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진호는 결국 그 진창으로 돌아갔다. 자기 좋을 대로 소리를 지르며 손목에 손자국이 남을 만큼 쥐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던 여자를 따라 걸어가는 진호는 마치 죄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화가 날 정도로 기분이 더러워졌다. 기분이 더럽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왜일까. 남 일인데, 왜 이렇게 화가 치밀까. 주먹을 꾹 말아쥐면서 새빈은 결국 푸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고개를 젖혀 어두운 천장을 보고 있다가 불현듯 걸음을 옮겼다. 적당한 속도로 걸어서 도착한 회장 문가에 최태혁이 보낸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봐선, 안에 진호가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새빈은 저 남자도 참 멍청한 새끼라고 생각했다. 그냥 따라만 다니라고 붙여놓은 게 아닐 텐데. 아까 진호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던 것을 최태혁이 알면 곱게 넘어가진 못할 것을 남자는 모르는 듯 보였다. 거기다 아직 최태혁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 따로 상황 보고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신체적인 폭력은 없었으니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그러나 진호가 쓰러진 순간 보고는 해야 했다. 뭐, 덕분에 방해꾼이 없어진 새빈으로선 이득이었으니 상관없었지만.
어깨를 한 번 으쓱인 새빈은 남자에게서 눈을 떼고 회장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회장 안 대다수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진호였기에 노력 없이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 여자는 진호를 전시라도 하듯이 팔을 잡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중이었다. 그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진호가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지 몰라도 앞에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은 둘의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여자를 보며 숙덕대고 있었다. 당연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아들을 진심으로 아낀다면 쓰러졌던 애를 굳이 다시 데리고 와서 변명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본인의 뜻으로 왔더라도 돌아가서 쉬라고, 병원에 가라고 하는 편이 사랑하는 아들을 대하는 태도이리라. 새빈은 눈을 굴려 질린 표정을 하고 서로에게 속삭이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멍청한 년 하나 때문에 쓸데없이 진호만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누구든 한계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정신력이 강하면 더 많이 버텨낼 수 있는 것일 뿐, 무한대인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한계점을 지나면, 사람은 망가진다. 작은 생채기가 아니라 망가진 정도까지 가면 그 정신에 완치란 없다는 것이 새빈의 지론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쓴다. 도망치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하고, 잊어버리고 하면서 쌓이는 것을 방지하고,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덜어낸다. 스스로가 견딜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만. 혹은 그보다 덜 힘들 수 있도록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끊임없이 관리한다. 그러나 그 속도보다 상처가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를 땐 별수가 없었다. 망가지는 수밖에.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저 안에 서 있는 진호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안 그래도 툭하면 상황을 외면해버리는 습관이 있을 정도로 힘든 현실을 살고 있는 진호에게, 도망갈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지금 상황은 아마 지옥 같을 터였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지옥으로 밀어 넣은 사람에게 진호 혼자 일방적으로 애착을 형성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어색해 보이긴 해도 힘있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부들거리기 시작한 시점에서 새빈은 그라도 나서야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바로 움직였다. 진호가 족쇄같이 얽어매던 손이 떨어진 후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새빈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나가지만 않았다면, 아까 대기실에서처럼 힘으로 여자를 떼어낼 생각이었다.
새빈은 다급하게 걸어가는 진호의 뒷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다시 몸을 돌려 여자를 주시했다. 때리면 귀찮아지겠지. 딱 한 대만이라도 갈기고 싶은데. 폭력은 나쁜 거라고, 너만은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울며 부탁하던 어머니의 모순적인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모습을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새빈에게는 어머니가 울며 호소하는 것들이 지키지 않으면 제가 귀찮아지는 것들에 대한 기준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방금과 같은 충동이 들 때마다 어머니가 울던 모습을 곱씹어 보곤 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누군가를 팼을 때 눈물을 보인 기억이 있는 것으로 봐선, 그런 행동은 돈으로 해결하기에도 상당히 귀찮은 일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그 귀찮은 일을 벌이기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무래도 저 여자를 어떻게 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둬야겠다. 운이 좋네, 아줌마. 가증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여자를 향해 속으로 중얼거린 새빈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회장을 벗어났다.
쫑쫑이는 어디로 갔을까? 눈물이 가득 고인 눈망울을 봤을 때, 울 장소를 찾아 떠난 것 같은데. 눈물이 터지기라도 할까 봐 급하게 나간 걸 보면 사람이 없는 곳을 찾고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곧 터질 것 같았던 걸로 봐선 멀리 가진 못했을 것 같고.... 그렇게 가벼운 추리를 하면서 건물에서 나간 새빈은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곳만 찾아서 둘러봤다. 그러다 호텔 뒤편 쓰레기 소각장이라는 팻말을 따라갔을 때,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끅끅거리는 소리와 근처를 서성이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새빈은 남자를 지나쳐 코너를 돌았다.
“찾았다.”
가여운 쫑쫑이. 저렇게 울다 지쳐 넋을 놓을 정도로 괴로웠으면서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놓아줄 때까지 웃어야 했던, 불쌍한 김진호. 새빈은 바닥에 널브러지듯 앉아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진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구두 소리에 미약하긴 하지만 몸이 움찔거리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진호는 그가 지척에 다가가 쪼그려 앉을 때까지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망가진 건가. 더 일찍 뭔가를 해줬어야 했나. 그렇게 생각하며 새빈은 진호에게 속삭였다. 지금 네가 있는 지옥 속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노라고. 내가 네 상처를, 그 아픔을 덜어내 줄 테니 나를 따라오라고.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한계를 찍기 전을 경험했던 새빈은 나름대로 고통을 낮춰주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해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했다간 진호의 정신은 망가지는 걸 넘어 부서질 수도 있으므로 그는 먼저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다행히 그의 속삭임에 고개를 든 진호의 눈동자는 전보다 생기를 잃었을지언정 죽은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의 온기에 기대오는 것을 봐도 망가졌다기보단 지친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잘된 일이었다. 이대로 가서 모든 것을 잊게 해주면 진호는 다시 그 생기 넘치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없는, 그래서 더 소중한 그 모습으로 다시 되돌려 놓을 것이다.
새빈은 택시를 타자마자 진호의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꺼두었다. 외부의 연락 따위 방해만 될 뿐, 진호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비척비척 이끄는 대로 그를 따라오는 진호를 부드럽게 인도하여 도착한 곳은 새빈만 알고 있는 그의 오피스텔이었다. 작업을 할 때나 세상에서 단절되고 싶을 때 찾기 위해 마련한 곳은 사자마자 온 집안에 방음벽과 문을 설치하고, 창문엔 암막 커튼을 달아놨다. 덕분에 매우 어둡고 조용한 공간이 되어 몇 배는 더 아늑해졌다.
진호도 그의 아지트가 마음에 들기를 바라며 새빈은 눈물을 흘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진호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둡고 좁은 공간을 무서워한다는 정보와 달리 진호는 아무런 반응 없이 빛 한 점 없는 방에까지 따라왔다. 아마도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지친 상태인 듯했다. 괜찮았다. 이젠 진호를 가두고 있을 엿 같은 절망감을 날려줄 수 있는 방법을 실행할 수 있는 곳에 왔으니까.
새빈은 진호를 침대에 앉히고 먼저 무드 등을 아주 약하게 켰다. 미약한 주황색 불빛이 진호를 어렴풋이 비추는 것을 확인한 그는 진호의 볼에 조심스레 손을 올려놓고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갔다. 곧이어 느껴지는 말캉한 촉감 위에 가만히 입술을 얹어 놓고 있던 새빈은 이내 힘없이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방안은 금세 질척이는 소리와 간간이 내뱉은 가쁜 숨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다 입안에 가득 고인 타액이 입가로 흘러내릴 때 즈음, 진호의 어깨를 꾹 눌러 눕힌 새빈은 단정한 셔츠를 손으로 잡아 뜯어버리고 바지 또한 뜯듯이 벌려서 연 다음 확 내려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대뜸 옷을 찢어버리는 것은 놀라웠는지 멍하던 진호의 눈에 당황과 함께 조금의 생기가 돌아왔다.
“걱정 마.”
안 아프게 해줄게. 몸도, 정신도. 새빈은 아주 나른한 톤으로 그렇게 속삭이며 드러난 진호의 맨살을 손을 살살 쓸어내렸다. 그리고 갑자기 노출되어 서늘한 나머지 꼿꼿이 선 유두가 손바닥에 걸리는 것을 느끼며 씩 웃었다.
“으, 응....”
새빈이 모르는 척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유두가 손가락 사이에 걸릴 때마다 진호는 몸을 움찔거리며 신음했다.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깨문 채 몸에 힘을 주는 모습을 보던 새빈은 고개를 숙여 방치되어 있던 반대쪽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손은 진호의 팬티 속으로 넣어 아직 잠잠히 있는 것을 확 움켜쥐었다.
“아, 잠, 아흐읏...!”
꼬집듯이 집어 올리는 손가락과 부드럽게 빨아올리는 입, 민감한 곳을 살살 주물러오는 손까지. 진호는 방심한 사이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느껴지는 쾌감에 놀란 듯 새빈의 어깨를 밀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는 그 뜻에 따라줄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