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미친놈이 뻔뻔하기까지 하네. 야, 포동포동 살찌워서 왜 너한테 보내. 우리가 고이 잡아먹을 테니까 오늘부로 넌 신경 꺼.”
“...쫑쫑아, 세이프 워드 있어. 까먹으면 안 돼.”
내가 무슨 개소리를 들은 건가 눈을 굴리며 분석하고 있는데 남궁후가 코웃음을 치며 빈정거렸다. 그 내용도 내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우는 연기까지 할 정도로 날 보내기 싫어하던 정새빈은 무슨 변덕인지 이젠 나보고 잘 다녀오라고 하는데, 그 와중에 날 데려간다는 쌍둥이 중 한 명은 데려가서 살찌워 잡아먹을 거란다. 지금까지의 대화 내용과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 정말 나밖에 없는 거야? 며칠간, 아니, 15일 동안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만 따라서 산 업보를 치르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감정에만 따르자면 너네 미쳤냐고, 안 그래도 정신 사나우니까 좀 가만히 있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주도권을 잡은 이성이 극구 말리고 있었다. 심지어 정새빈한테도 다시 형이라고 해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인데 깽판은 절대 못 치지. 아무튼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쌍둥이를 따라간다는 건 확정된 것 같은데, 일단 그거부터 정정해야겠다.
“저 그냥 집에 갈래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한숨과 함께 나온 말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너무 피곤했다. 다 쫓아내고 좀 누워서 쉬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리하고, 그러고 나서 반응하고 싶었다. 지금으로선 이런저런 생각들이 치고 들어와 뭐 하나에만 집중하기도 어려운 데다가, 너무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탓에 그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질려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무감정한 상태랄까.
“안 돼.”
“맞아, 그건 좀 곤란해.”
그래, 내 말을 순순히 들어주면 그게 정새빈이고 쌍둥이겠냐. 나는 다시 한번 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 집에 가고 싶은 기분이면 집에 있었어도 또 집에 가고 싶었을 것 같았겠는데.
“안 되긴요, 이게 당연한 거지. 집을 보름이나 비워뒀는데 당연히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당연히 형들 따라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말 꺼낸 김에 얼른 내 옷이나 찾아서 갈아입고 집에 가야겠다. 일단 가서 다 집어치우고 한숨 자고 일어난 후에 생각해야지. 그다음엔 연락 온 거 답장을 하고.... 답장을, 하고. 답장. ...하아, 엄마한테는 안 해도 되려나. 관심이 없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없는 줄은 몰랐는데. 성인이 된 후 나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더 칼 같아졌다는 사실이 또 한 번 여실히 와닿았다. 문자 한 통은 솔직히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아, 몰라, 몰라. 화 안 난 걸로 만족하자, 그냥.
뭔가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자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나는 또 뭘 하려고 했는지 망각하고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속 시끄럽다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한 거겠지. 또 다른 고민으로 넘어가려는 사고회로를 급하게 차단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만 생각해, 그만. 지금은 우선 닥친 일부터 해결하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 한숨인지 모르겠다.
오늘 눈 뜨기 전까지만 해도 안 이랬는데. 몸이 망가지더라도 어제까지의 생활이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정새빈이랑 그걸 하는 게 좋았다기보다는 그냥 아무런 고민 없이 흘러가는 대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지냈던 그게 좋았다는 거지. 응, 그거야. 솔직히 쓸데없는 생각 날려버리는 덴 엄청 효과가 좋긴 했고, 기분도 뭐, 좋긴 했지만.... 악! 나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미쳤냐 김진호?!
“쫑쫑아.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예, 네?”
혼자 또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내 손을 잡아 내리면서 말을 거는 정새빈을 보며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방금 뭐라 그랬더라? 아, 당연한 건 없다고. 내가 아까 무슨 말을 했는데 저 말이 나오지? 당연히 집에 가는 거 아니냐고 말해서 그런가. 그래, 그건가 보다.
“지금 막 생각이 멈추지 않지? 복잡하고, 정신없고, 어제까지 하던 대로 그냥 다 잊고 잠이나 자고 싶고.”
“어… 맞긴 한데....”
“그래서 안 돼. 너 혼자 있으면, 그럼 안 돼.”
정새빈은 멍하게 녀석을 보고 있는 내게 손을 뻗었다. 순간 쌍둥이가 막을 줄 알고 눈을 굴렸으나 남궁후와 호, 둘 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지켜볼 뿐이었다. 덕분에 정새빈의 손은 아무런 방해 없이 내 얼굴에 닿았다.
“잠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지만, 사람은 언제고 깨기 마련이야.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해지지만 배는 생각보다 빨리 차고, 술은 처음엔 취해도 결국엔 늘어. 핸드폰으로 하는 연락들은 기다리는 텀이 생기고, 너는 결국 적막함을 맞이할 거야.”
녀석은 세심하게 내 앞머리를 정돈해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너는 무너져. 나는 너의 현실들을 잊게 해줬을 뿐, 없애진 못했거든. 한껏 외면하다가 맞닥뜨리는 상처는 더 아프고, 힘들고, 우울해. 그걸 너 혼자 하게 둘 수는 없어, 쫑쫑아. 그런 것들에 익숙해지는 건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닌 걸 알아서, 너까지 그렇게 두고 싶지는 않아.”
말라붙은 눈물 자국까지 문질러 닦아준 정새빈이 양손으로 내 턱을 받혀 올리며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음 같아선 네가 지금 원하는 것처럼 내가 계속 옆에서 현실이 넘쳐오지 못하게 막아주고 싶어. 하하하.... 내 흥미를 자극했을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까지 하기 싫어서 짜증이 치미는 걸 참게 만든 거 보면 넌 진짜 대단해, 쫑쫑아.”
다시 멍한 무표정으로 돌아온 녀석이 내 어깨를 잡더니 몸을 빙글 돌렸다. 뒤에는 정새빈과 나를 주시하고 있는 남궁호와 아까 자기가 들고 들어왔던 확성기와 망치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남궁후가 있었다.
“따라가. 말하는 거 보니까,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아니, 쟤네는 그렇게 못 해. 더러운 기억 묻어있는 옷은, 그냥 여기에 버리고 가. 필요한 것들은 피터 팬이 알아서 대령할 거야.”
피터 팬이란 게 원래 애들 챙겨주면서 대장 노릇 하는 거 좋아하잖아. 그 속삭임을 끝으로 녀석의 손이 나를 앞으로 밀었다. 미는 힘에 못 이겨 반 발짝 정도 앞으로 나간 나는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쌍둥이들을 번갈아 봤다. 분위기가 왠지 이대로 얘넬 따라가야 할 것만 같이 되어버렸는데, 이게 맞는 건가. 정새빈의 설명인지 설득인지, 하여간 그 말들은 여전히 듣는 사람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의미인지 감이 잡히긴 했다. 그리고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숨도 못 쉴 만큼 나를 짓눌렀던 절망감을, 그 외로움을 또 혼자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거기다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머지않아 할아버지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실 예정이었다. 이런 사건 없이 그 일이 일어났을 때도 혼자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이번엔 적어도 그 배는 힘들 것이다. 원래는 예령이와 같이 있으려고 했는데, 어쩌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령이보다 그걸 모르는 사람과 있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누군가와 같이 있어야 할 것 같긴 했다. 근데 그 ‘누군가’가 쌍둥이인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까지 같이 있었던 정새빈이 좀 더 편할 것 같....
“어딜.”
내 고개가 돌아가려는 찰나 남궁후가 턱을 잡더니 다시 앞을 보게 만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눈을 위로 치켜뜨니 녀석은 보란 듯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 못 들었어? 너 못 데려가게 하면 우리도 힘쓸 거라고 했잖아. 네가 순순히 자발적으로 따라와 주길 바라지만, 싫다고 하면 별수 있나. 드러누워서 떼쓰기엔 우리가 너무 징그럽게 커버렸으니 다 큰 어른답게 납치나 해야지, 뭐.”
“정새빈한테 다시 가는 건 더더욱 못 참으니까 뒤돌아볼 생각하지 말고, 이대로 우리 따라서 나가면 돼.”
망치를 빙빙 돌리면서 말하는 건, 말을 안 들으면 저 망치를 쓴다는 그런 협박인 건가. 나는 남궁호 손에 들려 붕-하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망치를 멍하니 보며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뱉었다. 이쯤 되니 가니 마니 고민한 게 다 덧없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 처음도 아니고, 결국엔 쟤네들이 처음에 주장하는 대로 될 거란 걸 알면서 뭐 하러 고민을 사서 하고 앉았을까. 나는 옆에 바짝 붙어 내 허리를 잡고 앞으로 인도하는 남궁후를 따라 터덜터덜 남궁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내가 가까워지자마자 남궁 호는 손을 뻗어 아까 정새빈이 정리해놓은 앞머리를 확 쓸어 넘겼다.
“걱정 마. 우린 즐거울 거야.”
시야가 확 트여 눈앞이 환해지는 것과 동시에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아 묘하게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시원한 손바닥에 잠깐 이마를 기댔다 뗐다.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은 맑아진 느낌. 순간 아늑했던 이 공간이 갑갑하게 다가왔다. 그래, 일단은 나가서 바깥 공기를 좀 마시자.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어깨를 펴고, 자세를 똑바로 했다. 그리고 정새빈에게 인사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나, 간다.”
“응.”
녀석은 아까 날 밀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손만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동안은 어둡게만 지내서 인테리어를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지만, 어쨌든 내내 같이 있었던 공간에 혼자 서 있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하긴 했다. 본인은 괜찮다지만 아무리 봐도 사무치게 외로워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할까 말까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그때, 그 쓰레기장에서.”
“응,”
“나 주워 와줘서 고마웠어.”
“...그래.”
희미한 미소와 함께 돌아온 대답에 나는 웃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결연한 마음으로 쌍둥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현관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뒤에서 정새빈의 외침이 들렸다.
“세이프 워드 있다는 거 잊지 마!”
“닥쳐라, 정새빈!”
“그리고 지금 헤어지면 다신 못 볼 것처럼 결연하게 가는데, 아니야! 쫑쫑이 살찌면 바로 데리러 갈 거니까 너무 그렇게 슬퍼하지 마.”
“응, 아니야, 평생 헤어지는 거 맞아. 이제 너 새끼랑은 못 만나게 하자고 이미 최태혁이랑 민선우도 동의했거든.”
방금까지 어딘가 아련하고 애잔하면서 어른스러운 분위기였던 거 같은데. 왜 눈 한번 깜박한 새에 다시 초딩 싸움이 된 거지. 나는 정새빈에게 양손 중지를 내미는 쌍둥이들과 그러든지 말든지 양팔을 흔들며 나를 배웅하는 정새빈을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얼른 현관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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