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피곤해 보이는데, 안아줄까?”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고 걷고 있는데 호가 불쑥 머리를 내밀며 물었다.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건물을 벗어나는 중인데 뭐가 피곤해 보인다는 거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아까 거울로 본 내 모습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 몰골이면 그냥 가만있어도 엄청 피곤해 보일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는데 갑자기 몸이 훅 들렸다.
“아니, 안아달라고 고개 끄덕인 거 아닌데....”
물어본 것은 호였는데, 날 안아 든 것은 후였다. 호는 확성기랑 망치를 들고 있어서 후가 움직인 것 같았다. 스스로의 생각에 긍정하느라 끄덕거린 동작이 크면 얼마나 크다고 그걸 인식하고 바로 안아 들다니. 반사신경도 놀랍지만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점이 더 놀라웠다.
코앞에 차 세워뒀다면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반항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던 나는 그냥 툭, 후의 가슴팍에 옆머리를 기댔다. 공주님처럼 안긴 이 자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엄청 창피했던 것 같은데. 최태혁이랑 정새빈한테 몇 번 당해봤다고 좀 익숙해진 것 같았다. 거기다 안아 든 사람들이 워낙 안정적으로 안고 있어서 불안하지 않고 편하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다들 천하장사도 아니고, 어떻게 건장한 남자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거예요?”
“한두 명한테 안겨 본 게 아닌가 봐, 우리 곰돌이?”
나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지적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기대있는 몸이 잘게 떨리는 것을 보면 남궁후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린 힘이 세고,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거든. 그리고 너 안 건장해. 굳이 따지자면 말랑말랑 보들보들해. 지금은 미친놈 때문에 비실비실 푸석푸석하지만.”
“...그거참, 당사자가 듣기엔 좀 기분 나쁜 표현이네요.”
“걱정 마. 금방 포동포동하게 만들어줄게.”
그것도 딱히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닌데. 근육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건장하다고 생각했는데 남이 보기엔 아니었나 보다. 진짜 말랑거리나 팔을 주물러 봐도 내가 느끼기엔 그냥 적당히 평범한 남자 몸이었다. 살이 빠져서 전보다 뼈가 도드라지긴 했지만 비실거린다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 하긴 날 안고 있는 남궁후 팔뚝을 보면 상대적으로 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가, 얜 나 들고 있느라 힘을 줘서 굵어 보이는 걸 수도? 시답잖은 생각만 하고 있는데, 슬렁슬렁 걸어오고 있던 남궁호가 시야에 들어왔다.
응, 얘네 진짜 운동 열심히 하는구나.
“살찌워서 맛있게 잡아먹어야지.”
정말 먹는다는 의미가 아닐 텐데도 남궁호는 나를 향해 깨무는 시늉을 했다. 나는 좀 질린 표정으로 녀석을 노려보다 눈을 감아버렸다.
요 며칠간 툭하면 누워서 자기만 해서 그런지 그 조금 움직였다고 진짜 피곤해져 왔다. 체력이 똥이 된 건가. 체력을 회복하려면 운동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눈꺼풀 위로 따뜻함이 내리 앉았다.
눈을 떠 둘러보니 역시 건물을 완전히 벗어나 환한 햇빛 아래 있었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고, 멀지 않은 곳에 번쩍거리는 차가 서 있었다. 흔하지 않은 빨간색인 걸 봐선 저번에 탔던 쌍둥이네 차인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았는지 남궁호가 걸음을 서두르더니 뒷좌석 문을 열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대충 던져 넣었다.
“네가 안고 왔으니까, 공평하게 진호는 조수석에 앉아.”
“지랄, 애 피곤한 거 안 보여? 뒷좌석에서 재울 거거든.”
“꺼져. 앞좌석 의자 젖혀놓고 자는 게 훨씬 편하거든.”
그런 건 너네들끼리 싸우기 전에 나한테 먼저 물어봐라, 좀.
몸을 기울여주는 남궁후의 어깨에 기대 차 앞에 내려선 내가 한심하게 쳐다보든 말든 쌍둥이들의 말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걸 좀 들어주고 있다가 고개를 기울여 뒷좌석과 조수석을 가늠하다 조수석 문을 열고 냉큼 타버렸다.
“야!”
“오예! 너 빨리 안 타면 놔두고 감.”
쟤네가 어딜 봐서 낼모레면 30대인 의사들이냐고. 나는 뒷좌석에서 보내오는 원망의 눈빛을 모른 척하며 창밖을 구경했다. 여기 왔을 때의 기억이 없어 마치 처음 보는 풍경 같았다. 차에 타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해진 둘 덕분에 나는 빌딩이 빽빽이 들어선 곳을 멍하니 보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시원한 손이 얼굴을 쓰다듬는 감각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딘가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놈들을 따라 처음 보는 집에 들어갔다.
“전에 갔던 그 집이 아니네요.”
단순히 아파트라고 부르기엔 너무 넓어 보이는 거실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리듯 말하니 뒤따라 들어오던 남궁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집은 본가 비슷한 거고, 여기는 시간 없을 때 자고 가는 집이야.”
“아....”
본가면 본가지 본가 비슷한 건 또 뭐람. 정확히 이해되진 않았지만 되묻기 귀찮았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넓은 전면창으로 다가갔다.
이 근방에서 이 건물이 가장 높은 모양인지 다른 건물들보다 시야가 높았다. 별생각 없이 전망을 둘러보고 있던 내 눈에 익숙한 장소가 들어왔다. 위에서 내려다볼 일은 없었던 데다가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옆의 넓은 부지를 차지한 병원 건물에 빛나고 있는 간판을 보아선 확실했다. 유난히 익숙한 건물은 쌍둥이네 집안이 소유한, 내가 다녔던 대학교였다.
“이렇게 가까우면 피곤할 때 바로 와서 자기 편하긴 하겠네요.”
나는 내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읊조리듯 말을 건네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건물에서 나오는 빛들을 눈에 담았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졸업마저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곳을 보고 있자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4년 동안 졸업만 하자는 일념으로 꾸역꾸역 다녔던 곳. 대학에 붙었다는 걸 알았을 때까지만 해도 기뻤던 것 같은데, 정작 다니는 내내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일 정도였다. 가느다랗게라도 연결되어 있던 끈이 끊어지는 느낌은 서늘했고 잔인했다. 그런 상태에서 닥쳐온 경제난은 더없이 끔찍했다.
어느 정도는 내 선택도 있었으므로 누군가를 온전히 원망할 수도 없었던 새로운 시련 속에서, 나는 점점 거칠고 공격적으로 변해갔다. 생전 쓰지 않던 욕을 입에 담고, 내 상황에 대해 절망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서서히 모든 것들을 체념해갔다. 슬픔과 외로움을 우울로 치환하면 살아갈 수 없었기에 차라리 분노하기로 마음먹은 결과였다.
“씻자, 진호야.”
과거를 떠올리느라 멍하니 반짝이는 불빛들을 보고 있던 내 허리를 따뜻한 팔이 감싸왔다. 창에 비치는 나를 보고 씩 웃는 남궁후를 보며 나는 힘없이 웃었다. 딱히 대단한 의미는 없었다. 그저 힘든 기억들을 꺼내 보느라 지친 정신으로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선택한 미소였다. 상황을 무마하기 위한 정도의, 입꼬리 끌어올리기 운동.
아아, 또다. 또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 나쁜 감각과 함께 기분이 진창으로 굴러떨어졌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느낌에 억지로 올렸던 입꼬리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창에 비친 무표정한 내 얼굴.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정새빈이라면 이럴 때 바로 입을 맞춰 왔을 텐데, 여기에는 그가 없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날 것의 우울감이 버겁다.
“아니다. 맛있는 거부터 먹자. 야! 남궁호!”
“어… 어? 잠, 아니, 형! 제가 걸어갈게요!”
녀석이 갑작스레 나를 번쩍 들고 간 곳은 부엌이었다. 서양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넓은 부엌에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거실이 커서 주방은 작겠다고 생각했는데, 주방도 거실만큼 컸다. 디귿 모양으로 되어 있는 요리하는 공간과 바처럼 기다란 테이블이 있었고, 그 너머엔 기다란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남궁후가 인도하는 대로 그 의자 중 하나를 빼 앉는 순간,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표정의 남궁호가 내가 들어온 반대 방향에서 휘적휘적 걸어들어왔다.
“뭐야, 씻는 거 아니었어? 욕조 물 틀어놨는데.”
“응, 순서 바꿔야겠어. 우리의 귀여운 곰돌이가 영 울상이라서 맛있는 것부터 먹여야 할 것 같아.”
“흐음… 그래?”
내가 또 언제 그렇게 울상을 지었다고. 입을 삐죽이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궁호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주자 녀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야, 내가 안 보는 새 한 대 쥐어박았냐? 애가 왜 이렇게 기가 죽어 있어?”
“헛소리 그만하고 너도 와서 시작해라. 냄비로 처맞기 싫으면.”
남궁호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빈정거리자 아래 선반을 뒤적거리던 남궁후가 냄비를 꺼내며 살벌하게 받아쳤다. 또 말싸움 시작인가 싶었는데 의외로 남궁호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별말 없이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남궁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번엔 도마와 칼을 꺼내서 바 테이블 위에 놓았다. 칼자루가 녀석을 향해 있는 것을 보면 나보고 썰라고 시키는 것은 아니고, 나를 보면서 요리할 심산인 것 같았다.
“너 먹는 거 좋아한다며. 여기 일하는 아주머니 솜씨가 진짜 좋으신데 사람 왔다 갔다 하면 지내는 데 불편해할 것 같아서 며칠 쉬시라고 했어. 대신 레시피를 좀 받아놨지.”
남궁호가 도마 옆에 음식 재료가 잔뜩 든 바구니를 내려놓더니 남궁후에게 앞치마를 받아 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가 진짜 맛있는 집밥 해줄 테니까 넌 거기 앉아서 우리가 얼마나 멋있는지나 보고 있어.”
나는 어느새 앞치마를 한 채 칼을 도마에 꽂으며 호언장담하는 남궁후를 보며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바구니에 큼지막한 글씨로 ‘김치 수제비’라고 적혀있는 종이가 붙어있는 것도 웃기고, 요리해주는 걸로 마치 세상을 다 얻어주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구는 녀석들도 웃겨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바보처럼 키득키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기대할게요? 안 그래도 배달 음식 좀 질리던 참이었거든요. 진짜 맛있게 해줘요.”
“당연하지. 우리 사전엔 최고밖에 없어.”
힐긋 확인한 바구니 안에 밀가루가 보였다. 시간은 좀 걸리겠다만 그래도 기성품이 아니라 반죽부터 만들 생각을 할 정도면 인상과는 달리 요리를 어느 정도는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예령이네 아주머니나 예령이가 아닌 사람이 날 위해 요리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많이 웃기고 조금 설레는 기분으로 양손으로 턱을 괴고 녀석들을 바라봤다. 조금 뒤 머리부터 밀가루를 뒤집어쓰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활짝 웃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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