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등 떠밀려 나오긴 했지만 막상 부엌을 벗어나고 보니 엄청나게 넓어 보이는 집을 둘러보고 싶은 욕구가 막 샘솟았다. 배를 문지르며 다시 거실로 나온 나는 기분을 멜랑꼴리하게 했던 야경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현관에서 여기까지 오는 복도에도 문이 두 개 보였고, 부엌 가는 것의 반대편 통로에도 방이 있는 것 같았다. 거실을 실컷 구경한 나는 청소기 소리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부엌 쪽으로 소리쳤다.
“형들! 방 안에도 봐도 돼요?”
“어! ...아! 근데 현관에 가장 가까운 방은 안돼!”
원래 그렇게 말하면 보고 싶어지는 법인데. 몰래 잠깐만 열어볼까 고민이 되었지만 왠지 <푸른 수염> 동화가 생각나 애써 궁금증을 떨쳐내 버렸다. 녀석들이 대학 때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잊지 말자, 김진호. 괜히 열었다가 정말 알고 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거나 보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현관 쪽 복도를 조금 기웃거리다가 이내 거실과 연결된 다른 통로 쪽으로 몸을 틀었다. 첫 번째 문을 여니 아주 책으로 가득 찬 방이 나왔다. 방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안마의자 외에는 정말 책꽂이와 책밖에 없었고, 꽂혀있는 책들은 대부분 제목이 영어로 적혀있는 두꺼운 원서였다. 멋으로 꽂아 놓은 거 아닌가 싶어 몇 권 뽑아 스르륵 넘겨보는데, 중간중간 밑줄과 필기체로 된 메모, 접힌 부분들이 있었다.
“이런 거 보면 진짜 의사인 것 같기도 하고.”
바보라고 한심하게 여겼던 옆집 형이 똑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은 이 멋쩍은 기분은 뭐지. 나는 괜히 관자놀이를 긁으며 서재인 것 같은 방을 나와 다음 방으로 옮겨갔다. 이어진 두 개의 방은 쌍둥이가 각자 쓰는 방인 것 같았다. 이름이 적혀있는 것은 없고 옷만 있어서 어떤 게 누구 방인지는 모르겠지만, 각 방에 연결되어 있던 화장실에 칫솔이 꽂혀있던 것을 보면 확실히 둘이 쓰고 있는 방 같았다.
어쨌든 볼만한 인테리어라고는 깔끔한 벽지와 침대, 책상만 있던 방을 대충 휘- 둘러보고 나와 마지막 방문을 열려는 참에, 저 멀리서 쌍둥이의 외침이 들렸다.
“진호야! 청소 다 했어!”
“네! 수고하셨어요!”
“이제 같이 씻게 이쪽으로 와!”
그렇게 말하는데 냉큼 가면 내가 바보게? 나는 허공에 대고 혀를 한번 내밀어주고 나서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싫어요! 둘이서 먼저 씻으세요!”
“응, 안돼! 같이 씻을 거야! 너 안 오면 우리가 간다? 네 발로 오는 게 좋을걸?”
아니, 내가 본 화장실만 해도 이미 두 개나 있는데 뭐 하러 같이 씻자는 건지 모르겠다. ...솔직히 뭘 노리는지 모르는 건 아닌데, 그래서 더 순순히 응하기 싫었다. 나는 허공에 혀를 한번 내밀고 막 열려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 잠금장치가 있나 보는데, 아쉽게도 그건 없었다.
“김진호!”
문을 막아둘 게 없나 방안을 둘러보는데, 이 방에도 침대와 책상외에는 문이 열려있는 붙박이장 외에는 다른 게 없었다. 이 방은 심지어 누가 쓰는 방도 아닌지 책상과 옷장이 텅텅 비어 있었다.
“좋아! 5분! 5분 동안 못 찾으면 오늘은 얌전히 재워준다!”
“대신 5분 안에 잡히면 오늘 그냥 잡아먹힐 줄 알아!”
저 멀리서부터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내 작은 반항이 놈들 입장에선 상황을 더 재밌게 만들어 준 것 같았다. 그냥 나갈 걸 괜히 버텼나. 나는 시작이라는 소리에 괜히 더 초조해져서 주변을 둘러보다 들어올 때부터 활짝 열려 있던 옷장으로 들어갔다. 앞의 방들 살피다 보면 5분은 그냥 지나갈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숨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게 무슨 때아닌 숨바꼭질이야, 진짜.
대충 옷장 안을 살피니 성인 두 명 정도는 들어갈 것 같은 공간이 있었고, 옷을 더 잘 찾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전등이 달려 있어 환했다. 나는 일부러 더 소리 내어 쿵쿵 걷는 것 같은 쌍둥이의 발소리에 쫓기듯 얼른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아주 살짝만 열어둘 심산으로 손가락으로 문을 잡고 당겼다.
철컥, 띠리릭.
“어...?”
정말 작은 틈만 남기도록 문을 당긴 후 손을 뺐더니 의도와는 다르게 문이 완전히 닫혀 버렸다. 이게 아닌데. 거기다 방금 옷장이 닫히는 소리치곤 뭔가 잠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거기다 안을 환하게 비춰주던 전등은 센서 등이었는지, 문이 닫히자마자 불이 나가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크다고 생각했던 옷장이 갑자기 너무나 좁게 느껴졌다. 아무리 잡히는 게 싫어도 이건 아니야. 나가자. 나는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을 들어 문을 짚고 힘껏 밀었다.
“이거 왜, 왜 이래?”
나는 숨을 흡 들이마셨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힘껏 밀었으나 덜컹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안돼. 싫어!
“진호야!”
“나, 여, 여기, 여기...!”
순식간에 숨이 가빠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굴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있는 힘껏 소리라도 질러 위치를 알리고 싶었으나, 누가 성대를 잡고있는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금방 와서 열어줄 거야. 집이 좀 많이 넓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방에서 가장 작은 옷장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면 찾아서 열어줄 거야.
...근데 아니면? 아니면 어쩌지? 좀 찾다가 귀찮아서 그만둘 수도 있잖아. 다 큰 성인인데 알아서 하겠지 싶어 그냥 먼저 씻고 자버릴 수도 있잖아.
“나 여기 있, 있어요. 여기....”
나는 더 이상 커지지 않은 목소리로 애써 중얼거리며 문 위에 귀를 댔다. 내 이름을 번갈아 부르던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머리로는 그래도 설마 같은 집에 세 명 있는데 계속 안 나오면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주겠지,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여기서 영원히 못 나갈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나를 쉽게 잊으니까. 나는 금방 잊혀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아버지가 그랬고, 엄마가 그랬고, 지나쳐온 많은 사람들이 그랬고, 회귀 전 다섯 명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정말이지 이성은 계속해서 당연히 찾고 있을 거라고, 그래봤자 집안인데 뭐 얼마나 더 걸리겠냐고 말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뭐라도 들릴까 귀 기울여도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 더 그랬다. 나는 대고 있던 귀를 떼고 다시 한번 문을 세게 밀었다.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 조용한 바깥, 어둡고 좁은 옷장. 내가 그들의 눈앞에 있을 때도 마치 없는 사람처럼 그랬는데, 이렇게 안 보이는 곳에서 조그만 소리로 부르는 걸 알아줄까.
정새빈이랑 있을 때는, 누군가의 온기가 닿아 있을 때는 아무렇지 않던 어둠이 자꾸 안 좋은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싫어. 아니야. 그만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언젠가 마주해야 했던 차가운 얼굴들을 애써 떨쳐내 보지만 없어지긴커녕 더 선명해졌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불안해하는 내가 멍청이 같은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가고 싶어. 무서워. 너무 무서운 생각만 나. 누가 좀, 나 좀 꺼내,
“김진호! 찾았-다...?”
“...훌쩍.”
“진호야?”
시야가 밝아졌다. 코를 먹으며 같이 들이마신 공기가 시원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본 곳에는 남궁호와 후가 나란히 서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봐, 맞잖아. 쟤네들이 멍청이도 아니고 찾는다고 말해놓고서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 상식적으로 그게 더 말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찾을 거라고,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진호야. 왜 그래, 응? 여기 무서웠어? 그래서 그래?”
“여기 나갈까? 이리 와, 진호야. 나가자.”
가만히 앉아 점점 더 가빠져 오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남궁 후와 호가 내 앞에 나란히 쪼그려 앉더니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숨는다고 옷장에 들어가 울고 있는 이상한 상황인데도 비웃거나 놀리지 않는 모습에 코끝이 찡해졌다. 둘 중 한 명이 손을 뻗어 나를 그들 사이로 끌어당기는 순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흐어어엉- 아무, 아무 소리도 안 나서, 무서, 무서웠, 흐어엉-”
“그랬어? 혹시 우리가 진호 안 찾아서 계속 여기 안에 있을까 봐 무서웠어?”
나를 안아 들며 묻는 말에 나는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세게 비비면 피부 쓸린다며 내 손을 살살 잡아 내린 호가 우리가 발소리를 계속 냈어야 했다고 사과해왔다. 날 안고 방문으로 향하던 후도 더 재밌을 줄 알았다고, 무섭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듣는 나도 말하는 둘도 지금 황당하게 구는 건 나라는 걸 알 텐데도 정말 아이 달래듯 장단 맞춰 달콤하게 얼러주었다.
둘이 달래줘서 그런지, 순간 극단으로 치달은 감정을 그대로 토해내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공포감을 주었던 곳에서 멀어져서 그런지 나는 거실에 올 때쯤 되어서 완전히 울음을 그치고 코만 조금 훌쩍거릴 정도로 안정될 수 있었다.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급격히 몰려오는 창피함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차마 얼굴을 들고 있을 수도 없을 정도라 고개를 푹 숙였는데, 쌍둥이는 그 모습을 보고 더 풀이 죽은 걸로 오해한 모양인지 더 과장된 목소리로 내 역성을 들기 시작했다.
“내가 저 금고 문 부숴줄게. 우리 진호 무섭게 어? 혼자 잠기고 말이야. 아주 안 되겠어! 그지?”
“훌쩍, 아니, 그런, 그러진 않아도....”
발까지 쿵쿵 구르면서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손을 저어가며 말려도 후는 아니라고, 그런 금고 박살 내야 한다며 콧김을 뿜었다. 그러면서도 날 안은 채 어딘가로 계속 걸어가는 녀석에게 이제 그만 내려달라고 하려는데, 옆에서 쓱 나온 손이 내 앞머리를 뒤로 완전히 넘기듯 이마를 쓸어 올렸다.
“일단 우리 진호, 물 더 식기 전에 얼른 가서 씻고 몸 담그자. 식은땀이 장난 아니야.”
“그래, 그러자. 형들이 진호 무섭지 말라고 옆에 꼭 붙어서 씻겨 줄 테니까 안심해. 알겠지?”
말하는 표정을 봐선 아무래도 녀석들 역시 내가 어느 정도 진정된 걸 눈치채고 자기들 사심 채우려는 것 같았다. 이 집 화장실은 넓고 밝아서 아까처럼 무서울 것 같진 않았지만, 나는 어둡고 좁은 것보다 더 끔찍했던 혼자인 기분을 다시 느끼기 싫어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녀석들은 그런 나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걱정 말라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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