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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14화 (114/234)

114화

새빈은 기막힌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운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기막힌 우연. 진호는 그를 백수라고 여기는 것 같았지만, 새빈에겐 엄연히 직업이 있었다. 본명으로 활동하지 않아 아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고, 내키는 일만 받았기에 노는 날이 더 많기는 했으나, 일단은 꽤 알아주는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이었다.

오늘 호텔을 오게 된 것도 회사 사무실 같은 공간에서 하는 미팅엔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걸 아는 투자가인 사촌 형이 본인 소유의 호텔에 불렀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새빈이 참여했던 영화가 천만을 기록하면서 승승장구하자, 속편에 대한 계획이 벌써 진행돼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여기 올 필요도 없이 거절할 예정이었지만 엄마 쪽 사람이었기에 얼굴을 비추는 성의 정도는 보여주려고 나온 자리였다. 거기서 진호를 주워오게 될 거라곤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여기 사람이 쓰러졌대요! 누가 119에 좀 전화하세요!”

“아니, 아니에요! 애가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그런 건데 무슨 119까지.... 이봐요! 전화 내려 놓으라구요!”

그 딴에는 매우 정중하게 거절을 하고 나오던 와중에 같은 층에 있던 다른 회장에서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새빈은 듣기 싫어도 귀에 내리꽂히는 고함을 흘려들으며 부모 자격 없는 쓰레기가 여기도 있네,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남자의 외침처럼 119에 전화하거나 도와줄 의지는 없었으므로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걸음을 멈춰 세운 것은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섞인 익숙한 이름이었다.

“진호야, 김진호!”

진호. 평범하고 투박한 그 이름이 그의 귀에 꽂혀 들어왔다. 새빈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소리가 들렸던 방향으로 상체만 돌렸다. 이름이 불렸으니 혹시 목소리라도 들릴까 싶어 가만히 눈을 굴리고 있는데, 정말 쓰러진 건지 외침에 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확실하지도 않은 거 그냥 가던 길이나 갈까. 잠시 고민하던 새빈은 열려 있는 문으로 직원들이 몇 명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방향을 틀어 천천히 걸어갔다. 문가에 선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보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었다. 화려한 회장 안, 점잖게 빼입고 있는 인간들. 그가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종류의 실속 없는 모임이 열리고 있던 와중 같았다. 넓은 회장 안을 한번 휘- 둘러본 새빈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허리가 접힐 정도로 한껏 기울이고 나서야 작은 틈을 통해 숨을 헐떡이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정말 진호였다. 그가 힘을 썼을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겁에 질린 얼굴로 헛숨을 들이키고 있는, 김진호. 새빈은 보폭을 크게 하여 그답지 않은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인파를 헤치고 들어간 곳에서 진호는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떤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숨을 가쁘게 쉬면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는데, 나오는 소리가 너무 작아서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은 듯이 몸을 바르작대며 뒤로 물리려 했지만 그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결국 앞의 남자가 몸을 조금 움직이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키더니 낯빛이 파래질 때까지 내뱉지 않기 시작했다.

상황을 관찰하던 새빈은 진호를 무식하게도 흔들고 있는 여자를 밀치듯 떼어내고 진호의 시야를 가려버렸다. 미친 듯이 흔들리던 동공이 새빈으로 가득 차자마자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정...새빈….”

숨을 쉬라는 외침에 진호는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새빈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가 미처 답하기도 전에 눈이 위로 올라가며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다. 진호가 완전히 기절해버리자 사람들은 당황스러움에 잠시 숨을 죽였으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이어 그들의 중앙에 있는 진호와 새빈, 그리고 여자에게 갖가지 수군거림이 얹어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쟤 김 회장님 장남네 애 맞지?”

“아아, 그 입양했다던? 그럼 저 옆에 있는 여자가 엄마?”

“아까 쓰러지기 전에, 맞기 싫다고 하던데...? 막 살려달라고.”

역시 엄마였나 보네. 새빈은 옆에서 부들거리고 있는 여자를 힐긋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으로 표정을 숨길 심산인지 고개를 푹 숙였지만, 같은 눈높이에 있는 새빈에겐 앞니에 꽉 깨물린 그녀의 입술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지나가면서 들었던 외침으로 부모 자격 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여자의 자식은 진호인 것 같았다. 전에 짧게 들었던 이야기에서 느껴졌던 불쾌감이 이렇게 들어맞을 줄이야.

새빈은 속으로 조소하면서 진호의 상체 밑과 무릎 밑으로 손을 넣었다. 아무도 도와줄 기미가 없어 보이니 그 혼자서 들고 가려는 심산이었다.

“뭐, 뭐예요, 당신!”

그가 힘을 줘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여자도 따라 일어나 길을 막았다. 쯧, 귀찮게. 안 그래도 사람들이 막고 있어 헤치고 가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엄마 역할을 해 보이고 싶은 건가. 근데 표정이 엉망이잖아, 아줌마. 새빈은 쓰러진 자식을 데려간다는데 걱정보단 표독스러움이 담긴 눈을 보고 겨우 참고 있던 코웃음을 뱉어버렸다.

그 모습에 여자는 자극받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진호를 안고 있던 그의 팔을 잡아챘다. 새빈의 힘이 보통 사람들보단 월등히 세다고 해도, 누군가 있는 힘껏 팔을 잡아당기는 상태에서 성인 남성을 지탱하기는 무리였다. 진호의 몸이 조금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자마자 그는 어이가 없어 웃느라 풀어져 있던 얼굴을 단숨에 굳혔다.

새빈은 본인이 무표정한 얼굴을 할 때 얼마나 맛이 간 사람처럼 보이는지, 그게 얼마나 사람 성질을 건드리는지 잘 알았다. 아버지에게 하기 싫은 것을 요구당할 때마다 이 얼굴로 맞서는 그를 아버지는 더 집요하게 구타했고, 어머니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 항상 애매한 표정을 짓곤 했다. 안타까움과 질림이 섞인 내 편도, 아버지 편도 아닌 것 같은 그런 얼굴.

제 앞의 여자는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와 같이 건방진 것에 대한 분노가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그러나 본인의 힘에 자신이 있었기에 폭력으로 응수하던 아버지와 달리, 여자는 몸을 움찔거리며 반 발자국 뒤로 몸을 물렸다. 새빈은 여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놔.”

몸은 물렸지만 분노 어린 표정은 그대로길래 조금은 버틸 줄 알았더니, 그 단순하고 짧은 한마디를 듣자마자 여자는 이를 악물면서도 손에 힘을 풀었다. 이젠 정말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다음으로 새빈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직도 그들을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는 군중이었다. 그는 이쪽을 힐끔거리는 눈을 하나하나 맞춰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틈이 벌어지더니 새빈이 걷는 속도에 맞춰 길이 생겼다.

그렇게 입구에 도착한 그는 고개를 돌려 회장을 한번 보고 완전히 나와버렸다. 불쌍한 쫑쫑이. 아무도, 정말 아무도 붙잡는 사람이 없다니. 어쩐지 눈물을 흘려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새빈은 그저 잔잔히 미소 지을 뿐, 울지 않았다. 이대로 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잠깐 고민하던 그는 저 멀리서 서성이고 있는 덩치를 보고 고갯짓했다. 아주 작은 몸짓이었는데도 용케 봤는지 남자는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새빈의 앞까지 달려왔다.

“받아.”

새빈은 누가 봐도 최태혁이 붙여둔 것 같은 남자에게 진호를 넘기고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까 만났던 사촌 형에게 전화해 사람 하나 눕혀놓을 수 있는 장소를 내달라고 말했다. 사촌 형은 뜬금없는 부탁에도 별다른 말 없이 알겠다는 말과 함께 직원이 갈 때까지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할 뿐이었다.

새빈은 전화를 끊고 남자에게서 다시 진호를 받아 안아 들었다. 그리고 남자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든 말든 사촌 형이 보낸 직원이 그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것을 지켜보며 진호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새빈이 다시 남자에게 말을 건 것은 직원에게 안내받은 직원 대기실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는 멀뚱히 서 있는 남자를 힐긋 보고 턱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찾으면 알려줘.”

사실 이대로 데리고 나가고 싶지만, 일단은 눕혀서 좀 지켜보다가 정 눈을 뜨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의 경험상 이 정도 가지고 사람은 죽지도, 어딘가 잘못되지도 않으므로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것보단 그가 그동안 파악한 진호라면, 일어났을 때 자기가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장소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알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넘어 패닉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특히나 그게 부모, 그중에도 엄마라는 존재에 관련되면 충분히 있을 법한 가정이었으므로 섣불리 이곳을 뜨는 것보단 머무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일어나자마자 장소가 바뀐 것을 알고 몸을 들썩이며 횡설수설하는 진호의 모습으로 증명되었다.

“아직 호텔인 것 같긴 하니까, 지금이라도 가면....”

두통이 이는지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리는 소리엔 초조함이 가득했다. 예상대로 진호는 그 장소로 다시 돌아갈 심산인 듯했다. 아마도 그 여자를 위한 것 같은데, 정말 기특하고 헌신적인 아들이 아닐 수 없었다.

새빈은 씩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바닥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쓰레기들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그처럼 미친놈이 되어야 하는데, 진호는 아직 너무 멀쩡해 보였다. 상식적이고 착한 것은 남들에게나 좋은 거라는 걸 아직 모르는 건지, 아니면 이 모든 걸 맨정신으로 견뎌낼 만큼 정신력이 강한 건지. 진호라면 후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여자가 들이닥쳤다. 열린 문틈으로 아까의 남자가 보이는 것을 보아 여자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진호를 찾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들어온 여자의 행태를 보던 새빈은 방금 했던 생각을 정정했다. 하는 것을 봐선 정신을 차린 것이 아니라, 정신을 놓아버렸다는 말이 더 어울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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