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네, 아버지. 잘 지내셨습니까.”
“잘 못 지낸다! 자식놈 하나가 매년 생일 때가 되어서야만 겨우 얼굴을 비추는데, 잘 지낼 수가 있나.”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장남으로서 많은 사랑과 기대를 받고 자란 모양이었다. 적어도 할아버지에겐 모든 자식 중에 가장 아끼는 아들임이 분명했다. 집이든 식당이든, 하다못해 이렇게 넓은 회장에서도 할아버지는 단숨에 아버지를 발견하고 시선을 떼지 않았다. 퉁명스러울지언정 모든 말엔 애정이 배어있었고, 날 서 있던 눈빛이 누그러졌다.
“죄송해요, 아버님. 저라도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가벼운 타박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멀거니 있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다소곳이 서 있던 엄마가 나섰다. 차분한 목소리 톤으로 조곤조곤 말하는 것이 딱 할아버지 나이대의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엄마에게 향한 시선은 그저 인사만 하고 지나가는 타인을 봤던 때보다 더 차가웠다.
“네가 왜. 1년에 한 번 보는 걸로는 불안하더냐?”
그 말에 엄마는 아무 대꾸하지 않고 흘러내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생긋 웃었다. 아니에요, 하고 짧은 부정의 말도 잊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태도는 가장 예뻐하는 자식의 반려를 대하는 것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냉정하고 삐딱했다. 얼핏 들으면 뜬금없는 할아버지의 말이었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비극도 멀리서 보면 희극일까? 입을 다물어버린 아버지와 한 발짝 물러선 엄마. 이번엔 내 차례였다.
“생신 축하드려요, 할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나에게로 옮겨온 눈동자엔 애정도, 경계도 없었다. 찌푸린 눈으로 나를 훑어본 할아버지는 작게 혀를 차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인사도 드렸으니 저희 자리로 가보겠습니다.”
“아버님, 생신 축하드려요.”
항상 그랬듯 짧지만 긴 인사를 마치자마자 아버지는 미련도 없이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엄마도 다시 한번 짙게 웃으며 인사를 남길 뿐 그런 아버지를 말리지 않았다. 원래라면 나도 별말 없이 따라나섰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다급하게 아버지의 팔을 잡아챘다.
“아버지. 저희, 저희 사진 찍어요.”
“...사진?”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란 건지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나도 처음으로 먼저 손 뻗어 잡아본 아버지의 감촉이 생경해 말문이 막힐 뻔했지만 애써 이겨냈다.
“할아버지 생신이시니까 가족사진 찍어요, 우리. 아니, 아니다. 그것보다는 두 분 사진 찍어드릴게요. 찍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니까 아버지가 할아버지 옆에 서시면 제가 사진 찍어드릴게요.”
이제는 엄마와 할아버지도 놀란 얼굴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에야 생신 때만 찾아뵈지만 내가 어렸을 때, 그 많은 가족 모임을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나는 왜 이러냐는 되물음을 할 생각도 못 한 채 눈만 치켜뜨고 있는 세 명을 둘러본 후 잡고 있던 아버지의 팔을 당겼다. 얼떨결에 끌려오는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얼른 할아버지 옆에 세워 놓고 회장에 들어올 때부터 부적처럼 쥐고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내가 오늘 여기 온 목적은 매번 하던 연극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해야했지만, 오늘은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마음먹은 것이 있었다. 사진. 나는 오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겨드리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호텔에, 그리고 회장에 들어설 때부터 두려움이 치미는 것을 참아가며 자리를 지킨 것이었다. 나는 좀 전부터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으로 주먹을 쥐고 제발 조금만 더 버티자고 속삭였다. 시간이 지체되면 상황 파악을 마친 아버지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멀어질 테니,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나의 절박함이 두려움을 이겨냈는지 손의 떨림이 약해졌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카메라를 켰다. 앵글에 잡힌 둘은 놀람과 겸연쩍음, 어색함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마일!”
쥐어 짜낸 경쾌한 외침에도 웃는 사람은 없었지만 나는 연속해서 사진을 찍었다. 할아버지를 힐긋 내려다보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힐긋 올려다보는 할아버지. 한숨을 쉬는 아버지와 코웃음을 치는 할아버지. 그리고 찰나지만 마주 보는 두 사람. 거기까지 찍었을 때 아버지는 그만하면 충분히 찍은 것 같다며 할아버지 옆을 벗어났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던 할아버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놈은 크더니 안 하던 짓을 하는구나.”
나는 대꾸할 말이 없어 그저 웃었다. 온전한 가족을 가져보지 못해서 그런가, 나에게는 언제나 가족이 가장 소중했다. 그게 나의 가족이든, 남의 가족이든 ‘가족’이란 단어는 항상 소중했고, 애틋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서로를 온전히 인정하지도 포기하지도 애정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 이상의 분란이 나지 않도록 최대한 얌전한 아이가 되어 지내는 것이 그나마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겨우 그것에 그칠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가 올해 안에 돌아가시는 것을 알면서도 둘을 화해시킬 수 있을 만한 말주변도, 자신도 없는 한심한 나지만 뭐든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사진이었다. 내가 아는 한 아버지의 결혼 이후 두 사람은 나란히 서는 것 자체도 손에 꼽을 정도로 소원했던 사이였기에 바로 옆에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라도 남겨주고 싶었다.
“진호 너는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니? 네 할아버지 심기 안 좋아지셨잖아.”
엄마는 할아버지와 멀어지자마자 작은 소리로 나를 타박했다. 사실, 내 욕심으로는 처음 말했던 것처럼 엄마와 나도 들어가 있는 가족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추억으로 남길 사진에 연극 중인 우리 둘이 끼어드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아마 그렇게 했으면 할아버지는 정말 기분이 안 좋아지셨을 테고, 엄마는 그만큼 더 초조해했을 테니까.
나는 할아버지 생신 기념해서 오랜만에 사진을 찍어드리고 싶었다고 얼버무리며 걸음을 옮겼다. 엄마의 말에 더 반응해주고 싶었으나 중앙을 벗어나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입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려니 점점 숨이 가빠왔다. 다행인 건 축하하는 자리답게 검은색을 입은 사람은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앞서 걸어가는 아버지의 등만 보면서 걸어갔다. 이제 밥만 먹으면 끝날 일이라고, 그럼 먼저 일어나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걷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균형을 잃었다.
“뭐야?”
“죄송합...!”
거친 어조에 반사적으로 사과하며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나오는 얼굴. 절대 잊지 못했던 저 일그러진 표정. 깜박이는 창고 불빛 아래에선 더 음산하고 무서워 보였던 남자가 분명했다. 나를 납치하고 때렸던 사람. 그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뭐?”
“살, 살려, 허억, 저는 예, 허억, 아니, 니에요.”
“어머,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얘, 진호야!”
뭐든 말하고 싶은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턱 막힌 목으로 애써 말을 뱉어봐도 남자의 귀엔 닿지도 않을 만큼 작게 나왔다. 안돼, 이러다간 또 끌려갈 거야. 끌려가면 또 그 어두운 곳에서 맞고, 맞고, 또 맞다가, 그러다 죽을 거야. 이제야 겨우 조금씩 바뀌고 있었는데, 전처럼 안 살려고, 그렇게 살다 벌 받은 것 같아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었는데. 아니야, 아니야. 나는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아. 그리고 잃고 싶지 않은 것도 생겨버렸단 말이야.
“뭐야? 무슨 일이야?”
“김진호 너 왜 이래, 정말! 정신 차려!”
엄마, 엄마. 나 친구가 생겼어. 직장도 생겼고, 엄마를 위해 청소도 했어. 아버지를 위해 사진을 찍고, 예령이네 아저씨도 지켰어. 또 끌려갈 것 같아 무서운 것도 참아가며 아주머니가 부를 때마다 갔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이상한 놈들한테 최선을 다해 다가갔어. 힘들고 차갑고 외롭기만 했었는데, 이제 나에겐 사진으로 가득 찬 앨범도, 평생에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풍선도 생겼고 피부가 맞닿는다는 게 얼마나 따뜻한지도 알게 되었어.
지금 엄마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드는 것보다 더 격렬하고 뜨거운데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해서, 그래서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하겠는, 그런 온기가 있어. 이제야 조금이지만 성장하고 있는 내가 좋아서. 언젠가 또 혼자가 될 걸 알면서도 혼자가 아닌 지금 이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나 죽기 싫어, 엄마. 엄마, 나 살고 싶어.
“이거 미친놈 아니야? 어이! 야!”
“오지, 마, 허억, 오지마. 제발, 허억, 도망가야....”
꼿꼿이 서 있던 남자가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주머니에 넣어져 있던 손이 내게로 뻗어지는 순간, 그래도 조금씩 쉬어지던 숨이 멈췄다. 이명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진 소리들. 머릿속엔 도망가야 한다고, 저 손아귀에 잡히면 안 된다고 빨간색 불빛이 번쩍였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결국 힘없이 뒤로 넘어가는 내 시야엔 온통 얼굴들이 들어왔다.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밀집된 사람들의 눈들이 징그러웠다. 그런데 그 눈들을 가리며 나타난, 익숙한 사람.
“김진호! 숨 쉬어!”
뭔가를 외치고 있는 정새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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