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미안.”
“...수건 줄까?”
“아뇨.”
나는 눈을 비벼 밀가루를 털어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밀가루에 무슨 수건이야, 수건은. 대충 눈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만 닦아내고 눈을 뜨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눈치를 보는 쌍둥이가 보였다. 그들을 향해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며 머리를 가로로 세차게 흔드니 후두둑 밀가루가 사방으로 날렸다. 아주 난리 났네.
“아니, 원래 반죽은 내가 하는 걸로 얘기가 된 건데 이 새끼가....”
“네가 칼질을 더 잘하니까 반죽을 내가 하겠다고 했잖아, 이 고집....”
“그만.”
나는 아직도 양푼 끄트머리를 잡고 있던 두 사람을 향해 검지를 까닥였다. 그 손짓을 알아들은 두 사람은 냉큼 양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밀가루를 얼마나 흘린 건지 양푼 안을 들여다보니 후가 부었던 양의 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까 가득 부을 때부터 조금 불안했는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말릴 걸 그랬다. 나는 손으로 테이블을 대충 쓱쓱 쓸어 한쪽으로 밀가루를 모으며 가만히 나만 보고 있는 둘을 향해 턱으로 싱크대를 가리켰다.
“후 형은 도마랑 칼이랑 가져가서 털어오고, 호 형은 재료에 묻은 밀가루 털어내요.”
“응!”
대답은 잘하네. 털어낸다고 털어냈지만 그래도 내 머리와 몸엔 여전히 밀가루가 풀풀 풍겼고, 바 테이블 위도 내가 손으로 쓴 길을 따라서만 깨끗해져 있었다. 당연히 바닥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보통은 이걸 다 치우고 요리를 하는 게 맞는데, 그러기 싫었다. 여기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밥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너무 허기졌다. 청소하고, 씻는 시간을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을 만큼. 나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내 눈치를 보는 쌍둥이들이 해주는 ‘김치 수제비’가 먹고 싶었다. 둘만 상관없으면 그냥 이대로 대충 치워두고 밥부터 먹자고 해볼....
“진호야, 우리 배고픈데 이 정도만 치우고 그냥 먹을까? 이제부턴 진짜 조심할게!”
“그래, 그러자. 청소는 나중에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 너 몸에 묻은 밀가루도 여기서 털어 그냥.”
“그럴까요, 그럼? 형들만 괜찮으면 전 좋아요. 근데 불안하니까 저도 요리 도울게요. 같이해요, 우리.”
나는 좋다고 활짝 웃는 둘을 보며 도마를 올릴 공간을 만들기 위해 테이블 위의 밀가루를 다시 한번 쓱쓱 밀어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우린 같이 김치 수제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투닥거리는 둘을 중재하고, 레시피만 완벽히 외웠지 제대로 된 요리라곤 라면밖에 안 해본 둘에게 지시를 내리다 보니 어느새 냄비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왠지 뿌듯한 마음에 코밑을 훑고 있는 내게 수제비를 젓고 있던 후가 고개를 돌렸다.
“내일은 진짜 우리가 다 해줄게.”
“맞아. 다른 요리도 레시피는 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는 데다, 오늘 실전도 한 번 경험해봤으니까. 이젠 정말 우리가 다 할 수 있어.”
남궁호는 그렇게 말하며 수저를 가지러 바 테이블을 돌아가려는 나를 저지했다. 엉거주춤하게 멈춰선 나는 녀석의 제스처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같이 하는 것도 나름 재밌었는데 둘은 아니었던 건가. 나는 둘이 뒤돌아 있는 새 입술을 조금 삐죽이며 섭섭함을 달랬다. 뭐, 해주겠다는 것도 좋긴 하니까.
그나저나 이러저러해서 여기까지 오긴 했다만, 나 언제까지 여기 있는 거지. 일단 둘이 하는 말을 봐선 내일은 확실히 여기 있는 걸로 정해진 모양이네.
“저는 내일도 여기 있는 걸로 결정인 거예요?”
보글보글 소리가 나는 냄비에서 수제비를 뜨는 두 사람을 보며 턱을 괴고 물었다. 그랬더니 수저를 챙기던 남궁후가 뒤돌아 걸어오며 답했다.
“응. 안 그래도 조만간 우리가 번갈아 가면서 데리고 있는 건 어떠냐는 이야기 나오긴 했었거든. 이런저런 일이 좀 있어서. 정새빈 새끼가 갑자기 제멋대로 굴 줄은 몰라서 놀라긴 했는데, 무사히 찾았으니까 일단 그건 나중에 응징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걜 시작으로 삼을까 해.”
“그래서 다음 차례는 형들이고요?”
테이블에 있던 밀가루가 묻을까 봐 수저를 들고만 있던 남궁후는 남궁호가 내 앞에 수제비 그릇을 놓자마자 그 위에 수저를 걸쳐놔 주었다. 내 두 번째 질문에 답한 것은 내 옆에 있던 의자를 반대편으로 가지고 가던 남궁호였다.
“어차피 최태혁이랑 민선우는 지금 해외에 있어서 못 해. 정새빈한테 계속 맡겨놔서 애 하나 망가트리느니 우리가 데리고 있는 게 걔네들 입장에서도 백번 나을걸.”
나는 이 자식들아, 나는. 내 의견은! 울컥 치솟는 답답함에 나는 나란히 앉아서 씩 웃는 녀석들을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남궁후가 손을 뻗어 내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며 자상한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그냥 긴 호캉스 한다고 생각해, 진호야. 청소 걱정 없고, 밥할 걱정 없는 좋은 집에서 휴가 보낸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네가 뭘 원하든 다 해줄게, 우리가.”
내 코를 톡, 치는 손가락에 눈을 감았다 뜨니, 시야에 다정하게 웃고 있는 두 녀석의 얼굴이 가득 찼다. 남궁호가 후의 말에 이어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까지 모두 해주겠다고 속삭이는 것을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입안이 간질거렸다. 뭔가 지는 것 같아 짜증 나는데 싫지는 않았다.
나는 입 안을 잘근잘근 아프지 않게 씹으며 수제비를 크게 한 숟갈 펐다. 내 취향대로 쌍둥이가 외우고 있던 레시피보다 더 많은 고추가 들어간 국물에선 얼큰한 냄새가 났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숟가락을 향해 후후 바람을 불고 입을 크게 벌려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맛있어.”
“진짜?”
“네. 진짜 맛있어요. 형들도 얼른 먹어요.”
둘은 내가 두 숟갈 더 먹는 걸 보고 나서야 숟가락을 들었다. 한입 먹더니 만족스러웠는지 아주머니가 해주셨던 것보다 맛있는 것 같다면서 뿌듯해했다. 그 모습이 웃겨 나는 목으로 킥킥대면서 다음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정말 맛있긴 맛있었다.
“도대체 정새빈 새끼는 뭘 한 건지 모르겠어. 진호 넌 앞으로 뭐든 두 그릇씩 먹어.”
“그래. 손목이 이게 뭐야. 이렇게 잡고 힘주면 부러지겠어.”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나 진짜 많이 먹는데. 나는 숟가락을 들지 않은 쪽 손목을 쥐고 주물거리는 남궁호의 손을 파리 쫓듯 쳐내고 의기양양하게 받아쳤다.
“이 정도 크기면 세 그릇은 그냥 먹어요, 저.”
“네 입으로 세 그릇이라고 말했다, 너? 먹을 때까지 못 일어날 줄 알아.”
사람은 자고로 잘 먹어야 하는 거라면서 자리에 없는 정새빈을 씹어대고 날 향해 잔소리를 하는 모습이, 마치 예령이한테 잔소리하는 예령이네 아주머니 같았다. 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녀석들은 먹는 내내 그동안 날 찾기 위해 어떤 고생들을 했는지 떠들다가 서로 싸우기도 하고,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해주다가 또 싸우면서 시끄럽게 굴었다. 나는 먹는 틈틈이 녀석들이 말싸움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한쪽에 골라낸 호박을 냉큼 녀석들의 그릇에 넣어 버렸다. 결국 세 번째 시도에 걸려 아프지 않은 꿀밤을 먹고 남은 호박을 억지로 먹을 뻔했을 땐, 기지를 발휘해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았냐며 되레 큰소리를 쳤다. 말문이 막힌 녀석들은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내 그릇에서 호박을 골라 가져갔다.
녀석들은 말한 대로 내가 정말 세 그릇을 먹을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웃고 떠드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어느새 세 그릇째 비우고 있었다. 그 많던 수제비를 다 먹고 나서야 배가 터질 것같이 빵빵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의자에서 일어나 서니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과식의 결과에 나는 후, 하, 후, 하, 밭은 숨을 쉬며 배를 문질렀다.
“와, 미쳤나 봐. 이걸 어떻게 다 먹었지, 나? 미쳤는데? 와, 어떡하지.”
밀가루가 위에서 점점 더 부풀어가는 느낌에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울상을 짓자 그릇을 치우던 후가 씩 웃으며 날 향해 윙크했다.
“걱정 마. 금방 소화될 거야.”
“예?”
뭐라는 거야. 이게 어떻게 금방 소화돼.
“정 그러면 구경도 할 겸 집안 좀 걷고 있어. 다 치우고 소화 도와줄게.”
“...예?”
소화를 도와준다는 게 무슨 말이지? 되묻는 소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묻힌 건지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어느새 고무장갑을 야무지게 끼고 설거지를 시작한 호와 청소기가 어딨냐는 혼잣말에 멜로디를 붙이며 부엌을 벗어난 후를 보니 설명을 듣기는 그른 것 같다.
나는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배를 문지르며 옷이 들썩일 때마다 밀가루가 풀풀 날리는 것을 바라봤다. 이 상태인데 집안을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온 집안을 더럽게 하느니 그냥 여기 앉아 배나 문지르고 있어야겠다고 결론을 지으려는 찰나, 누군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아!”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리니, 청소기를 들고 온 남궁후가 날 보고 씩 웃으며 의자를 발로 밀고 있었다.
“너무 배부른 것도 안 좋아. 밀가루 흘리는 건 걱정 말고 슬슬 좀 걷고 있어. 토해도 안 멈춰줄 거니까.”
“...예?”
그러니까 뭔데. 뭐냐고. 무슨 뜻인 건데. 솔직히 무슨 뜻인지 좀 감이 와서 더 불안하니까 그냥 말하라고!
“씁! 얼른. 시간 줄 때 마음의 준비하고 있어.”
“넵.”
따지려고 주먹을 불끈 쥐었던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부엌을 벗어났다. 응,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 거 같긴 한데, 아닐 거야. 그렇게 애써 현실도피를 하며 배를 슥슥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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