재밌을 거 같은데? 막 몸이 풀리고 힐링될 것 같은데?”

반신욕을 위한 욕조답게 그렇게 깊지 않아 물이 쇄골 정도에 올 때쯤 엉덩이가 바닥에 닿았다. 나는 앉을 수 있는 상태가 되자마자 얼른 몸에 힘을 주고 자세를 바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금을 잡아 다리를 벌리고 다가오는 호와, 허리를 잡아 자기에게 바짝 붙이는 후로 인해 내 의지와는 완전히 다른 포즈가 되어버렸다. 민망하게도 내 엉덩이와 녀석의 거기가 스칠 정도로 바짝 붙어 앉은 호가 내 눈가를 엄지로 살살 쓸면서 말했다.

“진호야. 이제부터 우리가 네 눈을 가렸다가, 뗄 거야.”

“예?”

시범이라도 보이듯 말하면서 눈을 한 번 가렸다 떼는 녀석의 손에 눈만 껌벅껌벅 대고 있으니 이번엔 뒤에서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럼 그때 네 앞에 있는 게 쟤인지, 나인지 맞추면 돼. 알았지?”

“예?!”

그렇게 얼떨결에,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은 게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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